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취향 (34) 라면
내 맘대로 고른 라면 맛집 best 4
글 : 최선희 객원기자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어느 날,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선배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마음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냉가슴만 앓다가 이대로 끝내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한 병 사 들고 친구의 자취방을 찾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말에 친구는 조용히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방에 얼큰한 라면 냄새가 퍼지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고 순식간에 라면 한 냄비를 비웠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단언컨대 그날의 라면은 지금도 ‘인생 최고의 라면’으로 남아 있다. 짝사랑했던 선배의 얼굴은 희미해진 지 오래지만, 그 뜨끈한 국물에 막혔던 속이 뻥 뚫리며 머릿속이 맑아지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특별한 재료 하나 없었던 그 평범한 라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궁금했는데, 김훈의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 답을 찾았다. 그는 책에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고 썼다.
그의 말대로 맛은 확실히 ‘정서적 현상’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생각할 때 함께했던 사람들, 그날의 감정이나 분위기가 먼저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이다. 내 기억에 단단히 각인된 그 라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날 내 아픔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라면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나는 라면을 먹고 나면 신기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저 포만감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분비가 촉진된다고 한다. 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이 증가하고, 이것이 긴장 완화에 관여하는 물질인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줘 기분이 좋아진다. 매운맛을 내는 고춧가루의 캡사이신은 감각 자극을 활성화해 체온을 올려주고 땀이 나게 한다. 그래서 얼큰한 국물을 먹으면 ‘시원하다’고 느끼게 된다. 라면은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면과 분말수프, 이 단순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마성의 맛은 종종 중독으로도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라면을 끊은 지 한 달이 되어가면서 이번 주 내내 금단 현상에 시달렸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으니 금주, 금연을 할 때의 괴로움은 알지 못하지만, 라면을 참아야 하는 고통도 수위가 꽤 높다. 결국 이번에도 실패, 오늘은 그냥 라면을 먹어야겠다. 정신 건강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48년간 이어온 ‘해장라면’ 맛집
신촌 훼드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5길 32
신촌 현대백화점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훼드라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지켜온 라면 노포다. 서울시가 뽑은 ‘오래 가게’에도 선정됐다. 1972년 개업 당시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2010년 주인이 한 번 바뀌어 2대 사장님이 운영 중이다. 술집이지만 라면으로 더 유명한 이곳의 대표 메뉴는 콩나물과 청양고추, 바지락이 들어간 ‘해장라면’.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루탄 해장라면’도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아지트처럼 애용한 곳이기도 하고, 최루탄이 터졌을 때처럼 눈물·콧물 다 뺄 만큼 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서른 시간 우려낸 특제 육수, 가슴이 시원해지는 맛
꼴통라면
부산 부산진구 가야대로784번길 41
벽면에 붙은 “육수에 대한 꼴통 같은 고집으로, 국내산 소뼈와 사골로 30시간 끓여낸, 맛과 건강을 잡은 한국형 수제라면집”이라는 문구에서 보듯, 꼴통라면은 육수에 쏟는 정성이 대단하다. 한 TV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한 육수 제조 과정을 보면, 소뼈와 돼지뼈를 열두 시간 이상 한 번 우려낸 다음 기름을 걷어낸다. 그 기름에 소두구·팔각·계피·생강·샬롯 등 다양한 향신료를 입혀 다시 육수에 넣고 총 열다섯 시간 이상 끓인다. 여기에 특제 수프를 더해 독특한 국물 맛을 만든다. 해산물라면, 소고기라면, 곱창소고기라면, 돼지고기라면. 문어해물라면이 대표 메뉴. 사이드 메뉴인 간장계란밥도 라면 국물과 잘 어울린다.
직접 개발한 수프 사용, 라면의 신세계
레알라면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25길 23-5
2004년 문을 연 레알라면은 회기동 인근의 한국외국어대, 경희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대학가 라면 맛집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 늘 북적인다. 무엇보다 직접 개발한 라면수프를 사용해 국물 맛이 진하고 깊다. 물도 맹물이 아닌 육수를 사용한다. 라면은 매운 정도를 선택할 수 있는데 레드·오렌지·옐로 등 3단계로 나뉜다. 신라면을 기준으로 레드는 4배, 오렌지는 2.5배, 옐로는 보통 맛이다. 라면 위에 콩나물, 김가루, 달걀 등 토핑이 수북하게 올라가 맛과 양에서 모두 만족스럽고, 치즈·공기밥·반찬은 셀프바에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강원도산 황태와 제주산 해물의 만남
표선해비치에갓더라면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민속해안로 580
제주해비치리조트 인근에 위치한 표선해비치에갓더라면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해물라면 맛집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강원도 인제에서 공수한 황태로 육수를 만드는 것이 특징. 기본 라면인 ‘갓더라면’ 외에 꽃게라면, 문어라면, 성게라면 등 다양한 해물라면을 맛볼 수 있다. 황태 육수의 시원함에 제주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해물의 싱싱함을 더해 매력적인 해물라면 맛을 완성했다. 국물이 깔끔해 밥을 말아 먹기도 좋고, 주먹밥과 함께 먹어도 좋다. 라면 외에도 밀가루를 최소화하고 감자·당근·고구마 등의 채소와 한치·새우 등 해물을 푸짐하게 올려 고소하고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식감이 일품인 한치해물파전도 인기 메뉴다.
[출처] 조선일보 top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