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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4)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③ [영풍교-상풍교-상주보]
2020년 10월 16일 (금요일) [동행]▶ 이상배 대장
☐ 삼강나루→ 영풍교→ 상풍교→ (낙동강칠백리공원)→ 경천교→ 도남서원→ 상주보
* [점촌 출행]▶ [삼강]→ 풍양면 청운리→ 구룡교→ 하풍리[쉼터]→ 낙동강→ 영풍교(-923번 도로)→ (영강 합류)→ 풍양 낙동강 제방길[하풍제]→ (긴 제방길)→ 상풍교(강변식당)→ (택시)-[낙동강 칠백리공원](사벌면 퇴강리) 왕복→ 다시 상풍교→ [낙동강 제방[東路]→ 경천교→ 자전거박물관(-경천대)→ (상주보 경천호)-[도남서원]→ (만촌 부부)-[경천섬-경천호 수상탐방로]→ [점촌 旅舍]
* [영풍교(永豊橋) - 풍양 하풍제(堤)] ― 상풍교까지의, 길고 긴 직선의 제방 길
오전 11시, 영풍교(永豊橋)에 이르렀다. 삼강주막 ‘뱃가 할매’가 이야기하는 옛날에 ‘하풍나루’가 있던 자리다. 영풍교는 문경시 영순(永順面)과 예천군 풍양(豊陽面)을 잇는 콘크리트 교량이다. 영풍교 아래에는, 서쪽에서 이안천이 합류한 영강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그 합류지점의 아래에 상주 ‘낙동강 칠백리공원(빗돌)’이 있다. 그곳은 낙동강 종주에서 가 보아야 할 포인트이다. 그런데 우리가 걷고 있는 낙동강(풍양쪽 東路) 건너편에 있다.
'칠백리 기념비공원' 가기 위해서는 영풍교(永豊橋)를 건너서 영강을 건너야 한다. 그래서 영풍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영강 하구까지 나아갔다. 낙동강 합류 지점 부근의 영강은 상주보의 담수로 본류와 비슷한 수위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리가 없다.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 영풍교에서 923번 지방도로를 타고 영순(면)을 거쳐서, 영순면 김룡리에 있는 영순교(영강)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점촌에서 도로를 이용하여, 함창읍의 외곽을 지나 이안천[어풍로 금곡교]을 건너야, 상주군 사벌국면 퇴강리 ‘낙동강 칠백리공원’으로 갈 수 있다.
영풍교(永豊橋)
영풍교(永豊橋) 위에서 바라본 상류의 낙동강
영풍교에서 낙동강 칠백리기념비 공원에 가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차를 타고도 한 시간 이상을 뱅뱅 돌아가야 하는 너무나 먼 거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풍양의 바이크로드 제방 길[하풍제], 낙동강 동로(東路)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영풍교 부근의 낙동강은 호수처럼 강안까지 물이 가득했다. 흐르는 낙동강이 저 아래 상주보로 인해 담수호가 된 것이다. 오늘 따라 강물은 누런 황토색이다. 아직 홍수 때의 물이 정화되지 않은 듯했다. 내가 몇 년 전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찾은 영풍교 앞(풍양 쪽)의 매운탕집은 너른 주차장과 강가의 들마루는 그대로인데, 지금은 손님이 없어 빈집 같았다.
영풍교(永豊橋) 위에서 바라본 하류의 낙동강(상주보로 인한 담수)
비봉산(백두대간 대미산에서 분기한 문경지맥의 끝자락), 그리고 낙동강, 영풍교
☆…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옷차림을 행장을 차리고 본격적이 트레킹에 들어갔다. 청산(해발 300m)의 절벽의 강안에 나무테크 잔도를 가설해 놓았다. 산굽이를 돌아 나란히 가는 59번 도로[삼강나루에서 풍양으로 가는 길]와 결별하고, 긴 제방길에 들어섰다. 영풍교에서 상풍교까지는 4.3km의 ‘하풍제(堤)’이다. 띄엄띄엄 가로수가 서 있는, 완전한 직선의 바이크로드 … 앞을 바라보면 풍경화 원근법에서 초점이 보이지 않은 아득한 길이다.
‘아, 저 먼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나?’ … 잠시 막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에 주저할 처지가 아니다. 당초 낙동강 1,300리 대장정을 시작하면서 각오한 바, 쉽게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늘의 포인트(도착지) 상주보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직 묵묵히 걸을 뿐이다.
[하풍제(堤)] ― 예천군 풍양면 하풍리에 있는 낙동강 제방(堤防)
[하풍제(堤)] ― 직선의 바이크로드(낙동강 종주 자전거길)
윤발과 족발
긴 하풍제, 제방 길의 강안은 너른 둔치가 평지를 이루고 있어 수변공원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강(江)은 멀리서 호수처럼 고여 있다. 예천군 와룡배수장 앞을 지났다. 그리고 길의 왼쪽은 너른 들판, 간간이 촌락의 집들이 보인다. 들판에는 시퍼런 가을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 간혹 은륜(銀輪)의 바이커들이 질주해 나간다. 시속 40km로 씽씽 달리는 모습이 시원하고 장쾌하다. … 순간, 그 신나는 속도감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의 질주(疾走)와 나의 발걸음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근본(根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저들은 자전거 바퀴로 달리는 윤발[輪발]이요, 나는 오직 육신의 다리, 즉 [足발]로 걷는다는 것이다. 윤발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속도감을 즐기는 스포츠이고, 족발은 내 발로 걸으면서 곳곳의 산하를 품고 생각하는, 사유의 노정(路程)이다.
☆… ‘윤발’의 싸이클링은 모든 것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니, 잠시도 머뭇거릴 틈을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 그에 반해, 나의 ‘족발’은 유유히 걸으면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 과거와 현재, 인간의 삶을 생각하며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발은 마음속에 자연과 인간사의 구슬을 꿰어, 음미하고 사유하는 인문학(人文學)이라고나 할까? 낙동강 1,300리, 멀고도 먼 길이지만,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체득한 ‘느림의 미학(美學)’을 기조로 삼는다. 묵묵히 걸으며 낙동강이 안겨주는 금쪽같은 시간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 대학의 은사이신, 시인 정현종(鄭玄宗) 선생이 인생은 ‘고통의 축제’라고 표현했다. 나의 낙동강 대장정에서 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싯구이다. 이 유유함을 공감이나 한 것일까. 고향의 친구 조시원은 나의 낙동강 종주를 두고 ‘구름이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목월(木月)의 시를 붙여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렇다! 나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다! 저 낙동강처럼 유유히 흐르는 나그네인 것이다.
[뒤로 보이는 산이 문경지맥의 끝 비봉산]― 산의 우측에 낙동강 본류, 좌측에 영강이 유입된다.
길목에 빛바랜 낙동강 이정표가 있다. 안동댐에서 72km, 부산 하구둑까지 313km를 남겨두고 있다. 앞으로 800리를 더 걸어야 한다. 직선(直線)의 길을 오래 걸었다. 저만큼 아래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보인다.
상풍교(尙豊橋)
☆… 오후 1시 상풍교(尙豊橋)에 도착했다. 상풍교는 상주(尙州) 사벌(면)과 예천군 풍양(豊陽)을 잇는 다리이다. 상풍교는 옛날 세곡선과 소금배가 드나들던 ‘운성나루’에 세워졌다. 그렇게 아득하게 보이는 길도 어기차게 걷기만 하면 포인트[예정된 지점]에 이를 수 있다. 다리 앞에 ‘강변가든’이 있다. 이 대장이 점심식사를 하고 가자고 했다. 간판을 보니, 매운탕과 송어회를 전문으로 하는 집인데 ‘3대를 잇는 40년 전통의 맛집’이라고 썼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식당에 들어갔다. 이 대장이 매운탕을 주문하여 식사를 했다. 민물 매운탕은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간판에 내세운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 여독을 풀기 위해 맑은 이슬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상풍교(尙豊橋)
풍양 상풍교 앞
… 그런데 강 건너 훨씬 위쪽에 있는 ‘낙동강칠백리기념비공원’을 지나쳐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아니 낙동강 여정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포인트이다. 낙동강칠백리기념비는 낙동강을 말할 때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진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를 걸어서 갔다가 오는 것은 우리가 지나온 영풍교를 다시 갔다가 오는 것과 같다. 오늘 상주보까지 내려가야 하는 우리의 일정상 불가능한 일이다. … 이 대장이 말했다. ‘풍양의 택시를 불러 다녀오지요.’ 했다. 역시 순발력이 있는, 참 좋은 생각이었다.
상주 「낙동강 칠백리 기념비」
☆… 강변식당에서 풍양택시를 불러 타고 다리(상풍교)를 건너, 상주시 사벌국면 낙동강 서로(西路)의 강안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상풍교에서 칠백리 기념비 공원까지는 4.5km이다. 그 도로의 강안 가장자리에 바이크로드가 시설되어 있었다. 바로 ‘국토 대종주 자전거길’이다. 서울 한강에서 시작하여, 충주 탄금대에서 문경의 이화령을 넘어, 함창을 경유하어 낙동강 칠백리공원을 경유하여 부산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낙동강 서로의 바이크로드는, 상주보의 경천교 앞에서 낙동강 동로(東路)에서 넘어오는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낙동강종주 자전거길’은 안동댐에서 부산 하구둑까지를 말한다. 내가 안동에서부터 지금까지 걸어 내려온 길이다.
상주 상풍교 앞
☆… 오후 2시 40분, ‘낙동강 칠백리기념비공원’에 도착했다.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물미) 강변에 있다. 퇴강리에는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퇴강성당'이 있다. 퇴강리 뒤산 너머엔, 지역의 특산인 '이안배' 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 오후 들어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날씨가 꿀꿀하게 흐리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낙동강칠백리 빗돌’은 돌판이 깔린 아주 널따란 원형의 광장 중간에, ‘유아독존’ 벌쭘하게 서 있었다. 오래된 자연석 빗돌이다. … '낙동강 칠백리 / 이곳에서 시작되다'
오세창 교수가 낙동강이 태백시 매봉산 천의봉 아래 너덜샘을 기점으로 보아, 부산 하구둑까지 낙동강이 1,300리임을 밝히고 학계에서도 정식으로 공인되었지만, 상주(尙州)는 여전히 ‘낙동강(洛東江)’이라는 명칭과 ‘낙동강 칠백리’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빗돌의 하단에「낙동강의 유래」를 적어놓았다.
☆… 낙동강의 대부(代父), 대구대 지리학과 오세창 교수는 일찍이 1996년 11월 16일 영남일보에 기고한 「낙동강 1,300리」제하의 글에서 낙동강의 실제 길이와 탐사 내용을 밝히고 있다. 그 전문(全文)이다.
… ‘낙동강 7백리 무쇠공굴[鐵橋] 놓고요’ 라는 가사로, 흔히들 후세 사람들이 ‘낙동강 7백리’로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옛날 부산에서 상주 낙동까지 뱃길을 뜻하며 당시 경상도의 조공과 특산물을 배에 싣고 상주에서 내려 육로로 문경새재[鳥嶺]를 넘어 남한강을 통하여 한양에 이르렀다. /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경북-대구-경남-부산의 5개 시·도를 통과하는 영남의 대동맥으로 영강, 금호강, 황강, 남강 등 11개 지류가 합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데, 총 연장 1천 3백리(525km)로, 한강 514km보다 11km나 더 긴 남한의 최장의 강이다. / 낙동강은 양백 즉, 태백과 낙동정맥 사이를 흐르는 유역 면적 약 2만 4천 ㎢로 남한의 4분의 1에 해당하며 유역 인구 1천 3백 만 명으로, 산 높고 골이 깊으며 산수가 빼어나 인걸은 지령(地靈)이라고 꿋꿋한 기상과 의리의 선비고장 영남학파를 배출하였다.
산경표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어지고 남쪽에서는 낙동정맥과 낙남정맥 사이를 흐르는 영남의 생명줄로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성스러운 민족의 강이다. / 강의 유래 또한 상주는 옛 가야땅의 가락(駕洛)으로, 가락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으로 명명되었으며, 강의 동쪽은 좌도(左道), 서쪽은 우도(右道)라 하여 문화도 상이하다.
1991년 3월 페놀사건을 계기로, 그해 5월에 ‘낙동강 대탐사’를 통하여, 오염의 현장을 고발하고 중병을 앓는 우리의 젖줄을 살리고자 「자연사랑 낙동강 1300리회」를 조직하고 6회의 탐사를 하였다. /「낙동강 1300리회」는 7백리가 아닌 잃어버린 6백리, 영남의 혼을 찾는 성스러운 생명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1천 3백만 영남인이 1천 3백리 낙동강을 되살리고 찬란한 녹색문화를 꽃피워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이다.’ …
☆… ‘낙동강 칠백리 기념비 공원’을 지나는 제방은 ‘함창제(堤)’(표지석)이다. 여기에서 사벌국면의 상풍교를 지나 그대로 낙동강 서로(西路)를 타고 경천대관광지를 경유하여 도남서원-상주보까지는 13.1km이다. (국토대 종주 자전거 길이다). 낙동강 건너편의 제방 길은 하풍제,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 오전에 우리가 지나온 길이다.
* [상풍교에서 경천교까지] ― 호수처럼 가득한 강물, 제방 길과 산길을 넘어…
☆… 오후 3시 30분, (차를 타고 출발했던) 상풍교 강변식당 앞으로 되돌아와 다시 종주를 계속했다. 사벌국면 상풍교 앞에서 경천대를 지나가는 서로(西路)가 아니라, 낙동강 강변의 동로(東路)를 따라 걷는 것이다. 강을 따라 직선으로 난 제방 길이다. 강안에 둔덕이 없어 호수처럼 가득한 물이 제방 가까이 차올라 있다. 효갈리에서 공덕천을 만나 조금 거슬러 올라갔다가 강안으로 내려왔다. 다시 이어지는 강변길이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길은 강안을 떠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효갈리 덕암산 산록이다. 다시 강안으로 내려와 직선의 길을 걸었다.
경천교
☆… 오후 5시가 넘어 경천교 동쪽 입구에 도착했다. 상풍교에서 경천교까지의 거리는 7.8km, 삼강주막을 기점으로 하여 여기 경천교 앞까지 25km를 걸어 내려온 것이다. 여기 경천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안(호반)의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가면 청룡사(→2.8km)가 있다. 여기서 옛날 ‘회상(횟골)나루터’라는 자연석 표지도 있다. ‘낙동강 풍경 트레일 노선도’에는 상주보 주위의 명소를 안내하고 있다. ‘상주국제승마장’, ‘상주박물관’, ‘경천대’, ‘상주보’, ‘상주자전거발물관’, ‘나각산’ 등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 놓았다. 요즘 상주댐 담수호를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명승과 전망대가 있어 국민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오후 들어 날씨가 흐려져서, 하늘의 태양은 보이지 않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경천교의 난간은 번쩍번쩍하는 스테인리스로 가드레일을 만들고 그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바이커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상주가 싸이클링의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이었다.
☆… 경천교 위에서 낙동강을 본다. 한 마디로 낙동강은 거대한 호수(湖水)였다. 여기에서 2km 아래에 상주보가 설치되어 있어 강안을 가득 채운 물은 호수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천교의 상·하류가 모두 거대한 담수호가 되었다. ‘경천호’라고 부른다. 고여 있는 물빛은 누런 빛깔이다. 저 아래, 호수 한 가운데 인공으로 만들어졌다는 ‘경천섬’이 보이고 섬과 강의 양안을 잇는 하얀 다리가 보였다. …
상주자전거박물관
☆… 경천교를 건너면, ‘국토 대종주 자전거길’이다. 서울의 한강에서 충주를 경유하여 문경 이화령을 넘어와 부산의 하구둑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길이다. 그리고 이곳이 경천교를 건너온 안동댐에서 출발한 ‘낙동강종주 자전거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다리 앞에 조형미가 독특한 ‘상주자전거박물관’이 있다. 사실 4대강 사업을 통하여 한강과 낙동강 등 전국의 하천에 바이크로드가 만들어지고, '자전거 타기가 국민스포츠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상주보는 위치상 자전거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다시 말하면, 상주는, 서울의 한강 바이크로드에서 부산 하구둑까지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중심지이고, 안동댐에서 부산 하구둑까지의 ‘낙동강종주 자전거길’이 합류하는 곳이다.
‘상주자전거박물관’
여기 경천교 앞에 국내 유일의 ‘상주자전거박물관’이 있다. ‘상주자전거박물관’은 2002년 상주 남장동에 최초로 건립되었다가, 2010년 10월 27일 이곳 도남동에 확장, 이전하였다. 세계 최초의 나무자전거 ‘드라이지네’를 비롯하여 60여 대의 희귀 자전거를 전시하고 하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이 무료 자전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여 대의 자전거도 준비되어 있다.
경천대(敬天臺), 그리고 낙동강 강안의 풍경
상주시 도남동, 낙동강의 서안의 경천교에서 북쪽으로 강을 따라 올라가면, 낙동강 호반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경천대(敬天臺)’가 있다. ‘경천대’는 깎아지른 절벽과 노송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거기 전망대에 올라서면 낙동강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처음에는 ‘이곳으로 하늘이 스스로 내렸다’고 하여 ‘자천대(自天臺)’라고 하였으나, '하늘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경천대(敬天臺)’라 부르게 되었다. 경천대국민관광단지에는 전망대, 어린이놀이시설,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낙동강 둘레길로 연결되어 있다.
☆… 시간이 없어 경천대는 가지 못했다. 도남동 경천교에 앞에서 ‘국토종주 자전거길’을 따라 도남서원까지 1.8km인데, 거기 낙동강 호반에는 각종 편의시설, 조형물, 캐핑장 등 강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오른쪽에 ‘국립낙동강생물지원관’이 있다. 경천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야외무대가 있는 광장과 주차장이 있다. 그리고 주차장의 길 건너편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있다.
[상주] 낙동강 상주보, 경천섬 그리고 도남서원
☆… 낙동강 경천호(敬天湖) 앞에 도착하여 먼저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찾았다. 서원의 앞문[外三門]은 잠겨 있어 옆으로 난 작은 문[詠歸門(영귀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다. 인적이 전혀 없는 경내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영귀문(詠歸門)
* [도남서원(道南書院)] ― 영남 사림(士林)의 자부심으로 건립한 낙동강 서원
☆… 상주(尙州)는 낙동강 상류의 퇴계의 안동[陶山書院]에 이어 유학의 도(道)가 살아 있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 남쪽으로, 대구 금호강 상류의 영천은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출신지이고, 구미(선산)에는 영남 사림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채미정(採薇亭)-금오서원(金烏書院)이 있고, 대구 아래로 내려가면 달성에 한원당 김굉필(金宏弼)의 도동서원이 있으며, 경주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양동마을과 옥산서원(玉山西院)이 있다. ‘경상도’라는 지역의 이름이 말해 주듯이, 상주(尙州)는 신라시대부터 경주(慶州, 서라벌)에 버금가는 정치, 경제,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역적으로 영남 사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 여기 낙동강 경천호를 마주하고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에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비롯하여,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 이준 등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도남(道南)’이라는 이름은, 북송 때의 정자(程子)가 애제자 양시(楊時)가 고향으로 떠날 때, “우리의 도(道)가 장차 남방(南方)에서 행해지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남방은 주자(朱子)가 활약한 남송(南宋)을 말한다. ‘조선 유학의 전통은 바로 영남(嶺南)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서원(書院)이 탄생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한 지방의 유림이 '선현(先賢) 5위'를 모실 묘우(廟宇)를 세우기로 발의하고 통문을 내었으며, 5월에 옥성서당에 모여 서원 건립을 의결하였다.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 39) 지방 유림의 공의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오현(五賢)의 위패를 모셨다. 도남서원의 창건을 주도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도학(道學)의 전수가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되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에 의해 정학(正學)으로 연구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에서 집성되었다고 보았다.
그 뒤 1616년(광해군 8)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635년(인조 13)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7년(숙종 3) ‘道南書院’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매년 음력 2월, 8월에 제사를 지낸다.
도남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2002년부터 대규모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祠堂]인 도정사(道正祠), 동재인 손학재(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강당인 일관당(一貫堂), 누각인 정허루(靜虛樓)과 풍우단(風雩壇)·영귀문(詠歸門) 등이 있다. 특히 일관당의 전면에 세워져 있는 ‘정허루(靜虛樓)’에 올라 낙동강 경천호를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도남서원의 문루 [靜虛樓(정허루)]
¶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찾아온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가범(家範)》 등이 있다.
¶ 정여창(鄭汝昌, 1450년(세종 32)~1504년(연산군 10))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나이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부렴(賦斂,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것)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 학덕이 있는 사람을 문묘에 배향함)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경주 양동마을 외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그의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심적인 학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일강십목소〉는 그 정치사상을 대표한다. 김안로(金安老)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中宗)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1568년(선조 1)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569년(선조 2)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리고 경주 옥산서원 등 전국 17개 서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이언적수필 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경주 자옥산 아래에 있는 독락당(獨樂堂)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晦齋集)』에 실려 있다. 『이언적수필 고본일괄』은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 노수신(盧守愼, 1515~1590년) 조선의 도학자·문장가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茹峰). 부는 홍(鴻)이고 한양 남부 낙선방에서 태어났다.
김안국(金安國)과 이연경(李延慶)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도학에 관하여 서신을 교환하였다.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고,『대학장구 大學章句』와『동몽수지 童蒙須知』 를 주석하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관하여 기대승(奇大升)과 토론하였다.
1568년(선조1)에 직제학으로서 고향에 부모를 모시러 가려고 사직을 했으나, 이준경(李浚慶)의 진언으로 고향의 부모를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반혼(返魂)을 하지 말고 거려(居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예를 존중하고 선학(禪學)도 깊이 궁구하였다. 양명학을 따른 그의 사상은 1수가 전하는 시조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문장은 한유(韓逾)와 유종원(柳宗元)에 맞먹고, 정주(程朱)의 논리를 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는 두시(杜詩)처럼 애국우민(愛國憂民)의 정신이 들어 있는데『대동시선』에 21편이 전한다. 1543년(중종38) 식년시 문과에 장원을 하고, 전적(典籍) 수찬(修撰)을 거쳐 이듬해 사서(司書)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을사사화로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다시 진도(珍島)로 옮겼다. 유배 중에 진도 사람들에게 혼례(婚禮)를 가르쳐서 풍속을 순화시켰다. 1565년(명종20)에 귀양지를 괴산(槐山)으로 옮겼다.
명종이 승하하자 풀려나서, 1567년(선조1)에 교리,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으로 벼슬이 올라가더니, 1573년(선조6)에 우의정이 되고, 1578년(선조11)에 좌의정, 1585년(선조18)에 영의정이 되었다.
¶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아버지는 좌찬성 정여관(鄭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陜川李氏)로 이가(李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여 7세에 『사략(史略)』을 읽고 8세에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불과 절반도 배우기 전에 문리가 통하여 나머지 글은 스스로 해독하였다 한다.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백성의 신망이 높았다.
1610년 4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경세는 도학(道學)의 전수가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되어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에 의해 정학(正學)으로 연구되고 이황(李滉)에서 집성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고 오현(五賢)을 배향하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에 본원을 두고,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정경세의 저서『양정편(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소학』과 표리가 되고,『주문작해(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주서절요(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저서로는『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은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탁(李琢)이고, 아버지는 이수인(李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으로,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 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했으며, 그 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유성룡(柳成龍)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도남서원의 강당 ― 일관당(一貫堂)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靜虛樓(정허루)
* [경천섬] ― 상주보 건설로 만들어진 경천호 한 가운데의 인공섬
☆… 상주보가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경천섬은 원래 모래밭이었지만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섬이 됐다. 낙동강 상주보 주변 관광지는 호수처럼 펼쳐진 강과 그림 같은 산, 맑은 하늘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승지가 되었다.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에 속한 경천섬은 낙동강 가운데 있는 타원형 섬이다. 이곳은 약 20만㎡의 잔디밭에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걷기 코스로 좋다.
(아치형) 범월교→ [경천섬]→ 낙강교(주탑 2개의 현수교)
☆… 우선 경천섬과 낙동강변을 잇는 호반의 다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강의 서쪽인 도남동을 잇는 교량은 ‘범월교(泛月橋)’, 동쪽 중동면 회상리를 잇는 다리는 ‘낙강교(洛江橋)’이다. 올해, 2020년 1월 개통된 낙강교는 길이 345m에 높이 37m짜리 주탑 2개로 이뤄진 현수교이다. 보도 현수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길다. 범월교(泛月橋)의 범월(泛月)은 '달밤의 강에 배를 띄웠다'는 의미다. 고려 문신 이규보(李奎報)가 1196년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었다는 ‘낙강범주유(洛江泛舟遊)’에서 시작하여, 1862년까지 행사가 이어졌다. 경천섬 입구의 도남서원 앞에는 ‘낙강범월시 유래비’가 있다. 상주시는 매년 시 짓기 행사인 ‘낙강시제(洛江詩祭)’을 열고 있다.
낙강범월시 유래비
* [경천섬을 건너서 수상 탐방로] *
☆… 인적이 없는, 고즈넉한 도남서원을 한참동안 둘러보고 나오는데, 뜻밖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나의 중학교 1년 선배인 만촌 안휘덕 공이 부인 유미선 여사를 동반하고 있었다. (만촌은 나와 이상배 대장을 마중하기 위해 일부러 점촌에서 이곳까지 나온 것이다.) 반갑고 고마웠다. 만촌은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문경에 내려와 안착한 귀향인이다. 나는 그의 초대를 받아 만촌농원[댁]을 두어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만촌 내외는 심덕이 도탑고 인정이 많은 분들이다. 만촌은 이미 이곳 경천호를 와서 산책하고 간 적이 있다고 했다. 물 가운데 경천섬 두 개의 다리를 건너가면 나무테크 '수상 탐방로'가 시설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한 바퀴 돌아오는 탐방로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다리가 무겁지만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배낭을 맨 채, 만촌 내외분과 함께 탐방로 산책에 돌입했다.
☆… 경천섬을 경유하는 ‘탐방길’은 주변의 풍경과 함께 특별한 정취가 있다. 도남서원 주차장∼범월교∼경천섬∼낙강교∼수상탐방로∼상주보∼도남서원을 잇는 4.5km의 순환로이다. 경천호 수상탐방로는 낙강교 입구에서 경천호 동쪽의 강안을 따라 만든, 길이 975m의 물에 떠있는 다리이다. 발아래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호수 위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온 사방이 열린 공간이 가슴을 환하게 열어준다.
경천섬→ [낙강교]
수상탐방로
☆… 주차장에서 범월교를 건너 경천섬을 가로질러 현수교인 낙강교를 지났다. 이곳은 경천교 앞에 자연석에 표지석으로 안내한 '회상나루'이다. 맞은 편 산은 비봉산이요, 그 비봉산 아래 우아한 한옥으로 지어진 ‘낙동강문학관’이 있고 오른쪽 산록에 ‘청룡사’가 있다. 그리고 비봉산의 중턱에 경천호를 조망할 수 있는 ‘학 전망대’도 있다. 강안으로 내려오면 예의 경천호 수상로가 있다. 상주 삼백(三白)의 정서가 서린 경천섬과 상주보로 이어지는, 길이 975m, 폭 2m의 수상탐방로, 2019년 10월 완공된 부표식 수변 테크로드이다.
수상탐방로
☆… 경천호 강물 위의 수상탐방로에 진입하여 강안의 절벽과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강안의 절벽에 수목의 드리워져 있고 물속에 잠긴 나무 등걸이 속절없이 세월을 삼키고 있었다. 저녁 해가 한참 기울어 저 멀리 서산마루에 떠 있다. 아, 고요한 호수 위에 석양의 햇살이 내리어 수면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잔잔하게 빛나는 황홀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여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낙동깅 경천호의 환상적이 장관이었다. 하늘과 드넓은 호수 … 그리고 그 물 위의 탐방로에 서서 낙동강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 하루의 긴 여정의 피로를 씻어주는 아늑한 시간이었다.
낙동강의 석양(夕陽)
☆… 여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밤하늘에 두둥실 달이 뜨면 그 애틋하고 낭만적인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낙동강의 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가 낙동강의 「달밤」을 노래했다.
달 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 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달밤」은 1940년『文章』지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을 받은 작품이다. 낙동강 달밤의 호젓한 정취 속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 풍경이 떠오르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잔잔하게 살아오는 시정이다. 은은한 낙동강의 달빛으로 정화한 마음은 세상의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이 된다. 이러한 풍류는 이곳 상주의 시인 묵객들이 낙동강 물위에 배를 띄우고 유창한 달빛을 노래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도남서원 앞에 있는 ‘낙강범월시유래비(洛江泛月詩由來碑)’가 그 내력을 전한다.
* [낙동강 상주보(尙州洑)]
상주(尙州)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한다. 상주의 삼백(三白)은 쌀과 누에고치, 곶감을 말한다. 곶감이 흰색인 이유는 곱게 건조한 곶감의 하얀 분 때문에 삼백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상주에는 ‘삼백농업농촌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상주는 신라시대부터 경주(서라벌) 다음으로 융성한 곳(사벌국)이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물산이 풍부하고 학문이 번창하여 거대한 토호세력이 주석하고 있었다.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를 대표하는 지역 이름이다.
상주보(尙州洑) 원경(遠景)
☆… 상주는 낙동강 조운(漕運, 뱃길)의 중심기지이다. 부산이나 남도에 올라오는 세곡선이나 특산물은 상주 나루에서 내려, 육로로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의 화양나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안동 예천의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이나 봉화에서 내려오는 목재[뗏목]를 중계하는 나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동강이 상주에서 부산까지라고 규정하여 ‘낙동강 칠백리’라고 불러왔다.
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저 예향 안동-예천과 함께 유수한 사림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위국충성하고, 때가 되면 다시 낙향하여, 성현을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에 정진하고 또 지역의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열이 왕성한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인재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상주 낙동강 강안에 있는 도남서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고절한 영남의 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그것은 상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경천섬에서 상풍교까지 거대한 호수를 이루는 경천호는 상주보 건설로 만들어진 것이다. 낙동강 상주보(尙州洑)는 낙동강의 수위 관리와 농업용수 확보, 하천정비 등의 목적으로 설치된 보(洑)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2009년 10월에 착공하여 2011년 11월 16일에 완공되었다. 보의 길이는 335m(고정보 230m, 가동보 105m), 높이는 11m이며 총 공사비는 약 2,187억이 투입되었다.
상주보(尙州洑)
상주보(尙州洑)의 위치는 상주시 도남동과 중동면 사이에 있으며, 상주시 사벌국면, 공검면과 예천군 풍양면 일대의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상주보 좌측에는 3,000KW급의 소수력발전소와 친환경수변생태공원, 전망대가 있으며, 낙동강변을 따라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 일대는 낙동강 12경 중 제10경으로 경천대, 경천섬, 병성천 낙동강 합류점 등이 있어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
* [4대강 사업] ― 낙동강 현장에서 생각하다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부(2008.2.~2013.2.)가 추진했던 국책사업으로,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걸었던 서울부터 부산까지 내륙수운으로 잇는 '한반도 대운하'가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취소하고 4대강 정비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MB 정부는 당시 야당과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 정비 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추진해, 2013년 초에 완료하였다.
4대강 사업은 총사업비 22조 원을 들여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외에도 섬진강 및 지류에 보 16개와 댐 5개, 저수지 96개를 만들어 4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로 추진됐다. 그러나 야당은 예산 낭비와 부실공사 우려가 있다며 대대적인 반대에 나섰고, 정치적 논란은 계속됐다.
하지만 이 같은 반대에도 4대강 사업은 정부의 사업 추진 발표 후 두 달 만인 2009년 2월, '4대강 살리기 기획단'이 만들어지며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 마스터플랜이 확정되었으며, 7월부터 홍수 예방과 생태 복원을 내걸고 본격적인 착공에 돌입했다. 그리고 9월에 사업자가 선정된 이래 4대강 주변은 생활·여가·관광·문화·녹색성장 등이 어우러지는 다기능 복합공간으로 꾸민다는 계획 아래 사업이 진행되어 2013년 초 완료되었다. 그러나 한편,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는 2018년까지 총 4차례가 행해졌다.
MB정부의 토목사업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지금도 4대강 사업에 매우 적대적이며, 환경단체의 주장을 앞세워 만들어진 보(洑)를 철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문제제기는, 주로 시민단체와 학계의 4대강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환경공학적 비판, 환경보호 내지는 생명존중의 친생태적 입장에서, 특히 보(洑) 건설과 골재 채취 및 하상정비로 인한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규모 국책사업의 의사결정 과정의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환경보호, 생태주의에 입각하여, 4대강 사업의 인간중심의 개발정책을 비판하고 4대강이 생명의 강으로 부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 한편, 4대강 사업을 지지하며, 보(洑)를 철거하는 극단적인 정책에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현지 주민들이나 기업인들이다. 여름이면 가뭄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홍수가 나면 강이 범람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또 기업은 4대강 유역의 수많은 공장들이 보의 물로 공업용수를 넉넉하게 공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낙동강칠백리기념비 공원으로 가는 길에, 기사에게 보(洑)에 대한 현지의 분위기를 물었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보를 해체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자기도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보 건설로 인하여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환경단체가 상주보에 와서 ‘보를 철거하라’는 시위를 할 때 이곳 사람들이 현장에 나가 그 시위대를 몰아냈다는 이야기며, 심지어 버스를 대절하여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시위를 했다고 했다. 몇 년 전 혹독한 가뭄으로 충남의 예당저수지까지 바닥을 드러낼 때, 당시의 안희정 충남지사가 정부의 노선과는 달리 공주보의 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극복한 사례도 있다.
생명의 물
지금도 4대강 사업에 논란을 계속되고 있다. 이미 건설한 보(洑)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입장과 보를 해체하거니 물을 빼서 강을 생태적으로 살려야 한다는 환경주의적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는 환경단체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 나 또한, 생명의 젖줄인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낙동강을 비롯한 4대강 문제가 잠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강(江)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 강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수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물은 흘러야 한다. 강은 흘러야 살아나고 또 자연적인 흐름을 통해 자정능력을 유지한다. 흔히 하는 말,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흐르는 물을 가두는 것은 원론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경단체의 주장은 타당하다. 사실 황지에서 청량산에 내려오기까지의 ‘흐르는 강물’은 청정(淸淨) 그대로였다. 그러나 안동댐 이후 곳곳에 설치된 크고 작은 보로 인해 강물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는데, 물빛은 그리 맑지 않았다. 강안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홍수의 뒤끝이어서 그런지, 하상의 모래가 뒤섞여 그런지 강물은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탁한 물빛을 바라보는 마음은 펀치 않았다.
그러나 강물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자연물이다. 사람들은 강물을 마시고 목숨을 이어가고 그것을 이용하여 건강한 생활을 한다. 우리는 강물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을 그대로 방치하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심각한 식수난을 겪거나 농사를 망쳐버린다. 여름철 홍수가 나면 농작물은 물론 가옥이 침수되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통치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강물도 그냥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한다. 댐이나 보(洑)를 건설하여 가뭄에 대비하거나 폭우가 내릴 때는 홍수 조절 기능을 함으로써 강물을 인간 생활에 유익하게 활용한다. 동서고금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MB정부의 4대강 사업은 그런 뜻에서 긍정적이다. 문제는 그 사업을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떻게 추진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MB는 서울특별시장 재임시절 청계천 정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 당시 청계천 연변의 상인들이 상권의 망실을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이 시장은 그들의 생업과 상권을 보장하기 위해 대책(예, 문정동 가든 파이브)을 마련하면서, 그들을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기게 설득하여 성공적으로 청계천 사업을 완료했다. 지금 청계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심의 쉼터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다.
☆… 성공적인 청계천 정비 사업으로 탄력을 받은 MB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륙수운으로 잇는 '한반도 대운하'라는 사상 초유의 대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것은 한반도의 지형을 바꾸는 엄청난 문제이다. 특히 백두대간의 허리를 자르는, 국토를 훼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고도차가 다른 남한강과 낙동강의 물길을 잇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갑문을 건설하야 하는데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서 많은 농경지를 수용해야 하고 산하를 훼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하 건설을 위해서는 엄청난 공사비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운하의 건설을 통해서 물류(物流)나 관광 산업을 진흥하고, 경제적 효과를 기대한다고 하지만 국토를 훼손하고 거기에 투입되는 천문학적인 건설비를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한번 자연을 훼손하면 복원하기 어렵다. …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MB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최소했다.
MB는 그 대안으로 4대강 사업을 기획했다. ‘청계천 성공 신화’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일까. 거대한 국토 개발사업을 한꺼번에, 그것도 일사분란하게 밀고 나갔다. 임기 내에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하는데 지나치게 서두르고 졸속했다. MB정부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예비 타당성 조사’까지 면제(생략)하고 강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치밀한 환경영향 평가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의 폭 넓은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지 않았다. 결국 개발우선주의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4대강 사업은 MB 특유의 업적주의의 산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독선이 문제다. 더구나 국가의 기반 사업을 추진할 때 지나친 정치적인 야심은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 일 년 내내 풍부하게 물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댐(Dam)이나 보(洑)가 필요하다. 그러나 흐름을 멈추고 고여 있는 물은 탁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미 건설된 보를 해체한다는 것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적폐라고 규정한 정권의 사업을 말살하기 위해 폭파하여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졸속하게 건설만큼이나 무모한 독선이다. …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한 물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수문 관리나 수위 조절을 잘하여 가뭄이나 홍수에 대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해당 지자체는 지류 하천이나 강에 유입되는 오염원을 찾아내어 감시하고 정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지류가 맑으면 본류가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선은 금물이다. 편을 갈라 정치를 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 모아 생명의 강(江)을 살리고, 나아가 나라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삼강에서 상주보까지, 오늘의 낙동강 종주를 마치고] ― 점촌에서 유쾌한 만찬
☆… 오늘은 삼강주막에서 상주보까지 26km를 걷고, 그리고 만촌(晩村) 내외와 함께 경천섬-수상탐방로를 순환하는 4.5km를 걸었다. 총 30km를 걸은 것이다. … 어느덧 낙동강의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낙동강 상주보까지 마중 나온 만촌의 차량에 탐승하여 점촌으로 향했다. 퇴강리 낙동강칠백리공원을 지나고 이안천의 금곡교를 건너, 함창의 외곽을 경유하는 길이었다. 만촌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마을을 손으로 가리켜 알려주기도 했다.
상주 낙동강변에도 가을이 익고 있었다
문경시청 뒤에 있는 전문음식점에는 태백에서 낙동강 종주를 함께 시작한 기원섭 내외와 김옥련 여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촌 내외와 이상배 대장을 비롯한 6명의 대원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따끈하고 담백한 샤브샤브 정식으로 식사를 했다. 뜻을 같이 하는 지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정 어린 정담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김옥련 여사가 흔쾌히 저녁을 샀다. 우리의 낙동강 종주를 성원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 식사를 마치고 나자, 만촌이 나와 이 대장에게 영순 만촌농원(집)으로 가자고 했다. 난방이 잘된, 뜨끈뜨끈한 사랑방이 피로를 풀기에는 아주 좋다고 했다. 지극한 정성이다. 고맙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대장이, 내일 이른 아침 출행(出行)을 위해서 점촌에서 자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고마운 마음만 받았다. 정성을 모아 따뜻하게 격려해준 동지(同志)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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