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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월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묘향
3. 금헌 유방택의 생애와 업적
국보 제 228호이자 세계천문학계의 보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만든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은 서령유씨 7세손이며, 1320년에 출생하여 1402년(조선 태종2년)까지 장수(長壽)한 천문학자로써 경서와 주역은 물론 성리학까지 통달하였으며 벼슬이 밀직부사(정상품 당상관)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현 기상청장)에 이르렀으나 모든 벼슬을 고사(固辭)하고 학문과 천문탐구에 몰두한 인물이다.
충청남도 서산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서산에는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이 세워졌고 해마다 ‘류방택 별축제’가 열리고 있다.
※ 금헌 유방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ryubangtaek.org)
※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http://www.ryubangtaek.or.kr)
[고려시대의 행적]
※ 성씨를 ‘류’ 또는 ‘유’로 발음하는데 편의상 ‘유’로 기록한다.
유방택은 서령(瑞寧)유씨의 득관시조인 서령부원군 유성간(柳成澗)의 7세손으로, 자(字)는 태보(兌甫)요, 호(號)는 금헌(琴軒)이다.
서산지역에 있는 가야산 개심사 아래 양리촌(陽里村)에서 출생한 선생은 천성이 어질고 인자하며, 용모는 온화하고 순량하며, 효도와 우애가 모두 지극하였다. 말소리는 크지 않게 하고 과거보는 학문을 섬기지 않고 어릴 때부터 뜻을 경학에 두어 장성하므로 낙구의 이치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명성을 감추고 은거하여 묵묵히 학문만을 탐구하였는데 별사 한 채 를 지어 당호를 ‘금헌’이라 하니 금은 그 뜻이 禁이라, 禁은 그 사심을 금한다 하고, 또한 낙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학자는 먼저 금을 배워 그 사악하고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그 앙금을 다 녹여 더부룩한 심정을 산제한 연후라야 정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묵묵히 거문고의 이 【8】
치를 강구하여 그 당호를 걸었음은 그가 출세의 뜻이 없음을 엿볼 수 있다. 1361년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자 강화가 크게 어지러워지므로 국력을 편성할 수 없어 그가 사적으로 만든 역서를 올리니 강화병마사에서 그 역을 써서 행하매 나중에 국력과 대조한 즉 일호의 착오도 없었으므로 그때부터 그의 명성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매한 학문과 도덕이 지고함에도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므로 서주(지금의 서산)에 내려가 살았는데 1362년 유일로 천거되어(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초야에 숨어있는 이에게 특별히 벼슬을 주는데 뽑히어) 검교중추원부사겸 판서운관사(지금의 기상청장에 해당)에 이르렀고 선기지운과 낙구지리에 무불정통하였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이 ‘동방의 유일한 기자’라고 칭송했다. 잠시 치사하다가 귀가하여 향시인 ‘감군은곡(感君恩曲)’을 거문고로 연주하면서 천문(天文) 탐구에 몰두하였다.
[조선시대의 행적]
고려가 망하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니 금헌은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품고 서산의 도비산(桃肥山)에 숨어 종적을 감추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는 받았지만 아직 국왕으로서 책봉되지 못한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지내던 어느 날 한 노인으로부터 고구려 천문도 탁본을 받았다. 고구려시대에는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천문관측 기술이 전래되고 있어서 천문학이 대단히 발달하였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당시 평양에 세운 고구려천문도 비석이 있었는데 전란을 겪는 동안에 대동강에 빠뜨려져 사라졌고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탁본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태조는 이 천문도탁본을 수명개제[受命改制]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수명개제란 하늘의 명을 받아 제도를 개혁한다는 뜻으로, 역성혁명으로 이룩한 왕권이 하늘의 뜻임을 알리는 것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하늘은 바로 인간 세상을 반영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임금은 하늘의 뜻(天命)을 받아 그것을 지상에서 실현해야 하는 수명자(受命者)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천문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고 새로 왕조를 개창한 태조가 먼저 천문도 만들기에 정성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고 싶으므로 태조는 서운관에 명하여 천문도를 돌에 새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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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에서는 돌에 새기려다 보니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별자리가 이동하였으므로 시간측정의 기준이 되는 중성(中星 : 28수 중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 혼중성과 효중성을 말함)이 운행하는 도수를 벗어나고 24절후가 혼미하므로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태조가 근심을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유 금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천거하므로 여러 번이나 부르게 되었다.
금헌이 몇 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다가 문득 사리를 깨닫고 이르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시고 남달리 앞서서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남보다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게 하심은 예전과 지금의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바른 도리이거늘 우리나라의 기자께서는 번듯한 은나라의 자손으로서 스스로 홍범을 무왕에게 진술하였으니 어찌 백성을 위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이제 이 하늘의 경계를 내가 어찌 무심하게 모르는 체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도읍을 향하여 길을 떠나니,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태조 이성계는 기쁜 나머지 충남 예산까지 영접을 나가서 도중에 서로 만난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예산에 있는 연봉장(輦逢場)이며, 태조가 탄 연(輦; 임금이 타는 큰 가마)과 금헌이 서로 만난 장소란 뜻에서 연봉장이란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금헌을 영접하는 의식이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금헌은 고려조의 신하로서 이조에서는 벼슬을 한 바 없기 때문에 태조의 신하가 아니므로 당연히 빈주지례(賓主之禮)로서 의식이 베풀어져야 할 것을 군신지례(君臣之禮)로 맞이하였으므로 태조가 금헌에게 실례(失禮)를 범했다하여 지금의 예산에 있는 신례원이라는 지명이 그 당시는 실례원(失禮院)이었다. 한 나라 임금의 실수를 영원히 상징하는 지명은 불가하다 하여 후에 새신(新)자 신례원(新禮院)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금헌이 별자리의 운행을 깊이 관찰하고 이를 새로이 밝혀내니 과연 그 도수가 화합하였으며 고구려 당시 평양의 하늘을 지났던 중성기가 한양의 중성기로 바뀌었으니 마침내 ‘조선의 하늘’이 천문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개수가 끝나자 당시 성균관 대사성 권근(權近)은 천문도 탁본의 유래, 중성기의 개수, 관상수시의 중요성, 조선왕조의 개창과 경천근민의 실천 등이 담긴 천문도지(天文圖誌)를 짓고, 명필가 설경수(偰慶壽; 홍건적의 난을 피해 원나라에서 귀화한 위구르 사람 설손(偰遜)의 아들)가 글씨를 썼으니, 정히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 夏의 우왕때 낙수에서 태어난 神龜의 등에 나타난 九章의 글귀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를 베풀어 무왕(주나라 초대임 【10】
금)을 가르침과 때가 서로 같으며 일이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금헌은 동방의 유일한 천문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로 인해 태조가 기뻐하며 개국일등공신 녹봉(錄奉)과 서령군(瑞寧君), 한성윤(漢城尹, 현 서울시장)을 제수하자 일체(一切) 고사하고 개성(松都의 훗날 이름. 지금의 김포)의 취령산에 자취를 감춘 뒤 산정에 단(壇)을 쌓고 날마다 고려의 도읍지 송도를 내려다보며 망국의 슬픔을 달래면서 눈물을 흘리니 그때 나이 75세였다.
그 후 1399(정조1)에 선조인 유차달(고려개국공신, 유방택은 그의 16세손이 됨)이 창건한 충청남도 공주의 동학사에 아들 유백유, 유백순과 함께 들어가서 고려의 왕과 그의 친구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목은 이색(李穡)을 초혼(招魂)하여 제사를 지내고 동학사 중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개성에 돌아와 옛 임금의 한을 달래며 일생을 마치니 그때 나이 83세였다.
태종 4년에 정숙공(靜肅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1621년(광해군 13)에 공주의 동학사 삼은각에 삼은과 함께 배향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도 배향되었는데, 훗날 두 아들과 증손자가 함께 배향되었다.
그는 죽기 전 두 아들을 불러서 유언을 남겼는데, ‘무덤에 봉분을 짓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나는 고려의 사람으로 태어나 개성에서 죽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후 너희들은 새 임금을 섬기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슬하에 3남을 두었으니 백유, 백종, 백순이며 모두 학문이 뛰어났다. 특히 백유와 백순이 뛰어나 당시에 ‘유씨 집안의 쌍옥’이라고 불렸다.
4. 금헌 유방택의 사상
금헌 유방택의 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낸다면 ‘불사이군의 충정’과 ‘효’이다. 그의 행적에서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 이외에도 죽기 전의 유언에서 “나는 고려인으로 태어나 개성에서 죽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러니 내 묘에 봉분을 짓지 말고 일체의 석물을 세우지 마라.”고 말 한데서도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는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게 하였으나 서산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곳곳에 남겨진 그의 자취와 여러 곳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오히려 그의 숨은 절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유방택은 집안에 별채를 지어 거기 ‘금헌’(琴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금(琴)은 거문고를 가리키는데, 금(禁)과 같은 발음을 고른 것으로, 사특한 마음을 금한다는 뜻이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음악을 통해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 【11】
내고 순수한 마음을 길러야만 공부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유방택의 일생에 대해서는 고려 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그의 일생을 요약해 써놓은 것이 정이오의 문집 ‘교은집(郊隱集)’에 남아 있다. 이 ‘류방택 행장(行狀)’은 1411년에 쓴 글인 것으로 보아 유방택이 죽은 9년 뒤 쓴 것이다. 정이오는 유방택의 큰아들 유백유(柳伯濡)가 공민왕(1369) 18년 장원급제 한 5년 뒤인 1374년에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보아 유백유 또는 셋째아들인 유백순의 친구인 것으로 생각된다. 유백순은 1371년과 137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공로로 태조 이성계가 유방택에게 개국 1등 공신 녹권(錄券)을 내렸으나 굳게 이를 사양하였고, 또한 서령군과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제수했으나 역시 고사하고 송도 취령산 밑의 김포고을에 자취를 감추었을 때 유방택의 나이는 73세였고, 거기에 집을 짓고 그 위에 단을 만들어 날마다 옛 서울을 향하고 눈물을 흘리며 절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한탄하여 읊은 술회시(述懷時)에 “徠松酷受霜前幹하고 淇竹偏憐雪後枝(소나무를 위로하며 심히 사랑함은 서리 앞에 나무가 추울까 걱정되기 때문이요, 기죽(淇竹)을 한마음으로 가련타 사모함은 눈 쌓인 가지가 늘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중국의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은 산과 물의 예를 들어 자신의 송죽(松竹)같은 절개를 노래한 것이다. 그의 시 끝은 ‘평생 전조(前朝)를 잊지 못하고 사모하며, 거문고 뜯어 내 마음을 부쳐보노라!(平生耿耿前朝意 彈一雅絃奇所思)’로 끝난다. ‘고려에 대한 그의 정절(貞節)이 이 정도로 극진했다’고 정이오는 쓰고 있으며, 당시 사림들은 그가 학문이 하늘을 꿰뚫고 절개가 서릿발같이 늠름하다고 평했다.
그는 예조판서 손애(孫埃)의 큰 딸과 결혼,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셋(伯濡, 伯淙, 伯淳) 가운데 첫 아들 유백유(柳伯濡)와 삼남 유백순은 정몽주와 이색의 제자로서 유백유가 공민왕 18(1369)년 장원급제한 후 계속 함께 목은 이색을 지지하여 급격한 전제 개혁에는 반대했다.
이들 형제의 이야기는 정이오의 류방택 행장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사’에도 뚜렷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 전제의 개혁은 당시 가장 큰 사회경제 혁명의 표현으로 바로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추진한 것이었고, 그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들 형제는 광주(光州)로 유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시작된 다음에는 계속해 새 왕조에 출사하여 유백유는 태종 때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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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형제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등극함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갔으며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이나 손자들 또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갔으며, 유언으로 벼슬을 하지 말라고 하여 그 후로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이는 훗날 사화와 당쟁으로 인하여 죽고 죽이는 비극을 피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됨으로 앞날을 예견한 훌륭한 유언이라고 (19세 후손 유병주는)생각한다) 금헌의 불사이군의 정신이 후손에게도 이어져서 세조가 등극한 후에 각 파의 후손들이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의 연마에만 열과 성을 다하였으므로 서령유씨의 정신적 유산이 무엇인지를 능히 가늠할 수 있는바, 한없이 너그럽되 불의에는 조금도 굽힐 줄 모르는 관용과 절의 바로 그것이다.
유방택은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그의 선조가 창건한 공주(公州)의 동학사(東學寺)를 극진히 여겨 가꾸고 중건하였는데, 삼은각(三隱閣)은 그의 고려에 대한 충정의 마음을 후세에 전한다.
삼은(三隱)이란 바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로 은(隱)자 호를 가진 세 명의 고려 충신을 말한다. 유방택이 삼은각에서 고려의 옛 왕들과 그의 친구인 정몽주, 이색을 제사하였고, 그의 두 아들이 친구인 길재를 제사하였으며, 김시습이 유방택을 제사하였으므로 유방택은 삼은과 함께 금은(琴隱)으로 불리며 삼은각에 함께 배향되었다.
5. 금헌 유방택과의 관련 인물들
1. 장남 저정(樗亭)유백유(柳伯濡) <고려조~조선조>이조판서, 집현전대제학.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춘추관수찬으로서 박실(朴實)ㆍ김도(金濤) 등과 더불어 명나라 과거에 참여하였으며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정몽주, 이색, 권근 등이 그의 스승이며 길재와는 친구지간이었다.
2. 3남 유백순(柳伯淳) <고려조~조선조>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홍문관직제학. 성품이 올곧고 경사에 밝았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있을 때는 많은 후학을 길러내었고, 좌사간대부로 있을 때는 강직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정몽주, 이색, 권근 등이 그의 스승이며 길재와는 친구지간이었다.
3. 유윤(柳潤, ?~1476) 서령유씨 10세손. 호 무동처사(楙洞處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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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유의 손자이며 유방택의 증손. 문장에 능하였고 불과 14세에 진사가 될 정도로 뛰어났다. 단종이 폐위되자 세상일을 버리고 청주 무동(그곳에 무과나무가 매우 많았으므로)에 은거하여 학업과 후학양성에만 힘썼으며 특히 도학연마에 진력하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정세에 밝으므로 세조(世祖)가 여러 번 벼슬을 마련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임금이 직접 ‘무동처사(楙洞處士)’라 쓴 어필을 하사하여 불렀으나(‘무동처사(楙洞處士)’는 그의 호가 되었다) 끝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1476년(성종 7)에 자손들에게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는 유훈을 하여 후손들이 모두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4. 유사종(柳嗣宗) 서령유씨 10세손. 호 도산처사(桃山處士)
유백순의 손자이며 유방택의 증손. 세종대에 문과급제, 대사간, 호조참판. 단종이 폐위되자 세상일을 버리고 그의 육촌형인 무동처사와 함께 시골로 들어가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유교의 가풍을 크게 떨쳤다. 세조조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5. 유방선(柳方善) 1388년(우왕 14)∼1443년(세종 25). 서령유씨 10세손.
조선 초기의 학자. 호는 태재(泰齋).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리어 하루에 천언씩 외운다고 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유배됨을 시작으로 19년간이나 반복되었고 세종9년 풀려나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 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이보흠(李甫欽), 서거정(徐居正), 한명회(韓明澮), 권람(權覽), 강효문(康孝文)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고 정몽주(鄭夢周), 권근, 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모든 학문에 능하였으나 특히 시학에 뛰어났고 만년에는 역학에 전념하였다.
6. 유윤겸(柳允謙) 서령유씨 11세손, 유방선의 아들. 대사간(大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참의(戶曹參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아버지에게서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이에 정통했으며 세종의 부름으로 두시 찬주(杜詩撰註)에 참여. 성종 때 젊은 문신(文臣)들에게 두시(杜詩)를 가르쳤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조위(曺偉) 등과 함께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25권을 완성, 강희안(姜希顔)의 필체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 국문학사상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성종13년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 【14】
愼), 허종(許琮), 어세겸(魚世謙), 유순(柳洵)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다.
7. 유사(柳泗) 호 설강(雪江). 중종대. 3司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등과 교류, 당대의 대학자로 추앙됨.
8. 2012년 현재 공부중인 유병주, 유병석 형제는 서령유씨 26세손이며 금헌 어르신의 19세 후손이 된다.
* 서령유(柳)씨 ‘일문오현(一門五賢)’의 영광
충남 서산에는 두 곳의 서원이 있는데,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아홉 분과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두 분으로, 합하여 열한 분이 모셔져있다.
송곡서원에는 유방택과 그의 두 아들인 유백유와 유백순, 증손인 유윤(潤)이 함께 배향되고, 성암서원에는 유숙(淑)이 배향되었으므로 이를 두고 ‘서령유(柳)씨 일문오현(一門五賢)의 영광’이라 한다.
* 서령유씨 문중의 인물
유숙(1316-1368) : 1등공신. 대군시절의 공민왕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머물렀었다. 1363년 홍건적의 난, 같은 해 김용(金鏞)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움. 공민왕의 묘정과 서산시 성암서원에 배향.
류경(柳璥) : 고려 고종 때 대사성. 최씨의 무단정치를 종식시키고 정권을 왕실에 반환. 문자에 뛰어나 신종, 회종, 강종, 고종등 4대실록 편찬에 참여. 이존비(李尊庇), 안향(安珦) 등 많은 학자가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유성원(柳誠源) (문화(文化)유씨, 사육신)
* 타 문중의 인물
유응부(兪應孚) (기계(杞溪, 혹은 川寧유씨, 별운검, 사육신)
서애 유성룡(풍산(豊山)유씨. 호 서애(西厓). 의성 출생.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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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고흥(高興)유씨. 1902∼1920. 독립운동가 .3.1운동)
유자광(영광(靈光)유씨(*진주유씨로부터 분파하였다고 하는데 확인필요함))
첫댓글 참 유익한 자료입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서애 류성룡 안동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풍산 유씨 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유방택님의 자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