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 - 서울 서촌마을(4)
(2023년 10월 21일)
瓦也 정유순
해공 신익희 가옥에서 나와 자하문로를 건너면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이다. 옥인동 19번지에는 ‘을사 5적, 정미 7적, 한일병합의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친일파 중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賣國奴) 이완용이 살았고, 그 중에서도 이완용 보다 더 악질적이고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윤덕영인데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옥인동의 약 54%가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옥인동의 윤덕영과 이완용의 토지>
이완용이 살던 저택은 전형적인 조선 정승의 99칸짜리 기와집이었는데, 이완용은 그 한 모퉁이에 2층짜리 양옥을 짓고 살았다. 이완용(李完用)의 집은 원래 약현동(현 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었는데, 1907년 6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불이 났다. 6월의 1차 화재 때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2차 화재 때는 조상들의 위패를 비롯해 이완용의 거의 전 재산이 불에 타버렸다.
<1927년 이완용 가옥 지도>
성난 군중들에 쫓긴 이완용과 가족들은 남산 왜성대(倭城臺)에서 두 달가량 머물다가, 1907년 9월 의붓형 이윤용의 집을 거쳐, 1908년 1월 고종이 직접 내준 것으로 꾸며 단종(端宗)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집인 남녕위궁(南寧尉宮)으로 잠시 옮겼다. 이후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받은 순화궁 터에서 5년여 살다가, 1913년 옥인동으로 이사해 1926년 2월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이완용의 집터에 새로 지은 양옥과 똑 같은 집>
이완용(1858∼1926)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우봉(牛峰)이씨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는 예방승지(禮房承旨)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여 1886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되었다.
<을사오적 이완용>
1887년 주 미국참사관(駐美國參事官)을 지낸 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에 가담하여 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다. 이후 박정양(朴定陽)이 과도정부에서 내무대신이 되었고,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서리를 겸하다가 1897년 내각에서 밀려나 평안남도와 전라북도 관찰사로 나간다. 1898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정미칠적 이완용>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이완용을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임명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솔선하여 지지·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된다.
<경술국적 이완용>
이등박문(伊藤博文)의 눈에 든 이완용은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나자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하여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많은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다.
<매일신보에 나온 이완용 가옥 신축 기사>
1907년 이등박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입법·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하면서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 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현재 이완용의 집터>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귀족원 부회장이 된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男爵)을 손자는 후작의 지위를 받았다.
<이완용 장례식>
이완용은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이완용이 사망할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로 표현했다. 이완용의 집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징발되어 미 군속들에게 불하되었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필지로 나뉘었다.
<이완용의 글씨로 알려진 독립문>
이완용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발견되었는데, 후손들이 묘를 몰래 이장하면서 버리고 간 이완용 관 뚜껑을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완용의 종손인 이병도(李丙燾)가 학술연구에 쓴다며 압력을 넣어 빌려간 후에 불에 태워 버렸다고 한다. 관 뚜껑에는 ‘朝鮮總督府中樞院副議長正二大勳位侯爵牛峯李公之樞(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정이위대훈위후작우봉이공지추)’라고 쓰여 있었다.
<이완용의 관뚜껑 - 네이버캡쳐>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은 호는 벽수(碧樹)이며 대한제국의 관료이며, 경술국적의 한 명으로 조선귀족 자작(子爵)위를 일본으로부터 수여받았다. 윤덕영은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백부(伯父)로 황후의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의 형이다. 선조의 부마 윤신지(尹新之)의 10대손이다.
<윤덕영>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1895년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 시독관, 내부 지방국장, 법무국장 등에 임명되었다. 1901년 경기도관찰사로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그 후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에 설치된 관청인 철도원부총재 등을 지냈다. 조카 순정효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대한제국 융희(隆熙) 2년(1908)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임명되었다.
<벽수산장 대문 기둥>
1909년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열었다. 대한제국 1910년(융희 4) 한일병탄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國璽)를 빼앗아 늑약체결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작위를 받았다. 한일병탄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순정효황후는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두었으나 그는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
<순종이 황태자 때 쓴 장충단 비>
윤덕영은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다. 1917년 순종의 일본 다이쇼 천황 방문 추진에 관여하였다. 2년 후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소문으로 떠돌던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 받고 있다. 1919년 고종의 사망 당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서 문제가 되었다.
<벽수산장으로 통하는 다리 흔적>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조선인으로는 최고직위인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1939년 창씨개명을 놓고 해평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창씨개명을 강력 반대했다. 그러나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한다.
<벽수산장이 있었던 옥인동>
1910년 한일병탄조약 이후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천황을 알현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민심이나 황실 분위기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천황알현의 중대사안을 맡겼고, 하세가와는 대한제국 황제의 천황알현을 직접 지휘하였다.
<인왕산>
처음에는 이완용을 시켜서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하세가와는 윤덕영을 통하여 이를 추진하였다. 윤덕영은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을 일주일간 대면을 통하여 압박하였는데, 고종이 피곤하여 누우면 윤덕영은 별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종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윤덕영의 집>
이에 윤덕영은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国分象太郎)와 공모하여 당시 이왕직장관인 민병석(閔丙奭)의 동의와 하세가와 총독의 뜻에 따라 덕수궁 내를 정리한다는 것을 핑계로, 덕수궁 내의 크고 작은 창고부터 고종의 신변의 문고서함까지 엄밀히 검사하여 개개마다 봉인을 붙였고, 또 이 물건들을 보관하던 상궁을 파면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윤덕영은 장시사장(掌侍司長)의 직권으로 밀어 붙였다.
<덕수궁 중화전>
또 윤덕영은 당시 30여 년 전 명성황후 사후 왕후를 다시 맞이하기 위하여 김씨 가문의 규수가 간택 확정되었지만 왕실 사정에 의하여 30여 년간 규방에 머물고 있던 일이 있었다. 윤덕영은 이 일을 고종에게 꺼내며 압박하였는데, 매일 오후 2~3시부터 오전 2시 무렵까지 고종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결정하도록 압박하였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결국 천황알현을 허락하였는데, 자신 대신 창덕궁에 머물던 순종에게 알현하도록 하였다.
<조선일보에 실린 윤덕영의 벽수산장>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의 저자 곤도 시로스케(権藤四介)는 이런 윤덕영의 모습을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기록하였다.
<벽수산장>
윤덕영은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다. 종로구 옥인동 일대를 1910년부터 매입하여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10년 넘는 기간 동안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대저택을 건설하여 1935년 완공시켰다. 그러나 5년 뒤인 1940년에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사용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66년 벽수산장(언커크 본부) 화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부인 김복수,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손자 윤강로와 함께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부인은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 김복수(金福綏)로 친일매국에 부창부수(夫唱婦隨) 하였다.
<벽수산장 건물 흔적>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윤덕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99칸, 하천이 있는 총2만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이다.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碧樹山莊)’이다. (끝)
<벽수산장 안문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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