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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열형
소나 말 등의 힘을 이용해 사지를 찢는 형벌이다. 워낙 잔혹한 형벌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시행된 것이 아니라 대역죄인이나 패륜범죄자 등 죄질이 특히 나쁜 일부 죄수에게만 제한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죽을 시 오체분시라고 칭한다.
곤형(棍刑)
중국에서 작은 막대기를 입이나 항문으로 밀어넣는 형벌. 막대기가 다 들어가기도 전에 내장이 터져 죽게된다고 한다. 김용의 소설 '협객행'에서도 나온다.
교수척장분지형(Hanged, drawn and quartered)
잉글랜드에서 국가반역죄에 준하는 중죄를 지은 죄수들에게 사용했던 형벌. 스코틀랜드의 독립영웅 윌리엄 월레스가 이 형벌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죄수의 목을 최대한 대충 매달아 놓고 죄수의 배를 산 채로 갈라 내장을 모두 꺼내어 밑에 있는 모닥불에 던져 넣어 구워 버린다. 이렇게 하면 죄수가 자신의 내장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이후 내장을 다 파내면 죄수가 살아 있던 죽어 있던 간에 죄수의 사지를 도끼로 토막내 버린다.
구오형(俱五刑)
중국에서 머리, 팔, 다리와 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는 형벌. 통상적으로는 죽은 시체에 가하지만 산 사람한테 하는 경우도 있다. 한 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후는 고조가 죽은 후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을 잡아 팔과 다리를 자르고 혀와 귀를 베어 내고 눈알을 파낸 후 돼지 우리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내장 꺼내기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거나, 대장을 시작으로 다른 장들까지 모조리 뽑아내는 방법이 있다. 전근대의 중국은 물론 중세 유럽에서도 쓰였다.
능지형
몸의 살을 한점씩 회를 뜨는 방법으로 집행하는 잔혹한 형벌. 죄의 무게에 따라 칼질 횟수에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단두대
목만 내놓는 형태의 형틀에 죄인을 묶어둔 채로 죄인의 목 위로 무거운 칼날을 떨어뜨려 죄인의 머리를 잘라내는 방식. 기계적 장치를 이용해 참수형을 발전시킨 형식으로 프랑스에서 마지막까지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한 방법. 현재 프랑스는 사형 폐지 국가다. 그나마 가장 자비로운 사형 방식인데 애초에 단두대를 만든 취지가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대나무 죽순형
중국과 일본에서 했던 대나무 위에 죄수를 묶어놓는 형벌. 결국 죄수는 자라는 대나무에 찔려 죽게 된다.
마차텔로
이탈리아의 교황령에서 사용되었던 형벌. 망치를 이용하여 죄수의 머리를 매우 세게 내려쳐 집행하지만 망치의 살상력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탓에 몇번이고 내려쳐서 머리가 찌그러진 상태로 고통스럽게 살아 있는 사형수가 많았다고 하며 칼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이 사형방법이 자세히 묘사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사형 집행 방법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향후 있을 백작의 복수극에 관한 복선을 까는 부분이다.
사약
자결 명령을 내리는 형벌. 기본적으로는 명령과 동시에 독약을 하사해준다. 자결 명령이기 때문에 약발이 잘 들어(...) 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거나 본인이 직접 원하는 경우 다른 방식으로 죽어도 상관이 없었다.
수레바퀴형
사형수의 사지를 벌린 상태에서 고문 바퀴에 묶는 방법. 원래는 그대로 죽게 방치해 놓는 일이 많았으나 후에 발전해 약간의 변형으로 장대 위에 올려놓기, 물레방아와 결합, 물고문, 불고문으로 바뀌었으며 수레바퀴를 굴려 사형수의 사지를 짓누르고 바퀴에 묶어놓고 몸을 늘려 놓은 뒤 둔기로 내려치는 등 국가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죄가 가벼우면 바로 집행하지만 중죄라면 고통스럽게 씹고 뜯고 맛보는 등 근대로 갈수록 잔혹성이 심해지는 형벌 중 하나이다.
스카피즘[4]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극히 잔인한 사형법. 꿀과 우유를 미친듯이 먹인 뒤 몸에도 같은 것을 칠하고 호수 또는 늪에 띄운 배 위에 방치한다.[5][6] 배불리 먹이고 호수에 간다는 점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우유와 꿀을 배부른 정도가 아니라 배가 터질 기세로 엄청나게 많이 먹여서 괴로운 건 기본이고 몸에 발라 놓은 꿀과 우유로 인해 벌레떼가 꼬여 사형수를 물어뜯는다. 시간이 좀 지나면 우유와 꿀로 인해 설사를 하거나 구토를 하며 시체와 비슷한 썩은 우유와 꿀 냄새가 나서 더더욱 많은 벌레들이 꼬이고 그 중엔 물론 사형수의 몸에 알을 까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들이 성충이 될 때까지 뭘 먹고 살지는 뻔하다. 설사와 구토로 엄청난 양의 수분이 사라지는 것은 덤. 탈수와 기아에 시달리며 벌레들에게 갉아먹히며 천천히 죽어가는 잔혹한 처형법이다. 벌레를 씹어먹으며 더 살수는 있겠지만 실수로 독충이라도 먹었다면 뭐... 참고로 이 처형법이 폐지된 이유는 잔혹해서가 아니라 돈이 많이 들어서다. 고대 시대에 꿀과 우유는 어디서든지 품질이 문제가 아니라 구하는 것도 힘든 고급 식재료였다. 지금이야 농업의 발달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니까 흔해진 것이지, 고대에는 대량 생산이 안 되니 페르시아 제국 같은 강대국에서도 귀했는데 그걸 배 터지도록 먹여야 하니 일벌백계 효과를 감안해도 한 명을 처형하는 데 너무 큰돈이 들었고 죽는 기간도 너무 기니[7] 결국 사장되었다. 꿀과 우유 대신 고대에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썩은 음식과 오물 등을 먹이면 어차피 토하고 부패하는 것은 똑같은데다, 더 큰 수치심과 고통을 줄 수 있고 비용까지 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불명. 스카피즘이 시행되었다는 페르시아에는 이러한 처형이 시행되었다는 1차 사료가 전무하고 이를 처음 언급한 사료의 출처가 고대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과장된 서술법과 신뢰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악명이 자자한 그리스 역사가 크테시아스라는 점 때문에[8] 실존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식형
사자, 호랑이, 곰, 거대한 뱀, 악어 등의 맹수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사형법이다. 특히 뱀은 신체적인 구조상 먹이를 먹을 때 통째로 깔끔하게 삼켜 버리기 때문에 사형수의 사체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성서 중 다니엘서에서 나올 만큼 유서 깊은 사형 방식이며[9] 로마 제국에서는 이 형벌을 자주 사용했는데('Damnatio ad bestias'라고 불렀다) 주로 사자나 표범의 밥으로 던져 주었다. 주로 초창기 로마 제국에서 탄압했다던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이 방식으로 처형했으며 로마 제국을 다룬 창작물에서 많이 나온다.(관련 그림) 비슷하지만 다른 걸로 영국에서 행해진 쥐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쥐에게 잡아먹히는 건 아니고 쥐를 몸에 올려놓고 온도를 올리는 것이다. 쥐는 온도가 올라가면 땅을 파 숨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쥐의 발톱이 살갖을 찢고 내장을 후벼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게 된다.
신체관통형
땅에 두꺼운 말뚝을 세우고 사형수를 이 말뚝으로 관통시키는 방식. 사형수 본인의 몸무게로 인해 서서히 말뚝에 꿰뚫리다가 장기를 관통하는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는데 몸이 관통되어 죽기까지 평균 이틀 정도 걸릴 만큼 잔혹한 사형이다. 블라드 3세[10], 이반 4세가 이 방식을 자주 사용했고 다리우스 3세가 바빌론을 점령했을때 포로 3천 명을 관통형에 처하기도 했다.
생리박피형
전신의 피부를 벗겨 죽이는 잔혹한 형벌. 기원전 6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캄비세스 2세는 부패한 법관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일반 범죄보다 더욱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그 예로 당시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렸던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을 체포해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처형했으며 그 아들 오이네스를 재판관으로 앉힌 뒤 시삼네스의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서 업무를 보게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사형수의 양면고(兩面鼓)를 만들어 관청에 걸어놓았다.
생매장
살아 있는 채로 땅에 묻는 형벌. 시황제와 항우가 자주 행했는데 특히 시황제는 분서갱유로 중국에서 폭군의 대명사 중 한 명이 되었다. 현대에는 공구리와 더불어서 조직폭력배들이 자주 사용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아페가
기원전 207년 스파르타의 폭군 나비스가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본떠 만든 처형도구 아페가를 이용한 형벌. 사람과 매우 유사한 머리를 가졌고, 옷 안에는 가시들이 박혀 있다. 스프링을 이용하여 팔을 최대한 벌려놓은 상태로 고정해놓고, 처형수가 가까이 오면 등에 달린 구멍을 막대기로 찔러 고정을 푼다. 그렇게 되면 그대로 끌어안아 상대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나비스가 초청한 재력가들이 처형 대상이었는데 국가를 위해서 돈을 기증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시 술을 먹인 뒤 자신의 아내 아페가를 소개해 준답시고 사형장으로 안내한 뒤 처형했다고 한다.[11] 아이언 메이든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데 아이언 메이든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형
감옥에 가둔 뒤 물과 음식을 일절 제공하지 않고 굶겨 죽이는[12] 형벌. 대표적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가두어져 죽을 때까지 집행받았다.
압사형(壓死刑)
무거운 것으로 눌러 죽이는 형벌. 국가마다 짓누르는 물건이 조금씩 달랐지만 주로 큰 바윗덩어리를 썼다.
코끼리로 으깨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약 4000년 동안 행해진 형벌. 주로 아시아코끼리가 공개 처형장에서 사형수를 으깨고 사지를 뜯어내는 데 사용되었다. 사형 집행에 사용된 코끼리는 철저하게 훈련되었기 때문에 조련사의 의도대로 죄수의 목숨을 즉시 끊거나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도록 천천히 집행될 수도 있었다.
요참형
죄인의 허리(腰)를 베어(斬) 죽이는 형벌. 보통은 중추신경계인 척수가 두 동강이 나기 때문에 즉사했다고 하지만 죄인의 허리를 베고도 잠시동안 살아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사마천이 이 형벌과 궁형 중 궁형을 택하고 목숨을 건진 뒤[13] 인류 역사서 불굴의 명저를 완성해 냈다.
용골쓸기
죄인을 밧줄에 매달아 바다에 던진 뒤 선체에 밀착시키고 용골을 넘어서 반대쪽에서 끌어올리는 형벌. 말로만 들으면 그냥 물에 넣었다 빼기만 하는 평범한 물고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 속에 빠뜨렸으니 숨을 쉬지 못 하는 질식의 고통은 기본이고 그와 더불어서 배 밑에 붙은 따개비로 인해 온 몸의 살점이 찢겨나가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며, 설령 익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출혈과 감염, 혹은 죄인이 아직 물 속에 있는 사이에 피냄새를 맡고 찾아온 상어의 공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는 죄의 무게에 따라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번 반복하거나, 선수부터 선미까지 끌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형벌을 당하면 당시의 선상 의료 수준을 생각해 볼 때 사실상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익수형
바다나 강에 빠뜨려 익사하게 하는 형법. 특히 사적인 형벌 방법으로 상당히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단순하게 팔다리를 묶고[14] 묶은 물건과 분리되지 않도록 마대에 담아서 강이나 호수 등의 물에 집어넣기도 하고 의자나 목책 등에 묶어서 물에 담가 고문을 하거나 죽이는 방식. 몸을 묶고 배의 널빤지에서 배 바깥으로 걸어나가 바다로 스스로 뛰어들게 하는 해적들의 전통적인 처형 방식도 이런 방식의 일종이다. 1960~1990년대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한창 독재자들이 창궐했을 때 각 독재자들은 수많은 정치범들을 헬기에 실어다가 마대에 담아[15] 대서양에 던져 버렸다.
인간 대포
사형수를 큰 대포 앞에 묶어놓고 그대로 발포하는 형벌. 사형수는 대포알과 함께 날아가 바닥에 머리가 으깨지거나 전신의 뼈가 모두 골절되는 등 아주 처참한 몰골로 죽어간다.
증형(蒸刑)
사람을 솥에 넣고 쪄 죽이는 형벌. 단, 실제로는 사람을 솥에 넣은 후 불을 지피지 않고 바로 꺼냈다. 그러나 이 형을 당한 사람의 가족은 실제로 상복 차림을 했어야 했고 피형자[17]는 죽은 사람 취급 받는다.[18]
질식형
피집행자를 질식사시키는 형벌. 테러리스트 등이 흔히 사용하는 머리에 비닐봉지 등을 씌워 인질을 질식사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19] 과거에 한국에서는 도모지라고 해서 물에 적신 종이를 얼굴에 겹쳐 발라서 숨을 못 쉬게 하는 방식의 형벌도[20] 있었다. 몽골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을 사형수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여겨서 사형수에게 가죽을 씌운 뒤 질식시키는 방법을 썼다고 전해지는데[21] 칭기즈 칸의 라이벌 중 한 명인 자무카가 이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추락
절벽 같은 높은 곳에서 사형수를 던지거나 떨어뜨려 추락사시키는 형벌. 고대에는 산이나 협곡의 절벽에서 집행하였다. 근대로 갈수록 맨땅으로 떨어뜨려 죽이는 것보다 바다나 호수에 던져 익사하게 하는 익수형으로 변형되었다.
책형
본래 의미는 죄인의 신체를 심하게 훼손해서[22] 그 시신을 대중에 공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단의 십자가형도 책형의 한 종류로 간주할 수 있다. 단, 일본에서는 책형이라고 하면 기둥 형태의 처형대에 묶어놓은 죄인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의미한다.[23]
톱질형
서양에서는 칼리굴라가 시행했고 동양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역자에게 행했던 처형인데 방식은 다르다. 칼리굴라는 거꾸로 매달은 다음 사타구니를 벌려 수직으로 톱으로 잘라 두개골까지 쭉 내리는 식이었고[2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방식은 피집행자를 목만 남겨서 묻고 톱을 하나 옆에 놔 둔 후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 번씩 썰고 가도록 시킨다.[26]
팔라리스의 황소
기원전 6세기 시칠리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처형도구 팔라리스의 황소를 이용한 형벌. 놋쇠로 만든 황소에 사람을 가두고 아래에 불을 질러 천천히 사람을 익혀 죽이는데 처형을 시작하면 안에 들어간 사람이 산 채로 구워지면서 내는 비명소리가 정밀히 설계된 소 입부분과 연결된 금관을 울려 마치 황소가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방법이 방법인 만큼 피형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처형법이었겠지만 실존 여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피의 독수리
바이킹들이 시전한 매우 잔인한 형벌. 우선 등가죽을 잘라낸 다음 그 위에 소금을 뿌린다. 이후 척추에서 갈비뼈를 하나하나씩 뜯어낸 다음 허파를 뜯어내 독수리의 형상을 만든다. 이때 사형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야 전사들의 낙원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말도 안 되니 그냥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뜻으로 풀이되곤 한다. 이런 형벌을 받을 정도면 죄인의 죄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무겁거나 집행측의 증오가 극에 달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물론 실존여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팽형
죄수를 뜨거운 물이나 기름에 삶아 죽이는 매우 잔혹한 형벌. 중국을 비롯하여 외국에서는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빈 솥에 삶아 죽이는 시늉만 하고 다시 꺼낸 뒤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종의 명예형으로 변형되었다는 구전이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방식의 형벌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화살형
죄인에게 화살을 쏘아서 죽이는 형벌.
화형
불에 죄수를 산 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 중세 유럽에서 마녀로 몰렸던 여자들이 이 방법으로 많이 죽었다. 잔 다르크 역시 이 방법으로 처형당했고, 한국사에서도 신라 눌지 마립간 때 볼모로 보낸 미사흔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국으로 보낸 박제상도 이 방법으로 처해졌다. 인간이 느끼는 최악의 고통 1순위가 불에 타는 고통인 만큼 그 어떤 사형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사람을 불로 심판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 권능이라는 교리가 있기 때문에 화형을 집행할 수 없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무아트 알 카사스베 중위 분살 당시 이슬람권이 분노한 이유도 그것이다.
할복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갈라고 시킨다. 말은 자살이지만 사실상 사형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사약과 비슷한 명예로운 사형에 가깝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진짜로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단도나 와키자시 대신 부채를 주고 스스로 배를 가르는 시늉만 한 뒤 목을 베던지, 아니면 그조차 없이 그냥 참수형으로 집행한 뒤 상부에는 할복했다고 보고하는 식으로 때웠다. 물론 진짜 단도로 자신의 배를 가른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19세기 말레이시아에서는 사람을 버팔로 가죽으로 꿰맨 후 그것을 불타는 태양에 노출시켜 가죽을 수축시켜 사람을 눌러 죽이는 처형 방식이 있었다고 한다. 질식은 기본에 화상, 압축 속에서 장기간 동안 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매우 가학적인 처형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도 처형할 사람에게 들소와 양의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꿰맨 후 태양 아래 노출시키는 처형 방식이 있었다.
19세기 페르시아에서는 죄수들을 소석고[27]를 가득 채운 통에 빠뜨려 죽이는 형벌(Gatching)이 있었다. 소석고는 굉장히 빨리 굳는 성질이 있어 소석고 통에 빠진 죄수는 온 몸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끔찍하게 질식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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