往五 Silk Road 國傳(3) /
투루판의 고창고성(高昌故城, 가오창고성)과 교하고성(交河故城, 자오허고성)
*. 2,000년 전의 고청고성(高昌故城,가오창고성 )
천불동(千佛洞)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서 우리는 고창고성(古昌故城,가오창고성)을 향한다.
그런데 왜 옛 성이란 뜻의 '古城'(고성)이란 말을 버리고 사전에도 없는 '故城'(고성)이란 한자어를 썼을까?' 하였더니 현지에 도달하여 보니 지금은 무너진 옛 훼손된 성벽만 남은 성터뿐이기 때문이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오창고성(高昌故城)과 더불어 서쪽 55km의 거리에 있는 교하고성(交河故城, 자허고성)은 하나의 물길이 만들어 낸 자매 같은 도시다.
'高昌(고창)'이란 지명은 ‘지면(地面)의 생김새가 해발 152m로 높고, 백성이 무럭무럭 잘 되어가라고 인하여 이름을 고창이라 하였다.(地勢高敞,人庶昌盛,因名高昌)’ 한다.
이 성은 외성(外城), 내성(內城), 궁성(宮城)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동서 1.4km, 남북 1.5km의 불규칙적인 바른네모꼴로 세운 성이다.
그 두께가 12m, 성벽의 높이가 11.5m요, 주위 둘레가 3.0km나 되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의 40배 정도의 크기로 실크로드의 유적 중에서 가장 크다.
이 고창고성(高昌故城, 가오창고성)은 499년 한인(漢人) 국문태(麴文泰)가 고창국(高昌國)을 세웠을 때의 성터이다. 이 성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인구 8만 명에 승려만도 8,000명이나 살았다는 곳인데 1295년에 원(元)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슬람 모스크가 서 있는 정문에서 당나귀가 끄는 12인승 마차를 이용하여 성터까지 간다. 여봐란 듯이 마차 운전 자격증을 걸어놓은 마차였다.
가는 도중 앞선 암 당나귀가 오줌을 싸며 가자 그 냄새를 맡고 흥분한 수말의 표정은 우리들의 흥을 한결 돋아 주고 있었다.
고창성(高昌城,가오창) 입구에는 많은 상점과 양고기나 양 꼬치(2~3위엔) 등 음식물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고, 전통 옷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는 의류 가게도 있었다.
나는 막 돌을 지낸 손녀와 5살 먹은 우리 손자에게 줄 이곳의 민속 옷과 양가죽 조끼를 30위엔(4천원)을 주고 샀다.
이 성(城)에서 특히 유명한 곳은 현장 법사 이야기가 어린 외성 서쪽사원(寺院)이다.
옛날 서안(西安)에 갔을 때 둘러보던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을 지은 삼장법사 현장이 의형제를 맺은 불심이 깊던 국왕 국문태의 간청으로 1개월 간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였다는 사원인데, 지금은 위구르 여인들이 전통 복장에 예쁜 화장을 하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 주며 5위엔을 탐하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현장은 인도의 불경을 가져와 번역한 중국 최대의 번역승(飜譯僧)으로 역경삼장(譯經三藏)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한 마디로 현장은 인도어와 그 글자에 능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 현장 스님의 향운(香雲)이 맴도는 사원에 원형으로 뻥 뚫린 하늘에 파란 하늘이 흐르고 있었다.
*. 교하고성(交河故城,자오허고성)
전한(前漢) 시대 車師王(차사왕)의 왕국이었다는 이 교하고성(交河故城, 자오허고성)을 공중에서 보면 항공모함 같이 생겼다. 우리나라 여의도(汝矣島)처럼 강이 동서로 흐르는 두 갈래 강이 성을 에워싸고 흐르다가 남문 밑에서 하나로 합치듯이 된 형국이다.
그래서 성 이름을 '交河'(교하)라 한 것이다.
그 야루나이제 강 가운데의 30여m 높은 수직 절벽 분지에 폭 300m, 길이 1,650m로 벼랑 위에 성이 바로 교하고성(交河故城, 자허고성)이다.
투루판에서 10km 서북에 광활한 하나의 커다란 평원석 같은 이 섬은 사방이 30여 m의 낭떨어지로 어떠한 적도 접근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要塞)였다. 그래서 이곳 성내에 가도(街道)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이곳 건축 중에 특이 한 것은 자연적 지면을 아래로 파서 건물을 지은 것으로 이는 건축사에 남을 특이한 일이었다.
고창고성보다 더 멋진 그래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의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이 교하고성에 와서 보니, 볼 것과 사진으로 남길 것이 너무나 많아서 그 욕심을 내다 보니 나는 그만 우리 일행을 잃은 미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가 흉노족에게 200명의 어린이들이 죽었다는 '영아무덤' 위 전망대였다.
길은 중앙 관청가의 큰 길을 중심으로 미로 같은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남부의 관아와 민가, 북쪽에 궁전과 불교사원 대불사(大佛寺), 서북불사(西北佛寺), 동북소사(東北小寺)와 동남서 삼면에 각 문(門)들을 뛰어 다녀 보아도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찾기를 포기하고 되돌아 입구를 향하고 있는데 조선족 가이드가 찌푸린 얼굴로 반색을 한다.
내가 우리 일행을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전망대서부터 일행을 찾고 있을 바로 그때에 우리들 일행은 교하고성에서는 가장 멋있게 지었다는 땅속의 '지궁(地宮) '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함께 여행 온 우리 일행 14명 중에서 최고의 연장자인 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30분 이상 나를 찾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동안 관광을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경우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한 턱을 떠억- 내면 미안이나 무안이 좀 풀리련만 고국에서 떠나올 때부터 나의 주머니는 빈 털털이니 어쩌랴. 이곳에서는 카드가 통하지도 않는데-.
떠나 오기 전에 고가의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맡겼더니 수리비가 30만원이라 해서 그 갑에 해당하는소형 카메라를 무리해서 샀는데 그걸 보름만에 술 마시고 오다가 잃었다. 그리고 또 다시 샀으니 주머니가 아프지 않겠는가.
폐허가 되어버린 고성과 달리 그 강기슭은 초목이 우거진 오아시스로 주위의 사막과 어울려서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기원 전 2 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리다가 당나라에 의하여 640년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서역 방어의 거점으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였던 곳이 이곳이다.
뜻있는 이곳 사람들도 어즈버 태평연월을 한탄하고 있었다.
'大自然選擇了校河, 交河也沒有辜負歷史(대자연선태료교하,교하야 몰유고부역사)' 대자연이 선택하여 준 교하인데, 교하는 헛되이 역사 속에 사라졌구나.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는다더니, 그러나 세월이 갔어도 남은 것이 있다. 우리의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시절 이 안서도호부에서 활약하던 고선지(高仙芝)장군이 있었는데, 당나라 3대 시인의 하나인 두보(杜甫)가 그의 전공을 노래한 '高都護驄馬行'(고도호총마행)이란 한시가 전하여 온다.
安西都護胡靑驄/聲價欻然來向東/此馬臨陣久無敵/與人一心成大功/
功成惠養隨所致/飄飄遠自流沙至/雄姿未受伏櫪恩/猛氣猶思戰場利/
腕促蹄高如蹄鐵/交河幾蹴層氷裂/五花散作雲滿身/萬里方看汗流血/
安壯兒不敢騎/走過掣電傾城知/靑絲絡頭爲君老/何由卻出橫門道 자세히 읽어보면 '交河幾蹴層氷裂(交河에서 몇 번이나 얼음을 밟아 깨었으랴) 라는 시구가 있다.
(高昌故城, 가오창고성)이나 교하고성(交河故城,자허고성)은 둘 다 흙으로만 이루어진 수 천 년 전의 성이다. 만약 지구의 이상기온이 있어 여기에도 우리나라 같이 단 1년만이라도 장마가 있고 태풍이 불어온다면 '고성(故城)'이란 이름마저 다 살아 저버리고 말 순 흙으로 쌓은 고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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