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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 그분의 별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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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별>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오 2,2)
빛을 거슬러
어둠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어둠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그분의 별
어둠에 무릎 꿇지 않고
빛을 좇는 사람은
끝내 만날 수 있는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비추는
그분의 별
하늘을 가리고
땅을 움켜쥐려는 사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한걸음 밖에 있어
닿을 수 없는
그분의 별
땅을 딛고 서있되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은
끝내 품을 수 있는
기쁨과 희망 가득한
곁을 내어주는
그분의 별
바로 곁에 있어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있는 듯 없는
크지만 어렴풋한
그분의 별
아득히 멀리 있어도
보고파 하는 사람은
끝내 볼 수 있는
없는 듯 있는
작지만 또렷한
그분은 별
그분께서 오시니 오히려
그분을 지우려는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그분께 가는 길
이내 감추는
그분의 별
그분께서 오시니 기꺼이
그분을 맞으려는 사람은
끝내 찾을 수 있는
그분께 가는 길
밝히 드러내는
그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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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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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란 ‘나타남’ 혹은 나타내어 보여줌’ 등의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가 세 명의 동방박사(파스칼, 멜키오르, 발타사르)에 의해 자신이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으며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온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을 기념합니다.
이 축일은 전례상 성탄과 같은 대축일입니다.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유다 민족에게 당신의 강생을 보여주었으나 공현은 세상 끝까지 약속된 구세주이심을 보여줍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한 곳을 찾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림으로써 주님이 온 세상의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박사(magi)라는 칭호는 당시 페르시아와 칼데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 준 칭호입니다. 이들은 레위족과 같은 이방의 제사장 계급으로 왕과 주권자를 위해 꿈, 환상, 하늘의 징조 등을 해석하고 신의 계시 등을 다룬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였으며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별자리 중에서 왕을 상징하는 별은 사자자리의 일등성인 레귤러스(Regulus)와 목성입니다. 레귤러스는 왕의 별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유대 학자들에 의해 목성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별은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직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메시아시암을 고백하는 상징적인 예물을 바치게 됩니다.
황금은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를,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사용하는 방부제로서 매우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만 그 시체에 바르는 고가의 값비싼 물품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 처럼 발은 땅에 내딛는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눈은 하늘을 바라보며 천상적인 것, 영원한 것, 참된 진리로 향해 가는 세상의 구도자이며 순례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짙은 어둠에 속에서도 별만 바라보고 별의 인도로 마침내 주님을 찾아 경배한 것처럼 우리 또한 시련과 환난의 고통으로 인해 지금 당장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우리안에 감추어진 영원히 변치 않는 성령의 빛을 바라 보십시오. 그 성령의 빛은 우리가 일상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특히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받은 이들을 비천한 아기 예수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기 예수님을 대하듯 존경과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주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예물이며 주님 공현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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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1730년에 봉헌된 223개의 성체가 오늘날까지 하얗고 신선하게 남아 있다
이탈리아 -1730년
173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시에나(Siena)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제단에서 348개의 성체가 보관되어 있던 성합을 도난당하였다. 이 도난당한 성체는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성당의 헌금함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발견하고 감동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는 미사에서 다시 되찾은 이 성체를 성스러운 영성체 때에 신자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더럽혀진 이 성체에 대해 예수님께 속죄와 참회를 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수사들은 그 중 223개의 성체를 얼마 동안 보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성체에 대한 경배는 시간이 흘러도 끊일 줄을 몰랐다. 매우 놀랍게도 그 성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하얗고 깨끗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모든 물질은 변화한다는 자연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악한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성체만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을 모독하는 성체의 도둑질이 자행된 후 50년이 지난 1780년이 되었을 때였다. 보관되어 있었던 223개 의 성체가 시간이 지남으로해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법적인 조사가 행하여졌다. 1914년에 사람들은 이 성체를 유명한 화학자, 대학교수,예를 들면 피사대학교의 쥬세페 토니올로(Giuseppe Toniolo) , 시로 그리말디(Siro Grimaldi) 교수, 그리고 시에나(Siena) 의 대주교하에 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법정위원회에 넘겨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성직자로서 유일하게 참석했던 대주교는 학자들에게 다양한 화학적, 생물학적 검사를 하도록 성체를 주었다. 이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그 성체들은 실제로 산성화되지 않은 빵의 중요한 구성성분인 전분이 포함된 반죽으로 만들어 졌다.
2. 그 성체의 보관상태는 매우 양호하였다.
이 결과는 223개의 성체를 200년 이상 보관하였던, 성광의 유리로 된 캡슐이 전혀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욱 더 주목할 만한 것이다.
200년 이상이나 이 성체에 일어난 위대한 자연의 기적을 보고,유명한 화학자 시로 그리말디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후에 이 성체를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시에나(Siena)의 이 놀라운 성체기적에 관해 자주 언급하였다.(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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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의 별”(마태 2,2)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3-5)
오늘, 우리는 이 벅찬 기쁨으로 임을 만나러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을 찾는 여행은 ‘세 번의 길 떠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떠남>은 집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행이요, <두 번째 떠남>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 마구간에 이르는 여행이요, <세 번째 떠남>은 마구간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행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길을 떠나기 전에, 이미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그들을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별”(마태 2,2)을 본 이들이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여 집을 떠나, 그분을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첫 번째 길>을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길을 떠나왔습니다. 그분을 경배하러 말입니다. 예물도 정성껏 준비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수도원(성당)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 이곳은 아기 예수님이 계시는 누추한 마구간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계실법하게 여겨지는 화려한 예루살렘 쯤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집과 가족은 떠나왔지만, 여전히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로지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여전히 빛을 놓칠 때도 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방황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어둠이 찾아들면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고,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 저사람, 혹은 이곳저곳 자신을 기댈 곳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하니 말입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화려한 예루살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그 “진정한 빛”을 만나지는 못합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 와서 왕궁을 기웃거려보았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는 없었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이 수도원에서 그렇게 기웃거리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계실법한 수도원이라는 이 예루살렘의 왕궁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종교적으로 잘 꾸며진 왕궁인 수도원이 아니라, 이 수도원 어딘가에 있는 마구간으로 찾아 내려가야 합니다. 참 빛은 그곳 낮은 곳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낮은 곳, 형제들의 약함, 형제들의 가난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찾아나가는 데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빛이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말씀”을 찾아 만나고서야 왕궁을 떠나,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 안에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말씀이 우리 발의 등불, 우리 길의 빛”(시 119,105)인 까닭입니다.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복음 성경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당신 나라로 부르시는 그분을 뵈옵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21)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씀의 빛”을 따라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분명 우리는 <두 번째>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늘만 쳐다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비추는 땅 낮은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떠나야 합니다. 더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는 길’을 따라 누추한 마구간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 빛이 비추인 낮은 곳, 마구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땅에 내려놓고 경배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그것은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토록 낮아져야만, 비로소 성탄입니다. 낮아져야만 비로소 아기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탄생하십니다. 이렇게 낮아지고서야, 당신을 우리 안에 모시고 마침내 우리는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 아기 예수님과 함께 말입니다. 진정 그렇다면, 그 빛이 우리 안에서 주님의 공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자신이 밝히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께서 밝히실 것입니다. 이곳 우리들의 베들레헴의 마구간, 낮은 곳에서 밝히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번째> 길을 떠났는지요?
바로 이 <세 번째> 길 떠남이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가 떠나야 할 진정한 길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빛을 발하며 떠나는 길입니다. 참으로 벅찬 길입니다. 빛으로 가득한 기쁨이 벅차오르는 길입니다. 진정, 오늘 참 빛이 온 누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 빛 속을 걸으며 찬양노래를 부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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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드리는 귀한 예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구원자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알고, 참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구세주의 탄생은 커다란 기쁨인데 각자의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1.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한 동방의 박사들은 기뻐하면서 선물을 바치며 경배하였습니다. 2.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자신들이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사실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는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여 싹을 잘랐습니다. 권력의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권력다툼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 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여 부인 미리암, 장모 알렉산드라, 장남 안티파테르,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 사도에 의하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고, 욕심은 그나마 지금 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으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이교도들인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부름)은 온 인류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바친 예물은 인류가 메시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빛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들은 희망을 지니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합니다. 희생 봉사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거룩함과 성화의 사제직을 상징합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희생 봉사하는 삶으로 황금을,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 성화의 모습으로 몰약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유향을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은 어떤 희생과 고난도 감수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선물을 드리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 하나는 전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확신을 지녔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영생으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세례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여겨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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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에 걸쳐서 공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는 것과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하신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요?
1) 하느님의 자비로운 다스림
하느님의 나라란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과 같은 한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통치(다스림)가 온전히 실현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통치, 다스림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거부감을 갖습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무력과 억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통치는 세상 권력가들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주 자비로운 통치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예전에는 자비롭지 않으셨다가 갑자기 자비롭게 되셨다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이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도외시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돌보신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
(1) ‘변두리 인생’도 보살피시는 하느님
예수님이 보살피신 사람들의 부류에는 우선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이 있습니다. 당시 통념에 의하면 병자는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이고, 마귀 들린 이는 악마에게 잡혀 있는 사람이며, 나환자란 죽음의 맏아들에게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멸시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서 도외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서,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치유하고 고쳐주심으로써 다시 하느님 백성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편견도 제거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두고서 본인의 죄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병이 반드시 죄의 결과는 아니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필연적으로 죄의 결과로 간주하는 편견을 타파하십니다(요한 9,1-3 참조) 또한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와 여인들은 온전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던 유다인들의 관습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를 어른들의 본보기로 내세우십니다(마르 10,13-16 참조). 또한 사람취급도 못 받던 여인들이 당신을 따르도록 하시고, 남편이 아내를 소박할 수 있던 것을 금지함으로써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던 여자들을 옹호하십니다(루카 16,18 참조).
(2)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죄인을 가까이 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한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예수님은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 하시고(루카 19,1-10 참조),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2,13-17 참조). 또한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당신의 발을 향유로 닦아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카 7,36-50 참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아파 사람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셨습니다(요한 7,53-8,11 참조).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하신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함으로써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신앙에 근거해서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죄인들과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느님 곁에 단호하게 머물려고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하느님의 적대자들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경건한 이들에게 죄인들과의 접촉은 단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허용될 뿐입니다. 더구나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경건한 이들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식사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식사 참여자들 모두에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경건한 이들의 통념에 거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이것은 율법에 충실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사공동체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인상 깊은 사건으로 비추어졌고, 반대로 그의 비판자들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행동을 비유들을 통해서 정당화하는데, 그 비유들은 하느님 스스로 죄인들에게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 가까이 모여왔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투덜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이어서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과 잃었던 양의 비유가 뒤따릅니다(루카 15,1-31). 다른 비유들에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왕으로(마태 18,22-27), 빚을 탕감해주는 채권자로(루카 7,41-43),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심판자로(루카 18,9-14), 무한한 자비와 능가할 수 없이 큰 호의를 베푸는 포도원 주인으로(마태 20,1-15)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죄를 지어서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인간들을 찾아가시고, 죄인들에게 관대하게 용서를 베푸는 분으로 선포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 자신의 행동과 하느님의 행동이 상응한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 안에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실현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3)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산상수훈에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폭력적인 보복의 법칙에서 떠나고, 악을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요구,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마태 5,38-47)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5)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5.48)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요청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한다면,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완전성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분노 속에 멸하지 않다는 점이 속한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들 서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 하느님은 분명 복수의 하느님은 아닐 것입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게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따돌림 받는 이들은 물론 죄인들까지도 버리지 않고 당신 품에로 불러들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드러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날 수 있도록 가난한 이, 죄인들을 품어주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이 준비했던 황금, 유향, 몰약과 같은 것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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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의 뜻은 ’공적으로 드러났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났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 모두의 구원 즉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함임을 공적으로 드러낸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등장을 가운데 두고 두 부류의 세력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주님의 등장을 껄끄러워하는 세력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등장을 반기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부류입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림자도 크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짊어지고 가셨던 십자가 중 하나였습니다. 골고타에서의 십자가만이 십자가가 아니라 태어나면서 짊어지셨던 십자가 말입니다.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 시기하는 사람들, 죄로 빠뜨리려는 사람들, 이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십자가는 존재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다면 우리에게도 주님과 같은 길이 주어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사랑과 선행을 시기하고 질투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기도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드러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서서 걷고 계십니다.
티백
추운 겨울입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도 좋고
따뜻한 차 한잔도 좋습니다.
특히 간편히 즐길 수 있는 태백은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누가 만들었을까요? 티백….
참으로 고마운 사람입니다.
우려낸 차를
깊은 묵상을 통한 기도라고 한다면
티백 차는
순간순간 하느님께 집중하는 화살기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따뜻한 차 한잔의 행복과 같은
순간의 화살기도의 기쁨이
오늘 우리 하루에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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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에게는 꽤 많은 만년필이 있습니다. 총 27자루의 만년필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펜촉(닙)이 굳기 때문에,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해 많은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 나오지 않는 만년필이 한 자루씩 늘어갔습니다. 매일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조금씩 굳어서 나오지 않게 되는 만년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나오지 않는 만년필을 다시 잘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척하면 됩니다. ‘만년필 세척 도구’를 이용해서 세척하면 처음처럼 다시 잘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세척이 잘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미지근한 물에 하루 정도 담가두면, 그 안에 있던 잉크들이 흘러나오면서 막혔던 부분이 뚫리게 됩니다.
2023년을 보내면서, 가지고 있는 만년필 모두를 세척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잘 나오는 만년필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죄도 이렇지 않을까 싶더군요. 우리 안에도 죄의 찌꺼기가 계속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미사를 통해 소죄는 사해지지만, 죄들이 쌓이고 쌓여서 미사만으로 부족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봅니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깨끗해지자마자 또 곧바로 죄를 짓는 우리의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더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만년필의 잉크가 굳으면 하루 종일 물에 담가 두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오랫동안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 없이 주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아닌 죄에 찌들어 있다면, 불안함으로 인해 세상 안에서 기쁨의 삶도 살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이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주님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어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에 대한 어떤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동방의 별만을 보고서 먼 여행을 떠났던 동방 박사들의 노력을 우리는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그에 반해 헤로데는 동방 박사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닌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죄에 찌들어 있는 삶에 더 큰 죄를 더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그는 무죄한 아이들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더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 죄가 아닌 선을 따르는 삶,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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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성과 마음을 다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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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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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7. 주님 공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별을 바라보라!”
(Respice Stellam!)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순례 여정-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알렐루야-,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동에서 그의 별을 보고 주를 조배하러 왔도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은 복음전 화답송 후렴과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을 하루종일 노래기도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아버지의 집을 향해 평생 내적 순례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2024.1.7.일 주님 공현 대축일, 밤12시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여니 한 눈 가득 들어오는 흰눈 덮인 대지에 푸른밤 하늘에 선명히 빛나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었습니다. 요즘 잠깨면 맨먼저 찾는 북두칠성입니다. 별을 보고 시작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에 문득 떠오른 오래전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였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病)이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무려 26년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쓴 시입니다. 벌써 1988년 수도원 초창기 부임하여 1989년 종신서원에 사제품, 그리고 1990년부터 정주하여 오늘 35번째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에 강론을 쓰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당신이 상징하는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자 영원한 연인인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히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영혼의 하늘 안에 빛나는 수호천사의 별이, 주님의 별이, 희망의 별이, 진리의 별이 되어 살고 싶은 열망은 여전하며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아마도 주님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잘 보셔요. 내 영혼의 하늘 안에 언제나 영원히 빛나는 주님의 별, 수호천사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을!
“별을 바라보라!(Respice Stellam!)”
어제 월피정중 복음 나눔시 원장 수사로부터 우리 오틸리엔 선교 베네딕도 연합회의 예레미야 총 아빠스의 모토란 말을 듣고 참 반가웠고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이에다 부제로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순례 여정”을 덧붙였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복음은 허구라지만 함축된 진리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인간 누구나에 잠재해 있는 구도자의 원형(原型)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궁극의 진리이자 빛이자 길이자 희망이신 하느님을 찾는 영원한 구도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누구나 별을 찾는, 별을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작금의 대부분 현대인들처럼 주님의 별을, 희망의 별을, 진리의 별을 잊어버릴 때, 잃어버릴 때 방향의 길을 잃어 시작되는 불행이자 비극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복음 나눔시 제가 언급했던 요지의 내용입니다.
“아, 별을 잊어버린,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별이 상징하는바 희망이요 길이요 진리입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별이 아니라, 깨어 끊임없이 간절히 찾는 구도자에게 은총의 선물처럼 계시되는 주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찾아야지 결코 누가 찾아줄 수 없는 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희망의 순례 여정중 희망의 순례자이자 구도자에게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희망의, 진리의 별들이요 찾지 않으면 사라져 캄캄한 절망의 하늘이 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 하늘에는 무수한 희망의 별들이, 주님의 별들이, 진리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지요? 캄캄한 절망의 하늘은 아닌지요?
간절히 깨어 있는 영혼들에게 참 좋은 주님의 별, 희망의 별, 진리의 별은 가톨릭 교회이고 매일미사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별도 없을 것입니다. 또 함께 살아가는 참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도반들보다 더 좋은 별도 없을 것입니다. 한두개의 별이 아니라 저 마음 하늘에는 참 무수히 빛나는 주님의 별들입니다.
희망의 순례 여정중인 희망의 순례자이자 구도자에게 주님을 가리키는 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활짝 열린 구도의 순례 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별따라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찾았던 이들은 먼 이방의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신비가 환히 계시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단 가톨릭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온세대, 온인류에게 활짝 열려있는 구원의 순례 여정을 상징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는 주님의 별,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별이, 희망의 별이, 진리의 별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 박사들이야말로 영원한 구도자,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10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우리 각자 삶의 순례 여정은 죽어야 끝납니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순례 여정은 수년쯤 걸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아,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희망의 구도자요 순례자이자, 진리의 구도자요 순례자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구원은 평생 순례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 산전수전,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시련과 고난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을 고비도 도중하차할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막판에 한눈 팔다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 곤경에 처했지만 은총으로 별따라 베들레헴에 궁극의 목적지에 도착하니 참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묘사가 은혜롭습니다.
‘그리고 그 비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갔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행복합니다. 날마다의 미사전례를 통해 궁극의 목적지 도착을 앞당겨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전례중 여러분은 무슨 예물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알려드리겠습니다. 신망애(信望愛) 삶의 보물도 좋고 진선미(眞善美) 삶의 보물도 좋습니다. 있는대로 정성껏 봉헌하면 그 몇배로 더 축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성공적 순례 여정을 마치고 금의환향합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 순례여정은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시 평범한 일상에서 다시 시작된 내적 순례 여정이요 예전의 그들과는 판이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깊은 체험이 바탕이 됐기에 더욱 깊어졌을 내적 순례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이나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을 상징합니다. 제가 체험한바 평생 희망의 순례 여정중 주목하는바 네 공통적 요소입니다. 1.목적지, 2.이정표, 3.도반, 4,기도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목적지는 베들레헴이었고 이정표는 주님의 별, 그리고 도반들입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발타살, 카스발, 멜키올 세 도반의 동방박사들이요, 이들은 함께 하는 여정중 필시 기도도 바쳤을 것입니다.
제 산티아고 순례시 목적지는 산티아고 대성전이었고, 수백개의 이정표를 따라 갔으며, 두 도반이 있었고 때로 다양한 도반들도 함께 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에도 매일미사에 매일강론, 그리고 시간경도 도반들과 함께 바쳤습니다. 걸을 때는 묵주기도, 그리고 가장 많이 바쳤던 다음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힘차고 빨랐던 발걸음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 도반들은 희망의 이정표 역할도 했고 최상, 최고의 영원한 도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히 함께 계시는 주님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 이정표 따라 제대로 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으니 평생 도반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순례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더불어 수도형제들과의 제 수도순례여정은 죽어야 끝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도반인 수도형제들과 함께 하는 매일공동전례의 이정표 따라 죽어 주님의 집에 이를때까지 계속될 순례여정입니다.
참 좋은 수도 형제들은 도반들이 됨과 동시에 희망의 이정표 역할도 하니 성가정 수도공동생활의 축복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 수시로 확인하는 삶의 순례 여정중 시점(時點)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한 주님의 현역의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삶의 환상이나 허영,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던 내용입니다.
저로 말하면 늘 말하지만 하루로 하면 오후 4:30, 계절로 하면 초겨울 지금쯤 되어보이네요. 참으로 이런 자각이 깨어 환한 의식으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도반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며 하늘나라 천국의 영원한 선물 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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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240109 --------------------
김명겸요한 2024.01.07 09:36
주님 공현 대축일
별의 인도로 박사들은
동방에서 그 먼 길을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별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그 별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별을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범상치 않은 별을 보면서
위대한 존재가 태어났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위대한 존재는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서로 궁금해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 길을 왔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시기에
그들은 우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임금은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기에
왕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맞지 않았습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시기에
왕궁이 있는 유다 지역은 맞지만
큰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도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하필 그 작은 도시일까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성경을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왕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도 하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마태오복음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있었습니다.
임금으로 태어난 위대한 존재가
구유에 누워 있다니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찾던 그 아기가 맞는지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도시는 왕의 도시가 아닐지라도
아기가 있는 곳은
집이 아닌 마굿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의심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곧바로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이
별이 멈춘 곳에서 발견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별이 그들을
위대한 존재에게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멈춘 곳에서 발견한 아기가
비록 왕의 도시도 아니고
화려한 집도 아니지만
그 아기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려는 아기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별을 보내주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은 여러 계기를 통해서 바뀌기도 합니다.
좀 더 정확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어느 모습이 더 정확한지
우리 스스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는 별을 보내주십니다.
좀 더 확실한 모습을 찾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시는 별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찾아볼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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