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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아트 Minimal Art>라는 논문에서 리처
드 볼하임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한 유명한 글에서 말라르메는 시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백지를 마주하지만 단 한단어도 생각나지 않는 불모의 느낌, 혹은 공포를 시인의 경험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왜 말라르메는 한참 뒤에,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시를 쓰려고 준비한 백지 자체를 자신이 쓴 시라고 말할 수 없었을까? 덧붙여 말하지만, 사실 백지 이상으로 시인의 내적인 불모와 황폐의 느낌을 더 정직하게 드러내고 더 잘 표현하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
백지 자체를 시로 확인해줄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구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는 이런 방식의 시
(즉 백지로서의 시)를 산출할 수 없었다는 것이 볼
하임의 주장이다. 당시로서는 백지가 말라르메의
시로서 기능할 수 없었고, 그 자체로 예술작품일
수 없었다는 볼하임의 주장을 과연 옳은가? -
R.M.M.
*
「Minimal Art」라는 논문에서 Wollheim이
한 얘기를 살펴보자.
"백지를 마주하지만 단 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
는 불모의 느낌, 혹은 공포를 시인의 경험으로
얘기하고 있다”,
“백지 이상으로 시인의 내적인 불모와 황폐의
느낌을 더 정직하게 드러내고 더 잘 표현하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 라는 대목에
서 Wollheim은 예술을 ‘인간의 주관적 감정표
현의 매개체‘ 정도로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 있
을 것이다.
이는 본질주의 내의 표현주의의 예술가 감정론
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동시에 그는 “백지 자체를 시로 확인해줄 수 있
는 기반이 되는 구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라며 백지는 말라르메의 시로서 기능할 수 없
고, 그 자체로 예술작품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다.
이 말에서 ‘시’를 '예술작품'이란 상위개념으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치환한 문장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백지 자체
를 예술작품으로 확인해줄 수 있는 기반이 있는
가?” 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시인가?' 가 아닌 ‘이것이 예술인가?”의
차원으로 넘어와서 생각해보자
만일 말라르메가 고민했던 그 백지를 <창작의
내적 황폐화 : 패러독스>라는 등의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 전시하게 된다면?
이러한 모든 환경과 과정들이 예술제도론으로
알려져 있는 디키가 내놓은 다섯 가지의 제도론
적, 순환론적 정의에 부합하게 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는 뒤샹의 〈부러진 팔 앞에서>와 같은
ready-made 예술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레디메이드 예술 〈부러진 팔 앞에서〉를 예술
로 판정한다고 해서 어딘가 허름한 창고에 방치
된 눈삽이 예술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듯, 말라
르메의 백지가 예술로 판정된다고 해서 내 프린
터기 안에 있는 백지가 예술로 판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뒤샹의 <부러진 팔 앞에서>를 예술작품으로 확
인시켜주는 기술은 그 전시 행위 속에 내포된
조롱의 제스처로서의 속성이나, <부러진 팔 앞
에서>라는 제목에 의해 눈삽에 부여되는 의미
나, 이런 전시가 불러올 관람객의 반응 등속과
관계되는 기술이다.
그러면 말라르메의 백지를 예술작품으로 확인
시켜주는 기술로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것들과 공통되는 요소들도 있을 것
이고, 그 외에도 수 많은 요소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글 초에서 말했듯 본질주의 내의 표현주의의 예
술가 감정론에 따라 백지를 마주한 시인의 감
정, 경험등을 공중에게 전달 할 수 있는가? 가
중요할테다.
볼하임의 주장을 다시 보자
“백지가 말라르메의 시로서 기능할 수 없었고,
그 자체로 예술작품일 수 없었다”
시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는 것은 예술작품이라
는 상위개념으로 차원을 낮추어 생각한다 했을
때
중요하게 볼 것은 그 자체'라는 단어이다.
<부러진 팔 앞에서>에서는 제목에 의해 부여되
는 의미가 있을 수 있듯이, 내가 예로서 붙힌 〈
창작의 내적 황폐화 : 패러독스> 이런 제목을
통해 공중은 백지를 보고서 의미를 추가적으로
부여한다던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라는 개념의 범주를 아주 좁게
설정해서 본다면, 백지는 본질적으로 그저 실
재하는 가공된 펄프 섬유 쪼가리에 불과하며 이
는 기성품,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말라르메는 주장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체'의 개념을 조금 더 느슨하게 적용한다
면, 말라르메가 백지를 준비하려던 과정, 백지
를 앞에서 두고 고심하며 남겨지게 되는 흔적
들, 만일 무언가 끄적이고 지웠다면 그에 따른
자국 들이 이 ‘백지'로 하여금 고유하게 만들고,
예술작품으로서 제목이 붙혀졌을 때 제목까지
도그 자체'라는 범주로 포함시킬 시 충분히 창
작의 고통을 겪던 말라르메의 감정이 공중에게
전해질 여지가 있다.
이 경우 볼하임이 생각하는 예술작품의 정의에
도 부합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차원을 높혀서 예술작품이 아닌 시로 차원
을 높여 생각하면
또 다른 논의가 제기된다.
시의 사전적 정의는 “정서와 사상을 운율적이
고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
“자신의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
에서 느낀 감동 및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즉 "공백은 언어가 될 수 있는가?”가 또 다른 생
각 해볼 점으로 떠오른다.
앞선 예술작품인가? 에 대한 논의에서 예술작품으로 판정 되었다는 전제하에
공백이 언어가 될 수 있다면, 시로서 기능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공백이 언어가 될 수 없다면, 시로서 기능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