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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월 이달의 작품-[산문/수필] 강순덕 '어떤 물음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
심사위원회추천 0조회 9019.06.29 22:52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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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문학의봄 5월, 이달의작품 수상 수필> 어떤 물음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 / 강순덕 스무 살이 되던 해, 내 삶의 나침반이 사라졌다. 어린 날부터 오롯이 꿈을 향해 이끌고 가던 북극성은 사위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나는 쓰디쓴 실패의 잔을 마시고, 하릴없이 내 고향 성산포로 내려갔다. 밤이면 헛잠을 뒤척이고 낮에는 진종일 겨울바다를 서성거렸다. 파도에 휩쓸려 망망대해로 흘러가는 꿈의 조각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일출봉에 떠오르는 햇귀도 찬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를 헤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선화 한 송이를 만났다. 휘몰아치는 겨울바닷가에 작고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었다. 황량한 겨울 바다에 어떻게 피었을까. 왠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수선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거센 바람 앞에서 꺾이지 않고 핀 여린 꽃잎 앞에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였다. 수선화는 내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실패했으면 어때? 지금까지 꿈꿔온 것처럼 다시 꿈을 꾸면 되잖아.’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듯 웃고 있는 수선화 곁에 한참을 앉아 꽃의 말을 들었다. 수선화는 내 말을 들어주고, 바람은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속에 들어앉아 내 실패를 비웃고, 내 신념을 짓밟던 것들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유채꽃이 피는 봄에 모든 것을 푸른 바다에 쏟아버리고,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왔다. 빨리 가는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날 앉았던 비탈길의 풍경이 한동안 나를 지탱해 주었다. 힘들 때마다 빨리 갔으면 보지 못했을 겨울바다의 수선화를 떠올렸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푸릇푸릇한 보리밭이 있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푸르른 바람과 한 줌의 햇살을 가슴 속에 들여놓고 제자리로 돌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해,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참 뜨겁게 보냈다. 때마침 인천에서 작은 아버지가 불러주셨다. 부모님께 기대지 않고 자리 잡을 때까지 힘이 되어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문학도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취업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벌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위해 인천에서 회기역으로, 학원 수강을 마치고 다시 인천으로……. 나의 발길은 쉬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몇 개월간 집중하여 공부한 결과 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에 발령을 받았다. 첫 근무지인 구청에는 30여 명의 여직원들 모임인 두루미회가 있었다. 두루미회의 회장은 개성이 뚜렷하고 할 말 다 하는 똑 부러진 성격의 홍 언니였다. 어느 날 홍 언니는 여직원들의 소식지를 만들어보자며 의향을 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글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소식지를 만드는 과정은 정말 근사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가 없을 때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쓰고 그려야 했다. 그러나 모든 작업에 기꺼운 마음으로 활동했다. B4 사이즈의 복사 용지를 절반으로 두 면을 만든 12면에 여직원들이 보내온 시와 수필, 편지, 생일이나 결혼 소식 등을 손 글씨와 그림으로 채워 나갔다. 원고를 모으고 교정하는 작업은 홍 언니와 내가하고 두 명의 여직원이 원고를 옮겨 썼다. 홍 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즐거웠다. 사회 초년생이라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던 나는 홍 언니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정계, 재계, 사회문제, 연예인들의 뒷이야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말솜씨가 좋아서 들을수록 재미있었고, 의문에는 명쾌하게 답을 해주었다. 직장에서 처음 부딪히는 고민들도 털어놓으면, 질문 하나를 던져 스스로 답을 찾게도 했다. 시절은 한창 민주화 운동으로 인천에도 최루탄 가스가 연일 눈을 아프게 하던 때였다. 당시 인천에서는 인하대와 인천대 학생들이 시위의 주역이었다. 인천대는 제물포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있어 그 현장을 지나치게 될 때가 많았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며 코를 막고 집으로 가야 했다. ‘공부하라고 대학에 보냈더니 데모질이나 하고 있네. 누구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대학인데, 부모 등골 휘게 마련해준 등록금으로 저리 허송세월을 보내다니…….’ 티브이 뉴스에서 전해 주는 대로 듣는 게 전부였던 그때, 나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학생들이 강의실에 있지 않고 학교 밖에서 전경들과 싸우는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지한 내 눈에는 그저 공부하기 싫은 철부지들일 뿐이었다. “언니. 대학생 애들은 공부하기 싫어서 매일 데모나 하는가 봐요.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애들한테, 학비 보내는 부모님께 미안하지도 않나 봐요. 정말 이기적인 애들이에요.” 어느 날 두루미에 실을 작품들을 교정하다가 문득 터진 말이었다. 늘 얼굴에서 웃음을 잃지 않던 성격 좋은 홍 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짐작도 못 한 채 교정하던 작품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홍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 “강 양, 강 양이 대학에 못 간 이유 내가 알잖아. 대학 가서 책 읽고 글 쓰고 언젠가는 좋은 책도 쓰고 싶었을 텐데. 지금 공부하지 못해서 얼마나 속상한지 알아. 공부하고 싶으면 야간대학이나 방송대라도 가. 근데 자신의 열등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건 글 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야. 무엇을 볼 때는 거죽만 볼 게 아니라 왜 그런 건지 속을 들여다봐야지. 보이는 대로 믿고 보이는 대로 쓰는 건 글이 아니야. 그렇게 비판 없이 쓰는 건 문학도 아니야. 앞이 아닌 뒤, 가려진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홍 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갑작스레 전개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지, 내가 무슨 판단을 잘 못 한 건지, 나의 열등감이 세상을 왜 잘못 보게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꾹 다문 언니의 침묵 앞에 더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아야 했다. 퇴근길에 인천대 앞에서 또 다시 학생들과 전경의 대치 장면을 맞닥뜨렸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매캐한 최루탄 속에서 무언가를 외치며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의 외침을 귀담아 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호헌철폐’, 그들의 이마에 쓰인 ‘독재타도’, 길가에 뒹구는 유인물에서 투쟁의 이유를 하나씩 알아갔다. 나는 그동안 보이는 것만 보았고, 알려주는 것만 들었다. 보이는 대로 알려주는 대로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내 안의 욕구에만 몸서리를 쳤는데, 그들은 그들의 욕구가 아닌 이웃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울부짖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이기주의자가 아니었다. 진짜 이기주의자는 그들 뒤에 숨어 있던 나였다. 현실에 안주하고 장벽 너머 보류했던 꿈을 비로소 꺼냈다. 잠자는 영혼을 깨워준 홍 언니의 말을 곱씹으면서 내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았다. 이후로 나는 방송대에서 꿈꾸던 국문학과를 전공했으나, 3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 포기했다. 마침 바쁜 부서로 이동을 하면서 공부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망을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 새로운 마음으로 일본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 크나큰 아픔을 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 침략을 당했고, 어떻게 광복을 맞이했는지 짚어내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회피하고 잊으려고만 하는 일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문학이 단지 펜을 드는 것만이 아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형성하게 된 근거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단순한 이웃의 나라가 아니다.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가장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공부한 것들이 직장에서 삶에서 두고두고 쓰임이 되었다. 흔히 직장에 다니면서 4년 동안 방송대를 졸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중도 포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할 때도 있었고, 어찌해보지 못할 시련도 있었다. 일과 육아와 가사에 공부를 더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배움이었기에 이번은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공부했다. 주위에서는 그런 나를 한마디로 지독하다고 평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마지막까지 휴학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던 건 홍 언니의 진심이 담긴 물음 덕분이었다. 홍 언니는 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불평을 들으면서 나의 잘못된 시선을 잡아주었다. 늘 큰 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홍 언니는 그날만큼은 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들이 교실이 아닌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아프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얻었다. 홍 언니의 물음 이전까지 나는 글 쓰는 사람의 자세와 문학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한 적이 없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것처럼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로 나는 글을 쓰면서 왜 써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먼저 나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이 문학이고 삶의 자세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물음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 아니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날 홍 언니의 물음이 없었다면 나는 내 안의 열등감을 애써 외면하면서 살았을 거다. 나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타인을 향한 불평과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문제를 돌려놓으려 했을 거다. 그날 수선화가 차가운 바람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것을 보면서 나의 길을 찾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이유가 있듯이 꽃 한 송이도 허투루 피지 않는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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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수필이네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