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망을 끌어안고 미국 정치 지형에 부는 변화의 바람,
레드 콤플렉스에 균열을 내고 좌파를 흔들어 깨우다
미국이 선거철을 맞이하면 미국을 넘어 온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특히 2018년 중간선거는 대선 못지않은 열기로 달아오르며 기록적인 투표율을 올렸다. 여느 때처럼 현 행정부를 평가하는 성격을 띠었지만, 경기침체와 나라 안팎의 첨예한 정치 지형이 맞물리며 숱한 화제를 낳았다. 이 중간선거에서 깜짝승리를 거두며 세상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일명 AOC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지역구를 벗어나면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는 생애 처음 출마해서 하원에 입성하며, 부활한 미국 좌파의 새로운 얼굴로 단숨에 떠올랐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AOC의 상승세는 깜짝 이벤트가 아니다. 그보다 앞서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좌파의 길을 닦아온 버니 샌더스와 풀뿌리 진보단체들이 있다. 샌더스는 대선에 나서서 뜨거운 인기를 자랑하며 밀레니얼 세대의 환호를 받았다. 젊은이들은 샌더스가 그리는 미국의 이상, 타협하지 않는 좌파 노선, 자신들의 불안한 현실을 알아주는 공약에 열렬히 호응했다. 이전 세대와는 달리 진보 또는 좌파 의제에 거리감을 두지 않는다.
저자 레이나 립시츠는 선거를 중심으로 미국 정치에 부는 이런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현장 가까이서 따라간다. 언론매체에 이름을 알린 정치인부터 지역으로 파고든 풀뿌리단체와 활동가 들까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마주한 사회운동 경험과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그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담아낸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로 모여 좌파의 미래로 향한다. 물론 좌파 앞에 놓인 난관이 험난하고 앞날은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가능성을 제시하며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부족한 사회안전망,
가장 큰타격을 받은 이들이 고장 난 정치를 개혁하러 나서다
그렇다면 급진화된 이 변화의 바람은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일까. 샌더스와 AOC 지지층을 들여다보면 여성과 유색인종 비율이 높고 대개 어린 축이다. 밀레니얼 사회주의자의 전형인 이들은 2018년 경기침체 그늘에서 빠르게 나빠진 사회경제적 상황과 이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의 강진 속에 매섭게 흔들리는 일상을 온몸으로 경험한 당사자다. 더 괜찮은 삶을 위해 빚을 내어가며 대학 졸업장을 따도 극심한 취업 경쟁에 내몰리고, 가까스로 변변찮은 일자리나마 구해도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아랫세대보다 뚜렷하게 빚이 많고, 부모세대보다 못한 경제적 삶을 살게 될 첫 세대로 전망되는 이들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개인이 각자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눈앞의 난관이 해결되리라는 헛된 환상을 단호히 거부한다. 9.11 테러부터 총기 폭력, 기후위기, 팬데믹으로 이어지는 충격적이고 불안한 시대를 통과하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치, 특히 기득권과 밀착하는 민주당의 부패를 목격했기에 실망과 무력감에 휩싸여 정치인을 구원자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족이며 이웃과 단절된 채 소속감과 공공에 봉사하고 사회변화에 이바지할 기회에 목말라하며 자신의 처지를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이들에게 샌더스를 비롯한 좌파 진영은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이해할뿐더러 해결책을 제시해서 그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보여줬다. AOC의 선전이 깜짝승리고 샌더스의 돌풍이 예상 밖이라는 평가가 절반의 진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바꾸며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
레드 콤플렉스라는 수면 아래서 꿈틀대는 변화의 움직임이 표출된 경로가 선거다. 실제로 진보 의제를 내걸고 지지층의 호응을 끌어내어 의회에 입성한 좌파 정치인이 증가 추세에 있다. 진보 또는 좌파를 표방한 풀뿌리단체들이 역량을 집중하는 부분이 바로 선거 관련 활동이다. 단기간에 권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선거 출마이기 때문이다. 긴 안목으로 좌파 운동을 강화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권력을 잡고 정책을 움직여서 동시대인들이 마주한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체제를 전복하기보다는 개혁하는 쪽에 방향키를 둔다. 그래서 선거 후보를 발굴하고 교육하고 함께 전략을 짜며, 선거운동 자원을 지원한다.
이렇게 형성된 신좌파의 특징은 젊고 인종과 젠더 다양성이 풍부하며 소셜미디어를 통한 소통능력이 뛰어나고 지역사회와 인연이 깊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더러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를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사회주의 또는 급진주의에 담긴 뿌리 깊은 공포와 거부감에서 한 발 떨어져 더욱 폭넓은 유권자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좌파단체들도 저변 확대를 위해 이런 태도를 허용하며 유연성을 발휘한다. 그런가 하면 신좌파는 고립된 개인들이 두려움과 불안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고 관심을 행동으로 모아내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좌파는 민주당을 왼쪽으로 움직이려고 부단히 시도하며, 지역민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묻고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문화와 공공의 삶을 일궈나가다
미국 좌파는 지금 50년 만에 처음으로 다양한 지역과 여러 층위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분명 고무적인 일이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만만찮다. 일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진정한 의미에서 꾸준히 대변하는 정당을 만드는 일은 좌파의 간절한 숙원이지만, 아직껏 한 번도 실현해본 적이 없다. AOC가 떠오르게 된 동력도 일하는 사람들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기가 이렇게나 어려워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풀뿌리단체들도 일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권력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염원을 안고 좌파가 끊임없이 성장하려면 지리적 범위를 넓히며 권력투쟁에서 지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운동 생태계부터 구축해야 한다. 좌파가 움츠러든 사이 우파가 깔아놓은 인프라가 엄청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을 놓고 맞붙으려면 대등한 수준의 활동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를 발판 삼아 리더를 발굴하고 제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전략을 실행하며 정책과 정치도 연결해야 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조직이다. 학생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노조와의 관계를 재점화하며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이렇게 연대하는 문화와 공공의 삶을 일궈가는 자세로 뿌리부터 달라지는 변화를 모색하기에, 좌파의 정체성은 타인을 막아내는 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다. 바로 여기서 신좌파는 전진하며 희망을 바라본다.
AOC가 생애 첫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기 2년 전에 그와는 영 딴판인 한 정치인의 놀라운 성공스토리가 있었다. 버니 샌더스 돌풍이 AOC가 승리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류 언론에서 샌더스 열풍을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뉴욕타임스〉가 2015년 5월 1일자 인쇄판에서 샌더스가 내민 대권 도전 선언을 무려 21면으로 끌어내려 묻어버린 일은 이제 유명한 일화다. 당시 기사 제목은 이랬다. ‘오랜 기간 무소속이던 샌더스, 민주당 소속으로 대선 경쟁에 뛰어들다’.
--- p.21
질감이나 진정성, 친근함처럼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이미지를 AOC는 원래 타고난 듯이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다. 2019년 AOC는 인스타그램 라이브11를 통해 새로 입주해서 텅 빈 워싱턴DC의 아파트를 공개했다. 팝콘을 씹고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괴롭힘과 공격을 당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집중력과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시에 이케아 가구 한 점을 뚝딱 조립해냈다. 그는 마지막 부품을 끼워 넣고 혼자서 축배를 들며 외쳤다. “짠! 제가 해냈어요!”
--- p.30
사람들이 샌더스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이해할뿐더러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결책을 제시해서 그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AOC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대학 졸업장을 따고도 학자금 대출을 짊어지고 바텐더로 일하며 의원 월급을 받기 전까지는 워싱턴DC에서 월세 아파트도 구하기 어려운 처지였기에, 자신과 같은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정책(전 국민 의료보험, 대학 무상교육, 최저임금 인상, 공공주택을 위한 대규모 투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 p.29
바이든이 대선후보가 되어 많은 젊은이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을지 몰라도, 경선에서 활약하는 샌더스를 지켜보고 또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은 새로운 세대 활동가들에게 미국 정치가 확장 가능하다는 이상을 심어줬다. 나아가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갈구하게 됐다.
--- p.112
이런 변화 속에는 인구의 99퍼센트를 위한 나라로 미국을 영구히 바꿔나갈 잠재력이 웅크리고 있다. 2020년 대선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트럼프가 패배했을 뿐 트럼프주의가 사라진 건 아니라고 하지만, 국가 단위 선거만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는 없다. 2016년 트럼프 당선에 가린 그늘에서 강력한 신진보주의 운동이 싹텄듯이, 오늘날 신좌파가 큰 그림에 집중한다면 바이든 정부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조직이 강화되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 p.117
정치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사람들, 투표를 해봤자 삶이 바뀌지 않는 현실을 고통스럽게 체득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이토록 재치 넘치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나 소통하다 보니 낯선 애국심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 p.190
“젠트리피케이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문제의 진짜 주범인 부동산 개발업체나 이익이 걸려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대신, 같은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끼리 이웃 간에 등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역사회를 파괴하는 건 커피 마시고 자전거 타는 힙스터가 아니라 레드라이닝redlining(빈곤층, 특히 흑인 거주 지역에 서비스를 제한하는 금융기관의 차별적 관행)인데 말이죠.
--- p.196
주와 지역 차원에서 나타나는 이 현상은 대부분 2016년 샌더스 캠프와 비영리 진보 단체, 노조 내부 좌파가 일군 성과에서 출발했다. 샌더스와 워런은 상원에서, AOC와 스쿼드 일원들은 하원에서 계속 제도권 좌파를 이끌어갈 테고, 샌더스 캠프에서 활약한 베테랑과 활동가 들이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 샌더스 행정부나 우리가 꿈꿨던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겠지만, 여전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쟁취해야 할 세상이 있다.
--- p.198
펠리치아와 동료들이 깨달았다시피, 좋은 의도와 훌륭한 후보, 열정적인 지지자라는 요소를 모두 갖춘 운동도 혼자서 하루아침에 미국 정치 지형을 바꿀 수는 없다. 후보자 한 사람에게 영감을 얻고(수많은 청년에게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선거운동에 풀타임으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영감을 줬던 샌더스 같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쟁점에 관심을 두는 차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직 전문가와 제도적 지원, 꾸준하고 전략적인 이행이 없으면, 샌더스 같은 인물이 불러일으킨 열정마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릴 수 있다.
--- p.247
레너드는 교사와 간호사 들의 싸움부터 교도소 폐지, 경찰 폭력 반대시위 같은 좌파 사회운동까지 “이 순간 가장 흥미로운 정치적 투쟁을 여성들이 주도하는 현실”이 놀랄 일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성은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충격 흡수제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가 ‘복지를 없앨 테니 다들 일자리 두 개씩 뛰고, 의료도 육아도 보장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들 하세요’라고 하면 그 뒷일을 누가 감당했나요? 여성들이 했죠. 국가가 내팽개친 일 대부분을 여성들이 떠안아왔습니다.”
--- p.265
힘이 빠진 채 수십 년을 보낸 좌파 일반, 특히 사회주의 좌파는 현재 조직하고 세력을 넓히고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다시 익히는 중이다. 트위터에서 설전을 벌여 승리하거나 엠앤엠 초콜릿에 다양성을 불어넣고 싶어서, 단순히 눈앞에 닥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와 한 주 40시간 노동, 보통선거권이 세상을 완전히 영원히 바꿔놓은 것처럼, 다시금 세상을 재편할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다.
--- p.333
마틴 루터 킹이나 샌더스, AOC처럼 사랑받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정의를 세울 수 없다. 불확실한 길이라 해도, 때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자세는 공동체의 책무이자 끝이 없는 프로젝트다. 반동주의자와 합의주의자들이 봉기를 진압할 수는 있어도 끓어오르는 마음까지 꺾을 수는 없다. 그 다짐이 우리의 힘이자 의무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권리다.
--- p.342
첫댓글 미국의 정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그의 당선은 깜짝 이벤트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결집하기 시작한 청년 신(新)좌파의 열망이 표출된 정치적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여성과 유색인종을 주축으로 한 이들은 극심한 취업난과 물가 상승 등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X세대 선배들처럼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 코르테스처럼 선거판에 직접 뛰어든 이들부터 노동·환경 운동가까지 다양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들은 청년인 동시에 기성 정치권에 실망한 제3 지대다. 청년도 제3 지대도 선거 전략으로 소비되기 일쑤인 한국 정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청년 신좌파가 앞으로 미국 정치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지지나 동조 여부와 상관없이 일독할 만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