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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옛 드라마들을 떠올리며 걷는 아름다운 해안길, 해파랑길 3코스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112 18.07.19 0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파랑 3코스

 

여행일 : ‘18. 7. 7()

소재지 : 부산시 기장군 일원

산행코스 : 대변항죽성리 해안택시 탑승일광해변동백항신평소공원칠암항임랑해변월내항(이동거리 : 택시 탑승구간 포함 21.84)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기장은 예로부터 아홉 개의 포구가 있다고 해서 기장구포(機張九浦)로 불리었다고 한다. 화사을포(火士乙浦. 고리), 월내포(月來浦, 월네·임랑), 독이포(禿伊浦, 문오동·칠암·신평), 동백포(冬柏浦), 동백), 기포(碁浦, 이동), 이을포(伊乙浦, 일광·이천), 무지포(대변), 공수포(公須浦, 공수), 가을포(加乙浦, 송정)를 말한다. 오늘 걷게 되는 해파랑길 3코스는 이 가운데 대변에서 임랑까지 6개 포구를 잇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부산판 올레길인 갈멧길1-1코스와 1-2코스의 일부분과도 겹친다. 아무튼 이 코스도 바다를 끼고 이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관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무대를 지나는가 하면 옻을 칠한 것처럼 검은 빛으로 일렁이는 칠암 바다 등 눈요깃거리가 쏠쏠하게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또한 포구마다 갖고 있는 각양각색의 등대들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라 하겠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죽성리 해안이 아닐까 싶다. 갯바위 위에 드라마세트장으로 지어진 교회는 지나는 사람들이 누구나 기념촬영을 하고 갈 만큼 예쁘고,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나는 수많은 신목(神木)들 중에 당당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해송(海松)‘이 그 뒤를 이어 나타난다. 그밖에도 임진왜란의 아픈 흔적이랄 수 있는 왜성(倭城)‘도 죽성리에 있다. 이야깃거리야 볼거리가 몰려있다는 얘기이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대변항 멸치광장‘(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444-80)

대변항의 옛 이름은 대변포(大邊浦), 이는 '대동고(대동미 창고) 부근의 포구'라는 뜻인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변항의 특징은 단연 멸치라고 할 수 있겠다.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싱싱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선지 바닷가에다 멸치를 주제로 한 널따란 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이름 또한 멸치광장이란다. 그러니 멸치를 모티브(motive)로 한 조형물 하나 세워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조형물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멸치는 크기가 매우 작은 어류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멸치가 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의 멸치 성어기에는 대변항을 중심으로 멸치 축제까지 열린다니 두 말하면 뭐하겠는가.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흥선대원군이 세웠다는 척화비(斥和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92)‘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이 비석이 자리 잡은 '대변초등학교'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변초등학교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전국에 알려진 곳이나 지금은 용암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교 이름이 놀림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부학생회장에 출마한 학생이 개명(改名)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이 공약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높이가 150쯤 되는 방형(方形)의 척화비는 초등학교의 담벼락 안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담장을 허리 높이로 낮게 쌓고 그 위를 개방시켜 놓아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비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척화비란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그는 국내적으로 국정쇄신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에 초점을 맞추었고, 대외적으로는 서방 제국주의에 대해 쇄국정책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당초 이 비석은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때 축항(築港)을 하면서 바다에 버려졌던 것을 해방 후 1947년경 부락 청년들이 인양하여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대변마을회관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이 지역 특산품인 멸치와 미역 등을 파는 건어물 가게들이 즐비하다. 대변항은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의 멸치 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죽도 주변에서 채취된 미역은 질이 좋다고 세간에 알려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왕에 특산지에 왔으니 두어 개 챙겨가라는 건어물 가게 아주머니의 호객행위에 확신이 들어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멸치회와 장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항구에 즐비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바닷가 포구를 빠져나온 탐방로는 한적한 시골길을 잠시 걷는 가 싶더니 이내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월전마을까지의 구간이 해안도로로 연결되기 전에 걸어 다녔던 옛길이란다. 이 부근의 특징은 아무래도 건조망(乾燥網)이 아닐까 싶다. 조그만 공터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건조망을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산품인 멸치나 미역을 말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쯤 되자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봉대산((峰台山·229.4m)으로 올라가는 길(왼편)과 죽성마을로 내려가는 길(오른편)이 나뉘는 지점인데도 불구하고 이정표가 세워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성리로 내려가는 길이 사유지라고 해서 막혀있기 때문이란다. 그로인해 죽성리로 연결되던 원래의 탐방를 봉대산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무시하고 죽성리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그를 따라 진행할 경우에는 죽성리 해안을 구경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국수당과 왜성(倭城), 황학대 등 이야깃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드림세트와 갯바위가 널린 바닷가, 해송(海松) 등 볼거리까지 널려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다. 혹시 길이라도 막혀있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허나 이 또한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200m쯤 내려가는 지점에서 잠깐 길이 희미해지는 것을 제외하면 임도에 가까울 정도로 길이 고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월전마을(이정표 : 기장군청4.1/ 오랑대6.8/ 대변항2.5)에 이른다. 월전(月田)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이고,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 ‘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으로, 마을이 남산 기슭의 언덕을 개간하며 형성되어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달밭을 한자명으로 하면 고산(高山) 또는 산전(山田)이 되어야 하는데, ()’을 차훈해 월전이 되었단다. 마을에 들어서니 바닷가에 지어진 활어판매장이 눈길을 끈다. 40여 가구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17년 간 공동으로 운영해오는 곳이라는데,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 주민들이 번갈아가면서 다른 상호로 이곳에서 영업을 한단다. 오늘 하루 일했다면 다음날은 쉬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다른 상호로 영업하는 격이다. 주민 모두가 골고루 먹고 살자는 철학이 담겨있는 활어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푸근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이(轉移)되었던가 보다. 뜬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밭을 널따란 마음으로 펼쳐보니 마을 이름은 곧 달뜬 마음으로 변한다. 파도소리 스며드는 언덕에서 달빛에 몸을 맡긴다고 상상해보자. 앞에는 이곳의 명물인 장어구이와 와인(wine) 한 병이 놓여있다. 아니 꼭 와인일 필요는 없겠다. 이런 분위기라면 소주라고 해서 분위기가 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쏠쏠 돋아날 게 분명하다는 얘기이다.



마을 앞 방파제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월전등대장어등대라고도 불리는데 장어에서 모티브(motive)를 땄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란다. 콘크리트 재질의 네모난 외관에 넣은 문양(紋樣)이 몸을 배배 꼰 장어가 수면을 박차고 치솟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안전 운항을 돕는 등대의 고유 기능에다가 관광과 지역특성을 감안한 디자인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 등대는 200999일 첫 점등했다고 한다. 9가 두 번만 겹쳐도 행운이라고들 하는데, 세 번이나 겹쳤으니 행복에 겨운 날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등()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언뜻 불길한 숫자 같기도 하지만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는 서로가 탐내는 숫자이기도 하다.



월전리에서 낮은 고갯마루 하나를 넘자 또 다시 바닷가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놀래미섬 해안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놀래미처럼 생겼다는 놀래미섬의 앞에 있는 해안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해안가에는 예쁘장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양쪽에 난간까지 둘렀는가 하면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이 바닷가에다 관람석까지 만들어두었다. 이제부터는 두호(豆湖)‘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두모포라 불리었는데 연안방어를 위한 수군이 주둔하던 군사요충지였다. 두모포진성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으나 이 두모포진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 수정동으로 옮겨졌다.




조금 더 걷자 바닷가에 세워진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에 띈다. 이곳이 두모포 풍어제가 열리는 장소임 알리는 빗돌이다. ’두모포 풍어제란 기장의 6개 어촌마을(두호, 대변, 학리, 칠암, 이천, 공수)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한 개 마을씩 지내오는 풍어제 가운데 하나이다. 쉽게 말해 두호마을이 제주(祭主)가 되어 지내는 풍어제라고 보면 되겠다. 풍어제는 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의 또 다른 말로 바다가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어온 기장에서 고기잡이를 나간 사람들의 무사 안녕과 만선을 기원하는 제()이다. 개인의 건강과 장수(長壽), 사업의 번창, 마을 사람들의 화합 등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소규모 지역축제라고도 볼 수 있다. 굿거리는 천왕굿, 용왕굿, 문굿, 제석굿 등 무려 50석이나 되지만 지역 실정에 따라 굿거리가 조정돼 행해진다고 한다.



빗돌 옆에는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서있다. 그런데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주요 메뉴를 장어구이로 내걸고 있다. 장어 굽는 냄새가 길을 막는 이유일 것이다. 맞다. 이곳 기장 앞바다는 붕장어가 대량으로 잡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만나는 곳으로 물살이 세서 옛날부터 붕장어의 주요 생산지였다고 했다. 부산의 붕장어 어선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출항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60여 척의 붕장어 배들이 어획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을 생산량만 해도 200~300톤에 이른단다. 붕장어는 큰놈은 통발어업으로, 작은놈은 주낙어업으로 어획하는데, 기장은 이 모두를 활용할 정도로 붕장어 어업이 성한 곳이란다. 그 가운데 작은 놈은 횟감으로 사용된다니 이곳 포장마차촌에서는 큰놈을 사용하고 있는가 보다.



잠시 후 바닷가에 솟아오른 갯바위를 올라탄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회색 벽돌과 흰 벽체, 주황색 지붕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답다. 그 오른편에는 등대도 하나 들어앉았다. 이곳 죽성리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죽성리 성당이다. 하지만 진짜 성당은 아니다. 2009SBS-TV에서 방영했던 인기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세트장이라고 한다. 주진모, 김범, 손담비 주연의 드림은 소년원 출신 격투기 선수와 스포츠에이전트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이다. 당시 이곳에서 주인공들의 지옥 훈련 씬(scene)과 최종회의 피날레 씬(finale scene) 등을 촬영했단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풍광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교회건물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들이다. 앨범에 끼워놓고 싶을 만큼 경관이 아름답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주변 풍광도 사뭇 빼어나다. 이를 감안했는지 건물 앞에다 전망데크를 만들고 포토죤(photo zone)‘도 설치해 두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옥선 수채화전이란다. 최근에 리모델링했다고 하더니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바꾸었나 보다.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후 나지막한 바위 언덕에 지어진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그 아래에는 사당으로 보이는 단칸집도 지어져 있다. 기장오대(機張五臺) 중의 하나인 황학대(黃鶴臺)‘일 것이다. 정자는 물론 황학정일 것이고 말이다. 죽성리 일대의 해안은 예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명소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시조문학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도 이곳에다 그의 흔적을 남겼다. 기장에서 7년간 유배생활을 한 그는 죽성 해안의 작은 섬 송도(황학대가 있는 이곳은 원래가 섬이었다)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다와 시원한 바닷바람, 코끝을 스쳐가는 해송 향기, 그리고 갈매기의 날갯짓이 그의 시름을 달래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그는 이곳을 양쯔강 하류에 있다는 황학대의 빼어난 절경에 비유했고, ‘황학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 , 제문 등 29수도 남겼음은 물론이다.




황학대의 뒤편에는 두호해녀복지회관이 이층으로 지어져 있다. 황학대의 벼랑 아래에는 해녀상도 세워놓았다. 마을에서 차지하는 그녀들의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복지센터 앞에서 기장군청 방향으로 진행한다. 바닷가를 따라 200m 조금 못되게 더 걷자 죽성초등학교가 길손을 맞는다. 해송과 왜성을 찾아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니 유념해 두자. 하긴 들머리에 이정표(죽성 해송200m/ 황학대200m, 드림세트장 300m)와 갈멧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헷갈릴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들어선다. 죽성리의 또 다른 명물인 해송(海松,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 25)’을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나게 되는 수많은 신목(神木)들 중에 당당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웅크리고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진행하다 길이 둘로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편은 왜성(倭城)으로 가는 길이니 참조한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니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는 노거수(老巨樹) 무리가 길손을 맞는다. 얼핏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섯 그루라고 하는데, 그 나무들 가운데에 국사당이라 불리는 성황당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원래 이 사당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국수대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후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로 바뀌면서 이름 또한 국수당으로 바뀌었단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널따란 주차장이 나온다. 이어서 주차장 뒤편으로 몇 걸음 옮지가 성곽으로 오르는 데크계단이 나타난다. ! 주차장 한켠에 왜성 본성의 배치도와 왜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한번쯤 읽어보고 난 후에 성곽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성은 해발 50m의 산봉우리를 평평하게 고르고 한 변이 약 50m인 정사각형의 아성(牙城)을 쌓고, 그 둘레에 한층 낮게 한 변이 약 80m인 사각형 외곽을 둘러싼 전형적인 일본식 성곽이다.



100m 남짓 오르니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죽성리 왜성의 성벽이 나타난다. 둘레 960m 규모로 쌓아올린 일본식 성곽인데 현재는 성문과 해자(垓字) 등의 시설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성은 1593(선조 26)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서생포(西生浦)에서 동래·김해·웅천(熊川거제(巨濟)에 이르는 해안선에다 쌓은 성 가운데 하나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축성했고, 정유재란 때는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일본문헌에는 기장성(機張城)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등에는 모두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죽성초등학교로 되돌아와 콜택시를 부른다. 시내구간을 지나야 하는데다가, 일부 구간에서는 지나다니는 차량들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천원 조금 못되는 돈을 물고 10분 남짓 달리자 일광해안(日光海岸)에 도착한다. 강송정에서 학리 어구까지 원을 이루며 펼쳐져는 일광해안은 현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있다. 백사장의 길이 1.8에 너비 25m, 평균 수심은 1.2m라고 한다. 해안선은 수평선의 양끝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 보통의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오목한 어항 모양의 전형적인 포켓 비치(pocket beach)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장엄하거나 광활하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대변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너울성 파도가 밀려온다는 일기예보 탓인지는 몰라도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평소에도 이런 풍경이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6월에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올해의 으뜸 해수욕장에 이곳이 선정된 것을 보면 말이다. 부산지역의 다른 해수욕장들처럼 방문객이 많지 않은 탓에 여유롭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선정 이유로 들지 않았던가. 여유로운 일광(日光)은 물론 붕장어 구이나 멸치회 등 식도락까지도 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의 중앙에는 배()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뱃머리 부분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난 것을 보면 전망대용으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바닥에는 분수(噴水)를 배치해 물놀이까지 겸할 수 있도록 했다.



일광해수욕장에서 다리 하나만 넘으면 이천항’, 행정 지명으로는 일광면 이천리이다. 전형적인 어촌마을인데 1965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을 촬영하면서 유명해졌다. 토속적 정서와 삶의 애환이 담긴 영화였는데,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다 빗돌까지 세워두었다. 그런데 빗돌이 자리 잡은 장소가 자못 범상치가 않다.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와 그 아래에 지어진 사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옛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 해마다 8월이면 이곳에서 갯마을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 끄트머리에서 이천 해녀복지관을 만난다. 이 마을 역시 해녀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짭짤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복지관 앞에서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오솔길로 변한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고생깨나 하면서 비켜가야 할 것 같이 비좁은 오솔길이다. 한국유리공업이 바닷가에 잇대어 쌓은 담벼락을 피해 길을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유리공장 뒷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게 싫다면 바닷가로 내려설 수도 있다. 자갈밭이어서 걷는데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파도라도 높을라치면 이용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구간에서 바라보는 이동항의 풍경이 제법 낭만적이다.




유리공장 뒷길이 끝나면 비록 잠시지만 탐방로가 바닷가를 벗어난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해안가를 턱하니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끼고 걷던 공단을 벗어나자 기장미역다시마특구라고 적힌 입간판이 길손을 맞는다. 미역만이 지역특산품인 걸로 알았었는데, 다시마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래현조를 보면 미역을 진공(土貢)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5세기 이전에도 기장 지역의 미역이 유명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부분이 양식인 지금과는 달리 바위에 붙어 있는 것을 채취한 미역(돌미역)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이점을 살리기 위해 2007년에는 이 일대 157필지(168755)기장 미역·다시마 특구로 지정했다고 한다. 미역을 기장군의 특산품으로 특화시켜 육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입간판을 지나자마자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들머리에 이정표(신평소공원4.2/ 일광해수욕장2.0)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꽤 많은 소형 동력선들이 정박해있는 이동항(伊東港)에 이른다. 이천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동이라는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는 2시간이 걸렸다. 이곳 이동항은 미역다시마특구’, 나온 김에 다시마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다시마는 다시마과에 속하는 해조류(海藻類)로 몸은 넓은 띠 모양이며, 바탕은 두껍고 표면이 미끄럽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먹어왔으나 최근 혈압을 낮추는 라미닌이라는 아미노산이 들어 있음이 밝혀져 약용식물로도 널리 쓰인다. 특히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이후 다시마의 요오드 성분이 방사능 물질 해독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정도란다. 참고로 이동 마을의 옛 이름은 바둑개라고 한다. 바둑돌이 갯가에 널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한자로는 기포(碁浦)라 표기한다.



바닷가를 따르다가 삼기물산건물 앞에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탐방로는 자동차도로(일광로)를 따라 이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멋진 외관의 음식점과 카페들을 눈요기 삼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대신 나쁜 점도 있다. 도로와 탐방로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았지만 혼자서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카페나 음식점을 찾아온 승용차들이 그런 공간들마저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다보면 도로를 침범할 수밖에 없는데, 지나다니는 차량들의 속도가 만만찮아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분 남짓만 걸으면 그런 위험구간이 끝난다는 것이다. 바닷가 비탈진 곳에다 데크로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데크로드를 따르다보면 곳곳에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기암괴석들이 들어찬 바닷가 풍경이 만만찮게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들 일색이다. 조그만 공간이라도 보일라치면 장사치들의 평상들이 어김없이 들어앉았다. 그들이 만드는 뭔가를 팔아주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걷자 해동성취사(海東成就寺)가 나온다. 이 사찰은 대한불교 법화종 소속의 사찰로 2000년 범종이 창건했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하다보니 기억해 둘만한 문화재가 있을 일가 없다. 그저 팔작지붕 형태의 대웅전은 1층에다 지장전을 두었고, 산신각과 요사채 등이 더 있을 따름이다. 그 외에 경내에는 범종과 포대 화상(布袋和尙,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미륵보살의 화신), 그리고 특이한 북 형태의 해우소가 있다. 도로 건너편에 있으므로 사찰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구태여 들어가 볼 필요가 없을 듯 싶다.



이 근처에서 우린 길을 잃어버렸다. 온정마을회관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도 무심코 직진해버린 것이다. 잠시 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만나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 걸 눈치 챘지만 되돌아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덕분에 온정항을 구경하진 못했지만 모두들 다리가 피곤하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연구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백항(冬栢港)에 이르게 된다. 동백항은 지방어항으로 지정된 항구이다. 잔잔한 동백항의 바다에서 겨울이면 싱싱하게 잘 자란 제철의 미역을 딴다고 한다. 바다가 깨끗한 걸로 보아 이곳에서 딴 미역은 분명 귀하디귀할 것이 분명하다.



해안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소담한 매력이 있는 신평소공원이 나타난다. 신평마을에 있는 작은 공원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 신평마을은 1970년대 이곳을 무대로 한 오영수 소설의 '갯마을'이 영화화되고, TV연속극으로 방영되면서 유명해진 갯마을이다. 극중 주인공인 청상과부 해순이가 물질을 하면서 상수와 밀회를 즐기던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갯마을의 주요촬영지는 아까 지나왔던 이천리였다는 것은 잊지 말자. 참고로 신평리의 옛 이름은 독이방(禿伊坊)이라고 한다. 신평리 뒷산이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신평리라는 이름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들, 새버들이라 불리던 것이 한자로 고치면서 신평(新坪)으로 변한 것이란다.



공원의 바닷가 벼랑 위에는 배를 빼다 닮은 조형물 하나가 걸터앉았다. 마치 배 한 척이 항해를 시작하는 것 같은 모양새이다. 길이 18.86m에 폭은 12m, 그리고 높이가 15.5m인데 기장바다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상징물이란다. 또한 기장의 바다풍경과 아침 해가 잘 조망되는 곳으로 소공원의 랜드마크(landmark)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기장군의 그런 의도를 읽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뱃머리에 올라가 바다를 향해 양팔을 벌리면서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재현하기도 한다.



신평공원 아래는 마치 옻칠을 한 것처럼 검게 빛나는 갯바위들이 곳곳에 잘 발달되어 있다. 바다가 만들어 낸 바위의 결이 얼핏 주상절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란다. 하지만 그 생김새만큼은 사뭇 범상치가 않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서 내려가 볼까 하다가 파도가 높아 그만두기로 한다. 갯바위에 들어붙은 고동이나 담치, 거북손 등을 잡는 재미보다는 당장의 안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페가 올라앉은 바닷가 모퉁이를 넘어서자 이번에는 칠암항(七岩港)이 길손을 맞는다. 칠암(七岩)이란 지명은 마을 앞 해안가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마을 앞에 옻바위(색깔이 옻을 칠한 것처럼 검어 붙여진 이름)가 있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칠암(漆岩)이라는 것이다. 칠암의 칠() 자가 쓰기 어려워 일곱 칠() 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마을 앞 검은 바위가 7개라서 일곱 칠()’ 자를 썼다고도 하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칠암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칠암 붕장어라는 지역음식 브랜드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잡히는 붕장어는 60~70, 육질이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고 한다. 그래서 씹을수록 고소하고 단맛이 돌아 오래전부터 횟감이나 구이용으로 큰 인기를 누려왔단다.



칠암항의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등대가 아닐까 싶다. 야구등대와 붕장어등대, 갈매기등대 등 색깔과 외모가 완연히 다른 등대가 셋이나 된다. 셋이지만 칠암에서 보이는 등대는 이보다 더 많다. 왼편 끄트머리에 문중등대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신평등대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칠암의 등대들은 조형등대(造形燈臺)이다. 등대 고유의 기능에다 지역 특성을 살린 디자인 개념이 들어갔다. 이런 조형등대는 전국적으로 스물 두 개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셋이나 칠암에 있으니 이곳 칠암이 등대의 포구로 불림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 가운데 야구등대는 흰색이다. 조형등대답게 외양에 개성이 철철 넘친다. 야구글러브와 공과 배트를 한데 모은 형상이다. 거꾸로 세워진 배트의 뭉툭한 윗부분에서 등불이 들어온단다. 녹등이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다. 야구등대의 왼편, 그러니까 문중등대 방향의 일자방파제에 등대 둘이 더 있다. 붉은색은 갈매기등대로 갈매기와 떠오르는 해를 조형한 등대다. 홍등을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같은 방파제의 노란색 등대는 일본말로 아나고인 붕장어가 칠암에서 판을 친다고 해서 붕장어등대로도 불린다. 노란색 등불을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야구등대는 가까이 다가가 볼 수도 있다. 등대 내부에는 이곳 부산이 낳은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의 사진과 그가 세운 기록이 전시돼 있다.



등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칠암마을과 항구, 반대편에는 동해의 푸른 바다가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문중항 방향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원자력발전소(古里原子力發電所, Kori Nuclear Power Plant)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197111월에 착공되어 1977년에 완공되었고 19784월에는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로 원전보유국이 된바 있다. 지금은 비록 탈원전 정책(脫原電 政策)’에 시달리고 있지만 말이다.



칠암의 바닷가를 걷다보는 모든 시야에서 등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바닷가에 세워놓은 조형물이라고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불가항력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나 보다. 등대들을 양옆에 끼고 있는 조형물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조형물은 아예 품에다 안아버렸다.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니 조형등대들은 이곳 칠암의 홍보대사인 셈이다. 아니 일류의 홍보대사라 하겠다. 사람이 모이면서 지역경제에 윤기를 불어넣는다니 말이다.



아직 칠암항이려니 했는데 어느새 문중항(文中港)’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나뉠 뿐 실제로는 무경계라고 보는 게 옳겠다. 조형등대가 흔하디흔한 보통의 등대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마을 풍경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마을이 조금은 아기자기 해졌고, 방파제 안에 어선 주차장이랄 수 있는 정박시설이 별도로 만들어져있으니 어느 정도는 달라졌다고 보는 게 옳겠다. 옛날 이곳에는 공납미를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단다. 그저 바닷가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문중(文中)이란 지명은 문오동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오동은 기장현 시기에 중북면의 문동, 문상(해창 마을), 문중, 문하(칠암 마을)와 문서(동면 동백 마을)를 합쳐 부르던 지명이다.



문중항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31번 국도)로 올라선다. 이동에서 온정으로 넘어오는 구간에서 만났던 도로와 마찬가지로 비좁은 탐방로를 걸으며 지나다니는 차량에까지 신경을 써야만 하는 소름끼치는 구간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볼거리까지도 별로 없다. 3코스에서 가장 삭막한 구간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좌광천을 가로지르는 임랑교를 만나게 되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탐방로는 천변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임랑해수욕장(林浪海水浴場)에 이른다. 임랑(林浪)이란 지명은 아름다운 송림(松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波浪)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백설 같은 백사장이 넓게 깔려있고, 백사장 주변에는 노송(老松)이 즐비하다고도 했다. 옛사람들이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고기잡이하면서 놀다가 밤이 되어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사랑하는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모래사장은 폭이 좁을 뿐만 아니라 그 모래마저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달빛 아래서 빛을 발했다는 송림(松林)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늙은 소나무 숲은커녕 작디작은 소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벽화로 장식된 민가와 민박집, 그리고 횟집들이 바닷가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하긴 강산도 십년이면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해수욕장이 끝나면 곧이어 임랑항(林浪港)에 이른다.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다. 임을랑이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는 설에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이곳 임랑항의 명물도 역시 낚시등대라는 조형등대가 아닐까 싶다. 부산출신의 조각가인 박종만씨의 작품으로 모티브는 황금 낚시대로 대어(大漁)를 낚는 기쁨에서 따왔다고 한다. 풍어를 바라는 어민들의 소망이 깃들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트레킹의 종료는 월내항(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494-36)

해파랑길 3코스는 원래 임랑항에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우린 임랑항과 함께 임을랑포(林乙浪浦)를 구성하고 있는 월내항(月內港)’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대형버스가 주차할만한 공간을 찾다보니 그리 되었단다. 아무튼 골목길을 짧게 통과하니 탐방로는 멋진 카페(음식점)들이 늘어선 도로로 연결되고, 또 다시 나타나는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월내항의 널따란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중간에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한 경관 좋은 곳에서는 사진을 찍느라 더디 걸었으니 소요시간에 큰 의미는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긴 아름다운 만큼 더디 걸리는 것이 트레킹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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