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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의 한가운데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慧峰 혜봉
이 사람이 사는 법 - 이성원
음악에의 첫사랑, 그리고 평생동지 기타와의 만남
이성원(李晟原·42). 경남 진해 생.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부르는 가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요는 어떤 의무감에서 부를 뿐 딱히 동요만 부를 이유는 없으며, 자신은 로커이고, 그것도 뭐하면 그냥 ‘노래 부르는 사람’ 정도로 불러 달라고 했다. 그때 그를 지켜준 것이 또한 음악이었다. 그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혼자 들로 나가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러면 어린 가슴에 시퍼렇게 들었던 멍도 어느덧 눈 녹듯 사그라지고, 혼자 흥에 겨워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무엇엔가 몰입하고 명상하는 버릇이 들었다.
1987년,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판을 내게 된다. 그 무렵 그는 먹고살 방편으로 주위의 추렴을 받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는데, 온통 가난한 문화판 인사들이 모여들자 돈벌이는 고사하고 아예 이들의 사랑방으로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맺은 한 인연의 끝이 모 레코드사와 닿았던 것이었다. 국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그에게 또 한번의 결정적 계기가 왔다. 당시 하치라는 일본인 로커가 한국음악을 공부하러 왔는데 그와 어울리면서 ‘사물’을 접하게 됐고 나아가 록과 한국음악이 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던 것. 하치와의 작업의 결과는 1988년 울림터 극장에서 발표됐다.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평생 가야 할 길을 찾았다고 했다. 기타를 통해 한국적 가락을 새롭게 발현시키겠다는 것. 이후 그는 통기타와 전자기타로 한국음악을 표현하는 데 몰입해 1992년과 2002년에 다시 발표회를 갖는다.
그의 말은 동요 속에는 환경운동까지 내재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자신의 이 말을 이미 얼마간 실천에 옮기고 있다.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여서 전적으로 나서지는 못하지만 방학때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원도 등 시골 초등학교를 돌며 어린이는 물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동요를 함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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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 이성원
불혹의 나이에 동요음반을 발표한 포크가수 이성원. 흔치 않은 동요 가수로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만 사실은 곽성삼, 김두수와 더불어 1980년대 3대 언더 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아티스트다. 덥수룩한 수염에 치렁치렁한 장발은 기인의 향내를 풍기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순응하는 외견일 뿐 실은 맑은 영혼으로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다.
그는 포크로부터 출발해 국악과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노래해 왔다. 최근 동요가수로 제법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화려한 주류무대와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돈 안되고 소박한 무대만을 찾아 나서는 별난 사람이다. 그의 동요는 기억 저편에 실종된 어릴 적 추억과 다정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되살려놓는 마력을 지닌 가락이다.
똑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슴이 시려온다. 그래서인가 그의 동요가락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오히려 즐겨 듣고 가슴을 적신다.
깊은 영혼의 떨림, 그리고 마음의 씻김 01. ♪.등대지기 - 이성원
14. ♪.노을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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