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올린 지 며칠 만에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대(對)러시아 전쟁을 총괄하는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을 논쟁의 전면으로 소환했다. 발레즈니 총참모장이 직접 쓴 기고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일 타임지가 지난해 5월 이후 1년 5개월만에 쓴 기사의 논조가 바뀐(타임지 필자는 지난해 5월 기사로 우크라이나의 훈장까지 받았다/편집자) 것처럼, 지난해 12월의 잘루즈니 총참모장 인터뷰와는 달라진 '이코노미스트지' 특집 기사의 발언들을 지목하며, "지난 10개월간 전황은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지난해 12월 인터뷰와 비교하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해 12월 잘루즈니 총참모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2023년 반격 작전'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 때만 해도 미국 등 서방 측은 아직 우크라이나에 전차(탱크)와 보병 전투 차량(장갑차) 등의 공급에 나서지 않았다.
잘루즈니 우크라군 총참모장/사진출처:페이스북
당시,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이 인터뷰에서 "탱크 300대, 장갑차량 600~700대, 곡사포 500대가 필요하다"며 "이 장비들을 받으면 (2022년) 2월 23일 이전의 국경선에 도달하는 게 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규모 군사 지원의 조건으로 러시아군을 이전 국경 밖으로 격퇴하겠다고 서방 측에 약속한 셈이다.
스트라나.ua는 "그의 요구 조건이 모두 이뤄졌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탱크의 경우, 요구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겨울과 봄에 걸쳐 다양한 개량및 개조 과정을 거친 독일제 '레오파드 전차' 최소 400대, 영국의 챌린저 전차 14대, 동유럽에서 소련제 전차들도 받았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웹페이지, '러시아를 격파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잘루즈니)가 원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캡처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계산에 따르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전쟁전 국경까지는 몰라도, (여름철 반격 작전의 목표인) 남부 '멜리토폴'을 수복하는 데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평가다.
실제로, 그는 "나토(NATO)의 군사 교본과 우리의 계산으로는 크림반도 진입까지 4개월이면 충분한 것으로 나왔다"며 "우리는 하루 30km의 속도로 남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실제로는 4개월간 17km 진격)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부대 지휘관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일부를 교체했고, 그 다음에는 부대원들을 바꿨다"면서 "그러나 나중에야 우리가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진지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당초 예상을 빗나간 반격, 그리고 작전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군의 병력을 소진시키려는 작전은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최소 15만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다른 나라에서라면 전쟁을 멈추었을 것"이라며 "판단 착오였다"고 밝혔다. 그가 인용한 러시아군의 손실 규모는, 우크라이나 참모부가 매일 보고하는 러시아군 사망자 수(30만)의 절반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앞서, 미 '타임지'는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을 약 10만명으로 추정했다. 잘루즈니 총참모장도 “양측의 공격적 행동은 장비와 병력의 큰 손실을 내고 있다”고 우크라이나군의 큰 손실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지난 6월 말 미 워싱턴 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반격)은 공중 지원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며 "나토도 제공권의 우위 확보 없이 그러한 공격을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스트라나.ua는 "그의 계획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진 지금,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발언이 10개월 전과 어떻게 다른 지 분석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며 그 차이점을 살폈다.
그는 이코노미스트 기고와 인터뷰를 통해 "나토의 군사교본과 우크라이나군 최고 지휘부의 계산과 달리 반격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극적인 돌파구도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이유로 양측의 대등한 군사력을 꼽았다. 군사 장비와 병력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한, 어느 쪽도 진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원인이기도 하다.
이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그는 포병및 항공 전력 강화, 드론(전자전) 능력 향상, 지뢰제거 장비 확보, 예비 병력 확충 등 각 분야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무력화할 수 있는 서방 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꼽았다.
특히 그는 "전자전은 '드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열쇠"라면서 "러시아군은 지난 10년간 전자전 전담 부대를 창설하고, 새로운 유형의 60가지 전자 장비를 개발해 우리(우크라이나군)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쟁 발발 당시 우크라이나군의 전파 방해 플랫폼(장비)은 65%가 소련제였으나, 러시아는 전자전 능력의 확충으로 '엑스칼리버 고정밀 유도 로켓' 등 서방제 무기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작전 중에 파괴된 독일제 레오파드 전차들/사진출처:텔레그램 등 SNS
그는 러시아군의 지뢰밭 제거에 대해 "서방 보급품으로 우리의 장비가 개선됐지만, 최전선에서 뒤로 20㎞나 뻗어있는 러시아군 지뢰밭 규모를 감안하면 이것도 부족한 수준"이라며 "우리가 기껏 지뢰밭을 일부 돌파하면, 러시아는 멀리서 또 지뢰(포탄)를 발사해 지뢰밭을 보완한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리도 적도, 서로 상대가 하는 행동을 직접 보고 있다"며 "이같은 교착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중국이 화약을 발명한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것을 발명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실성이 결여된 향후 우크라 군사작전
그러나 그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 서방 진영의 최우선 과제는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으로 고갈된 무기고를 채우는 일이고, 미국에서는 대우크라 대규모 군사 지원에 대한 하원(공화당 장악)의 저항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이코노미스트지' 발언들은 결국, 러시아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확보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반면, 러시아는 앞으로 상당 기간 무기와 장비, 미사일, 탄약 부문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인정했다.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방산산업의 역량이 계속 향상되고 있다고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2023년 말까지 수백대의 전투기와 공격용 헬기 등으로 구성된 항공 전력을 8개 여단으로 늘릴 수 있다"고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예상했다.
공격에 나선 러시아군의 공격용 헬기/현지 TV 영상 캡처
그는 또 미 주간지 '타임'의 기사 내용을 일부 확인했다. 우크라이나 군부는 전선의 교착 상태와 반격 작전의 무익함을 고려해 공격 자체를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고 그는 '이코노미스트지' 기고를 통해 밝혔다. '타임지'는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군부의 이같은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스트라나.ua는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이코노미스트지'에서 공격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크라이나군이 주도권을 쥐고 계속 공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러나 '전쟁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그의 발언으로 미뤄볼 때, 우크라이나군은 더 이상 전선의 교착 상태에서 돌파구를 찾기 힘들다는 판단을 명확하게 전달했다"고 해석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앞날에는 전략 변경이 불가피한 두 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다고 이 매체는 결론냈다.
◇ 우크라이나군 앞에 놓은 두가지의 길
우선, 전략적 방어로 전환하고, 새로운 공격(내년 반격)을 위한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이는 서방으로부터 군사장비 공급이 양적, 질적으로 늘어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는 어떤 면에서도 러시아와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공개한 에이태큼스 미사일 발사 장면/영상 캡처
그는 최근 미국으로부터 받은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로 지난 10월 30일 처음으로 크림반도를 공격했다며 "작년부터 이 미사일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1년이 지나서야 받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크림반도를 '푸틴 대통령에게 가장 취약한 곳' '(러시아) 제국 재건 프로젝트의 핵심', '결정적인 병참 기지' 등으로 간주하면서, "에이태큼스 미사일로 더 자주 크림반도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에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두번째 버전은 휴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지도부나 주요 서방 국가로부터 '휴전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신호는 나오지 않는다. 러시아가 휴전을 원한다는 확신도 없다. 하지만 전문가 수준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꽤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하면서, '타임지'와 '이코노미스트지'와 같은 기사들의 등장은 휴전 지지자들의 주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 대통령실 고문/사진출처:페북
특히 전날(1일) 차기 대선 출마 희망을 피력한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전선 교착 상태 주장에 공감하면서 "러시아와 평화 협상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피력했다.
그의 '휴전 협상' 발언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2022년 봄, 러시아와의 협상 중단과 1991년 국경내의 영토 탈환을 선언한 뒤, 우크라이나 정치인(러시아 이민자 제외)으로는 처음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이 러시아와의 협상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전쟁의 조기 종식을 옹호하는 서방 세력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