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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 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사랑받지 못하면 죽고 싶게 진화했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과 열두 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12’라는 숫자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백성과 12사도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 곧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 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의 샘임을 믿고 부모에게서 에너지를 받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자살 시도하면서도 창조자를 찾지 않고 자신은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장동선 뇌과학자가 ‘세바시 15분’에 나와 ‘마음의 구조신호에 귀 기울여 주세요’란 제목으로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청소년 때 두 번, 어른이 되어서 한 번,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우리 함께 죽자!”란 소리를 많이 하였던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치 독이 든 캡슐을 삼켜서 그 독이 계속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자신의 큰 아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강의는 모두 ‘진화론’적입니다.
뇌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진화론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고등동물로 올라올수록 ‘의존’해야 하게 태어납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려면 적어도 20년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고장이 나고 정말 죽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서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어미를 선택할 때 젖병이 있는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이 아니라 젖병이 없어도 따듯한 감촉이 있는 수건으로 감싸인 인형을 어미로 믿었습니다.
영장류는 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젖보다 어미의 사랑을 더 그리워합니다.
반면 모기나 박테리아와 같은 것들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관계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관계 맺을 필요가 없는 동물들이 더 유리합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모기나 바퀴벌레는 남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할 때면 그 창조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 만큼 그 창조된 것을 위해 더 큰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제가 컴퓨터가 고장 나 강론 원고를 날려버리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이 제출 직전에 다 날아가면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박테리아보다는 인간이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놓으십니다.
이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창조한 이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삶의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생성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진화하는 게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자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서 ‘당연하게’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이로나 하혈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께 빠져나가는 생명을 청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든 이로부터 에너지를 청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배우 최강희 씨는 낮은 자존감으로 밥도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천사 이미지와 저녁에는 술과 담배를 사서 먹고 마시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 하는 이중성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진정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고는
술·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비로소 참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자로 인정함으로써.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살아서 압니다.
우리에게서는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창조된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코드를 꽂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매일 세 시간 정도는 성체조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애인 만날 때 방법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만나는 거 자체가 중요한가요?
오늘 복음의 두 의인처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고 믿고 그분 옷자락을 쥐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분 곁에 머물면 됩니다.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며, 이제 그 생명과 구원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이는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음”과는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만드신(지혜 2,23)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한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완전히 함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사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간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친 이야기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의 일반적 전제조건인 병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기적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북돋우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화를 통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회당장이 예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하고 청한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딸의 상황이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35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선은 그 아이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부활과 같이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순간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때(40절)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탈리타 쿰”(41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며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2절) 한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 앞에서의 여인들의 놀라움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볼 때, 병에 대한 그분의 권능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분의 생명에 대한 능력은 예수님 자신도 조절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힘으로 옮아가듯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이미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바로 생명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지혜 1,13) 때문이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북돋움이다. 이 믿음은 더 많은 시험을 당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하신다. 아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혈하던 여인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을 때, 어쩌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캐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 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33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분과 참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는 부,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우리의 현세적인 부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임을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필립 2,7)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분은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또 항상 초대해 주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굳게 가지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인 ‘치타’를 혹시 아십니까? 이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속 100km대를 달리는 유일한 육상 동물이며, 최대 120km/h의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속도로 사냥감을 쫓아가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어떻게 될까요? 4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동물보다는 성공률이 높기는 하지만, 때로는 계속된 사냥 실패로 인해 굶어주는 치타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끼 치타의 생존율은 어떻게 될까요? 대략 독립할 수 있는 개월 수인 17개월 동안 4.8%만 생존한다고 하더군요. 현재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제일 낮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아는 91%가 첫 번째 생일까지 살아남고, 88%가 다섯 번째 생일까지는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타는 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아주 약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강함이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남들보다 강함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이를 위해 자기 능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두터워지게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발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청합니다.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의 집으로 함께 가십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회당장의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비웃었지만, 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회당장의 모습으로 인해 실제로 딸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비웃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말입니다. 세상의 뜻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뜻만을 바라보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소녀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너무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자녀들
교육입니다.
고민은 없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질책과 훈계만
있을 뿐입니다.
부모의 틀에
우리 자녀를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아프지 않고
성장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없습니다.
아픔 앞에서
비로소
깨닫는
우리들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손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소녀를
키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녀의
시간입니다.
소녀는
소녀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합니다.
재촉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소녀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부모가
소녀를 제대로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엄마 아빠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쓴맛과 단맛을
구분하며
가정의 역사는
자라납니다.
함께하는
생활 속에
성장이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만
부응하는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이길
바라십니다.
고마운
일상 안에
사랑스러운
우리 자녀들이
있습니다.
함께하는
식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단순한 사랑의
진리를 놓치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과
무엇을 나누려
하는지요.
가장 기본적인
식사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눈을
기쁘게 바라보는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41)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오늘 복음(마르5,21-43)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간곡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예수님께서 이 간곡한 청(믿음)을 들어주시어, 병으로 죽은 열두 살 소녀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믿음,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5,28) 하는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5,34ㄴ)
'믿음을 통한 구원!'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고 있었던 여자의 믿음,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었고, 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제1대 교황이신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현재 교황은 2013년에 즉위하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교황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교황님의 사목 활동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2차 헌금)에도 적극 참여합시다!
그리고 나의 구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순간 기억합시다!
복음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1,13-15; 2,23-24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8,7.9.13-15
형제 여러분, 7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