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躁鬱조울증 환자인가!
유옹 송창재
모든 계절은 詩시이다.
예전처럼 계절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해서
각 계절을 특징지어 줄 상징들이 희박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계절은 시를 만들기에 충분한 시꺼리(소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못해
언 땅이 작은 비에 풀려 나뭇가지에 보송보송하고 보드라운 솜덩이들이 보이는가 했더니 갑자기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우박이 쏟아져 꽃봉오리들은 앙증맞게 수줍은 햇앵두같은 꼭지를 숨기고 만다.
그런가 했더니 갑자기 길가 벚꽃이 만발하여 벚꽃 마라톤
대회을 한다고 플래카드가 붙더니 긴팔셔츠가 거추장스러워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도 반팔을 입지 않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그러다 여름폭염이 내리더니
설악산 단풍 소식이 들린다.
금수강산 사계절이 뚜렷하다던 우리 자연이
이제는 언제가 가을인지 언제가 겨울인지 구분이 어려워지고
어쩌다 싸라기라도 내리면 겨울인가 보다고 첫눈의 추억을 그리게 되니
계절은 구분이 희미해지고 감각도 무디어 가는데
시인은 아직도 살갖이 얇아 춥고 더운 오감의 감각세포가 퇴화 되지를 않는다.
봄에 겨울을 쓰고 가을에 지난 여름을 쓸 줄아는 通통감각의 사람들이 시인인가 했더니
그것은 통감각이 아닌 초감각의 초자연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계절을 엎치락거리며 살다보니 정서의 표출도 시도 때도없이 스멀거리어 울다가 웃다가
남 새끼 결혼식장에 가서 내 딸 시집가던 날 떠올라 눈물 찔끔거리고
가난한 시인 주제에 저 친구는 이렇거나 곱게 길러서 남주려면 그동안 얼마나 돈도 많이들고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노총각인 것이 천만다행이고,
친구 상가에 가서는 술 한잔에 취해서 그놈 참 편한 곳으로 갔다고 축하의 변을 늘어놓으며 축배를 건배하고 건배사를 읊으니
이건 틀림없이 정신이상자..
울고 웃는 것도 구별 못하는 조울증 환자인가 하고 걱정스러워진다.
이제 남들이 보면 노망들어가는 영감탱이처럼 안광도 맑았다 흐렸다하니
반짝이던 명민함은 없어지고, 백태낀 눈동자에 지력을 잃지 않으려고 힘만 주니 벌겋게 충혈된 흰자위에는
그래도 명자나무의 붉은 봄꽃 빛이 남아있다.
백내장 수술을하여 탁해져버린 거죽을 벗겨버리니 두어달 환하더니 다시 흐릿하다.
시야가 躁鬱조울을 반복하여 뇌속도 맑았다 흐렸다를 교차하니,
젊은 시절의
시인이 아니었던 참시인이었던 그때가 그리워 또 그때의 시를 적게된다.
그리웠던 그때의 山河산하는 구분이 명확하여 의식의 躁鬱조울도 명철했는데
정서는 경험의 훈련이 거듭될수록 감정의 혼재가 많아 엉킨 실타래뭉치의 조울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시는 학술 논문이 아니다.
시인은 한칼에 돼지고기를 양단하는 푸줏간 아저씨도 아니고, 형량을 측량하는 판관도 아니다.
늙어가는 시인은 混在혼재하는 계절처럼
혼탁한 눈에 경계없어 보이는 정서가
비오는 날 꽃 꽂고 허허 웃으며 춤추는 조울증의 광인이라는 것을 이제 느껴가고 있으니
주체못 할 망령인지 흐릿해져 가는 망막때문인지.,
지성과 감성이 널뛰기하는 얼치기가 시인인가 보다.
중증의 조울증을 가진 나는 오늘은 躁조인지 鬱울인지 계산도 없이
해질녘 까치노을을 기다리며
벚꽃 흐드러지기 시작하는 금강 뚝방길을 목발 친구삼아 걷다가
텅빈 모정에 앉아 하모니카를 꺼낸다.
아마 고향의 봄을 연습하겠지.
아직 해질 무렵 참 좋은 시간에
자전거를 달리는 서너명이 힐끗거리며 씩씩거리는 콧바람 소리를 내며 황소떼처럼 지쳐나갈 뿐이다.
저들과 나는 지금 조울증 환자 아닐까?
달리면 달릴 수록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쓰면 쓸 수록
重症중증의 躁鬱조울이 쌓이는 것을 자각하게 되니
지금 躁일까 鬱일까.
첫댓글 躁 맞습니다. 맞고요.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