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지은지 벌써 몇년이나 됐는데 왜 아직도 어린 선수가 안 나와?>
이런 의견을 보면 저는 좀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그런 의견을 말하는 팬에게 화가 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상황'이 그렇다는겁니다.
2009년, 그러니까 우리 암흑기 초창기죠
그때 "구단에서 지원 잘 해줬고 좋은 선수도 많이 왔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감독이 다 망쳤다"
이런 의견이 참 많았습니다.
류현진 데뷔 / 구대성 복귀 / FA김민재...이런 호재가 있었는데 팀이 약해지므로 감독이 무능하다는 논리였죠.
그런데 사실, 그 시절 한화만 팀 전력이 강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롯데는 장원준 강민호가 데뷔하고, FA 정수근 이상목 홍성흔 영입했는데, 해외파 송승준이 돌아왔죠
삼성은 오승환 최형우 데뷔했고 (몇년 전이지만) FA 박진만 심정수 데려왔고, 채태인 복귀했습니다
엘지는 박명환 이진영 정성훈 영입하고 해외에서 봉중근이 돌아왔으며
기아는 윤석민 양현종 데뷔, 서재응 최희섭이 리턴했습니다
두산은 김현수 이용찬 임태훈 데뷔하고 김선우 돌아왔어요
SK도 김광현 최정 데뷔했는데 김재현 데려왔고요
그래서 2009년에 제가 그런 글을 썼습니다
"요즘 우리 투자 좀 했지만, 다른 구단과 비교하면 잘한게 없다"
"앞으로도 계속 다른 구단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격차 절대 안뒤집어진다"
뭐 그런 글이요.
그때는 우리에게 서산이 아직 없던 시절인데
삼성 2군구장 경산이 아시아 최대규모로 유명했고 (진짜 그랬는지 팩트체크는 필요)
LG 롯데 두산은 2군이 겨울마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연수 또는 교육리그를 떠났죠
말하자면, 우리만 전력을 보강한게 아니라 남들도 그만큼 다 보강했고
애초에 우리가 안하던 투자를 남들은 이미 5~10년 전부터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게 2009년 얘기니까 11년이 지났는데요
그동안 우리도 나름 애는 썼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서산 만들고, 이용규-정근우-정우람-권혁 데려왔죠
가성비가 괜찮았는지는 좀 따져봐야겠지만 배영수 송은범 송신영도 데려왔고
우리 퓨쳐스 선수들도 이제 매년 해외에서 운동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제가 위에 언급한 저 글을 썼던 2009년 이후
최근까지 다른 팀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2012 : KIA 2군 연습장 확장 이전
2012 : 삼성 2군 해외 전지훈련 시작
2012 : 한화이글스 2군 전용구장 완공
2013 : 삼성 / 넥센 / SK / KIA 2군 해외 전지훈련 시작
2014 : 두산 2군 연습장 2차 업그레이드 (1983년 완공 -> 2005년 리모델링 -> 2014년 2차 리모델링)
2014 : LG 2군 연습장 업그레이드
2014 : 삼성 BB아크 (3군 전용 시절) 오픈
2015 : 롯데 2군 연습장 업그레이드
2015 : KIA 2군 연습장 리모델링
2016 : KIA 2군 재활센터 완공
2016 : 롯데 2군 연습장 업그레이드
2018 : 한화이글스 서산구장 업그레이드
우리가 뒤늦게 시작한 일을
다른 구단들은 이미 그것 이후의 것들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버전1을 오픈했는데 남들은 이미 버전2를 상용화하고 버전3을 개발중인거죠.
참고로 2014년에 두산 베어스파크 2차 리모델링 사업비가 550억원이었다고 합니다.
삼성트레이닝센터에만 있던 수중치료기를 도입했는데 두산이 새로 도입한 치료기가 STC보다 컸다네요.
1983년에 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2군 구장을 만든 두산(당시 OB)는
한화 첫 2군구장 투자액보다 더 많은 돈으로 시설을 키우고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재활치료기도 도입한겁니다.
우리도 (남들보다 늦게) 2차 업그레이드 했는데
이 추세대로라면 다른팀 3차, 4차 업그레이드 역시 우리보다 4~5년 빠르겠죠.
1군 경기 없는날 홈구장에서 훈련하다가 KBO일정 맞춰서 방 빼고 자리 내준 다음
대전고등학교, 계룡대를 전전하며 연습하던 한화이글스 2군은
2011년 4월 천안북일고와의 연습경기에서 2:5로 졌습니다.
이른바 '뉴비'팬들은 충격이실 수 있는데
천안북일고 출신 OB말고 고딩들이랑 해서 졌어요.
추승우-이상훈-임신호-김기남-김준호-최연오-이동형-임경훈-김동빈 라인업으로 졌습니다. 북일고한테
연습경기였으니까, 뭐 한번쯤은....그럴 수도 있긴 한데
이듬해 북일고에게 한번 또 졌죠
(그래서 "북일고 출신 우대하지 말라"는 말 들으면 한편으로 정말 웃픕니다)
2012년 드디어 서산이 완공되고 부지런히(?) 육성에 나서는데
문제는 바로 저겁니다
2012년 이후에 (우리보다 먼저 2군 키운) 다른 팀들은 (우리보다 더 빨리) 다른 투자를 시작했다는 것
다른팀 2군 전용 경기장 업그레이드 준비하고 있을때
여기저기 구장 옮겨가며 연습하던 우리 2군은 (그저 연습경기 2게임에 불과하지만) 고딩한테 졌는데
뒤늦게 격차 좁혀보겠다고 투자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남들은 더 많은 투자를 시작한거죠.
2군 관련 문제를 생각할때마다 답답하고 기분이 안 좋은게 뭐냐면
저는 사실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격차가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죠.
예를 들어서, 절대로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주식시장에서 다들 돈을 벌고 있다고 치자고요
다른 사람들은 초기자본 10억 20억 털어넣고 수익률 20~30%씩 먹는데
우리는 뒤늦게 5억쯤 넣어놓고 10~15% 수익률 내고 있는 느낌이랄까.
우리도 2군 전용구장 연습장 만들었고, 퓨쳐스 선수들 연수나 교육리그 보내고 전훈도 가고 하죠
그래서 <과거의 한화이글스 퓨쳐스 선수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다른 구단 퓨쳐스 선수들>과 비교해서도 나은 환경에서 운동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지금 우리 퓨쳐스의 시설과 시스템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 발걸음이 뒤쳐졌다는 의미입니다)
(확인되지는 않은 썰인데) 2004년에 트레이드로 팀을 옮겨간 송지만이
현대 가서 재활치료시설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과거 한화에서 본인이 보던것과 너무 다르고 좋아서요.
정민철 송진우 구대성 한용덕 류현진 이상목
김태균 장종훈 이정훈 이강돈 이영우 송지만
정근우 이용규 정우람 문동환 김민재 최재훈
이런 선수들이 팀을 이끌어 왔는데요
구단 운영 체계가 지금과 달랐던 00년 이전 세대 선수들이거나
개인의 기량이 애초에 무척 훌륭했거나
외부에서 영입되어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선수들이죠.
이 고리가 과연 끊어지고 지금까지 쌓여온 게 '역전'이 될지 잘 모르겠네요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던 고3이랑
고2 까지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가 수능 시즌 되니까 부랴부랴 마음이 급해진 고3이
이번 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똑같이 밤새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 성적이 더 좋을까?
새롭게 마음 잡은 고3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원래부터 열심히 하던 고3도 지금 계속 열심히 하고 있을텐데 이게 과연 될까? 그런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응원팀을 바꿀 수도 없고
저는 구단의 운영 계획을 수립하거나 계획 실행 여부를 체크하는 구단 관계자가 아니라
그냥 취미삼아 보는 팬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냥 뭐, 좋은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11년전에 쓴 글을 오늘 또 쓰고
나중에 2031년에 또 그런 글 쓰지 않도록 말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뭐든지 시스템을 갖춘 그리고 선점한 집단이 앞서나가는 것이 현대의 순리죠. 비슷하게라도 따라가는 시늉만이라도 했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