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
박민혁 너무 취했었나 봐 다음 말은 듣지 못했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말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대진 운이 좋아 이 삶을 거저 얻어낸 듯 내 안에는 진심이 없다 아무 날씨도 없는 날 더러운 잿빛 슬픔들이 모여 뒤뚱뒤뚱 주저앉은 허공을 쪼고 그것들이 더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이제 두려움은 나의 몫 내 낡은 기억 하나와 굴욕을 주고 사 온 눈부시고 쓸모없는 지혜는 좀처럼 잘 붙지 않고 거기에는 어떠한 인과도 없으나 나는 오랜 시간 한 우울만 팠다 그러나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게 달려오던 슬픔이 발을 헛디뎌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던 그런 순간을 어렵지 않게 목도해 온 탓 때로 낯선 신사가 묵직한 저음으로 불러 돌아보면 그는 그저 자기 갈 길을 갈 뿐이고 그건 사실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왜소한 신을 보다 못한 이의 사소한 선의였다는 것 길을 잃은 건 신이 아닌 낯선 이의 매혹을 내내 따라갔기 때문 매일 아침 눈 떠 보면 관 속인 것을 알게 되고 죽어야 할 것만 같아서 다시 눈을 감는다 세계는 불쑥 내뱉는 신의 혼잣말 같아서 이토록 맥락이 없는 것 —계간 《시와함께》 2024 겨울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