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은혜의 수단들-5
제3절 세례-2
3. 세례의 대상—유아세례의 정당성
(*註:세례와 성찬에 관해서는 교파별로 주장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은 장로교회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쓴 것입니다.)
세례의 대상에 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독특하게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침례교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명확한 지시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아세례는 정당합니다.
유아세례가 정당한 첫 번째 이유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나타났는데, 그 표지는 할례였습니다. 거기에서 유아들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였습니다.
[창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영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약 아래서도 유효합니다.
[롬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유아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후 그들을 언약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아래서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결코 성도의 가정에 있는 이방인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이처럼, 은혜 언약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유아세례의 근거입니다. 구약에서 유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면,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신약은 구약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입니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둘째로, 성도의 유아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태도는 유아세례가 정당함을 지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 백성으로 여기셨습니다.
[막 10: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또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습니다.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셋째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정 세례의 예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지지합니다.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12~15]에 보면,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고, [32~34]에 빌립보 간수와 그 권속도 다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신약교회의 역사는 유아세례를 지지합니다.
유아세례는 신약교회의 매우 초기로부터 시행됐던 보편적, 전통적 의식이며 종교개혁 시기에 재세례파가 반대하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말하기를, 사도 시대에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풍습이 하나님의 섭리로 신약교회에 이어졌음이 틀림없습니다.
폴리캅(69~155년경)은 86세에 순교할 때 자신이 86년간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은, 그의 당시 60세나 70세의 그리스도인 남녀 중에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리겐(185~254년경)은 말하기를, “유아세례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확정된 풍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카르타고 회의(253년경)는 유아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유아들이 제8일 이전에 세례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토의하였고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처음 4세기 동안에 오직 두 명의 교부만 유아세례의 연기를 주장하였는데, 터툴리안은 이방인 부모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세례에 관해 말한 것이고,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는 3살 될 때까지 연기할 것을 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 다 그들의 견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어거스틴(354-430년)은 말하기를, “유아세례의 교리가 교회 회의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세계교회가 일반적으로 실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교리는 아마 사도들의 권위로 확정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세례는 반드시 신앙고백 위에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고백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세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주장입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선택받은 자가 지금 태중에 있느냐, 갓 태어났느냐, 나이가 들어서 늙었느냐 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영아기에 죽었다고 해도 그 아기가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선택한 아기라면 그 아기가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면 그가 어떤 나이이든 간에 세례를 베푸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