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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포럼의 타종교에 관한 글과 댓글을 보면서 문득 김훈 작가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이 ‘남한산성’이라는 책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도성을 비우고 남한산성에 머물렀던 47일 동안, 꺼져가는 조국 운명과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그린 소설로써, 주전(主戰)론자인 김상헌과 주화(主和)론자인 최명길의 논쟁이 백미를 이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죽음 앞에서 명분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냐, 아니면 일단 직면에 있는 파멸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할 것이냐는 논쟁으로써, 우리 포럼같이 주장의 대립이 빈번한 경우에 과연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시사한 바가 있어서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 나라 상황이 병자호란 때처럼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태라 생각하시고 각자 입장을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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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남한산성 행궁, 앞에는 인조임금이 앉아 있고 좌우로 중신들이 배석해 있다. 어전회의 내용은 방금 들어온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문서를 두고 열렸다. 문서에는 형식도 없고 보낸이의 이름도 없다.
문서는 ‘너희 군신이 춥고 궁벽한 토글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승지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해 울면서 문서 읽기를 마친다. 문서 내용을 들은 임금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적장이 답답하다 하는구나.”
그리고는 말이 없다. 이때 이조판서 (주화파) 최명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적의 문서가 비록 무도하나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하고 있으니 아마 화친의 뜻이 있는 듯하옵니다. 그런즉 글을 닦아서 응답할 일은 아니로되 신들을 성 밖으로 보내어 말길을 트게 하옵소서.”
이때 예조판서 (주전파) 김상헌이 손으로 마루를 치며 떨리는 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심양에서 여기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오직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인즉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부디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싸우고 지키려는 전하의 뜻을 보여주소서.”
그러자 최명길이 더욱 낮은 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앝사옵니다. 적이 화친을 내세우며 서둘러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성(城)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데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이때 김상헌이 최명길의 말을 끊었다.
“이거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戰)이요,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이나 화해할 수 없을 때 화해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요, 아시겠오?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최명길은 김상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임금을 향해 말했다.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안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 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김상헌이 다시 손으로 마루를 때렸다.
“이판의 말은 몽매하여 본말이 뒤집힌 것이옵니다. 전(戰)이 본(本)이고 화(和)가 말(末)이며 수(守)는 실(實)이옵니다. 그러므로 전(戰)이 화(和)를 이끌어 내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옵니다. 더구나 천도가 전하께 부응하고, 전하께서 실덕하신 일이 없으시며 또 이만한 성에 의지하고 있으니 싸우고 지키면 반드시 회복할 길이 있을 것이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 최명길은 천천히 말했다.
“상헌의 말(言)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이옵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生)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생의 길을 따라야지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뒤섞여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書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하지만, 최명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전하, 그만 할 일이 아니라 신의 말을 막지 마옵소서. 장마가 지면 물이 한 골로 모이듯 말(言)도 한 곳으로 쏠리는 것입니다.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신하들의 말들은 이른바 대의에 쏠려서 시세를 돌보지 않으니, 대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크고 시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사세(事勢)가 말과 같지 않으면 산목숨이 어디로 좇아야 하겠습니까.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열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 주옵소서.”
김상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하들의 말들이 그동안 화친을 배척해 온 것은 말이 쏠린 것이 아니옵고 강토를 지키려는 대의를 향해 아름답게 모인 것이옵니다. 뜻이 뚜렷하고 근본이 굳어야 사세를 살필 수 있을 것이온데, 명길이 저토록 조정의 의로운 공론을 업신여기고 사직을 오랑캐의 입에 던지려 하니 명길이 과연 전하의 신하이옵니까?”
임금이 다시 주먹으로 서안(書案)을 내리쳤다.
“이러지들 마라. 그만 하라지 않느냐.”
신료들은 입을 다물었다. 영의정 김류는 말없이 어두운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첩에서 총소리가 두어 번 터졌다. 임금이 김류에게 물었다.
“영상은 어찌 말이 없는가.”
김류가 이마를 마루에 대고 말했다.
“말을 하기에는 이판이나 예판의 자리가 편안할 것이옵니다. 신은 참람하게도 체찰사의 직을 겸하여 군부를 총괄하고 있으니 소견이 있다 한들 어찌 싸움과 화친의 일을 아뢸 수 있겠사옵니까?”
최명길이 말했다.
“영상의 말이 한가하여 태평연월인 듯하옵니다. 전하, 적들이 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덤벼들면 사세는 더욱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런즉 중론을 묻지 마시고 오직 전하의 성단으로 결행하소서.”
김상헌이 말했다.
“전하, 명길의 몸에 군은이 깊어서 품계가 당상인데, 어찌 임금에게 성단을 들이미는 것이옵니까. 화친은 불가하옵니다. 적들이 여기까지 소풍을 나온 것이겠습니까. 부디 적의 문서를 불살라 군병들을 격발케 하옵고 애통해 하시는 문서를 전국에 보내어 군사를 서둘러 부르시옵소서.”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의 답답함이 저러하옵니다. 군사를 불러 모은다고 꼭 화친의 말길을 끊어야 하는 것이옵니까. 군신이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것이 이로울 터인데, 의(義)를 세운다고 이(利)를 버려야 하는 것이옵니까?”
김상헌이 말했다.
“지금 묘당의 일을 성 안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데, 조정이 화친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성첩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화(和)자를 깃발로 내걸고 군병을 격발시키며 창의의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겠사옵니까. 명길의 말은 의(義)도 아니고 이(利)도 아니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옵니다.”
최명길이 또 입을 열었다.
“웃으면서 곡을 할 줄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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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포럼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원은 믿음이냐 행위이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명이냐 복음이냐, 또는 세상은 경계 대상이냐 사랑의 대상이냐 등 수많은 논쟁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남한산성 행궁에서 논쟁의 결국은 어찌되었을까요? 결국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었습니다.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쓰고 김상헌은 그것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최명길은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나처럼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면서 최명길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전쟁은 끝나게 되었지만 주전파였던 김상헌은 청나라에 척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붙들려가 심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최명길 역시 나중에 明나라와 내통하다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바로 김상헌이 갇혀 있는 감옥 옆방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그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김상헌의 의연함에 탄복했고, 김상헌도 최명길의 주화론이 진정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고초 끝에 마침내 김상헌과 최명길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청나라 용골대는 그들의 죄를 용서한답시고 황제에게 감사의 예를 올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최명길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지만 김상헌은 끝내 거부했다고 합니다. 위급 앞에서 방법과 행동은 극과 극을 달렸지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았던 것입니다.
과연 명분이 옳았을까요 아니면 실리가 옳았을까요?
김상헌은 웃으면서 곡을 하면 안 된다 하고, 최명길은 웃으면서 곡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 말이 옳을까요?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세상은 멀리해야 할 대상일까요 아니면 가까이 다가가야 할 대상일까요?
판단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하시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한가지로 같다는 점만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허락 없이 남한산성의 책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만약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성실하게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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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복음정신에 입각한 교회개혁 운동을 지향한다면 다양한 목소리가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진리문제가 아니라면 다름은 틀림이 아니지 않을까요?
좋은 글~잘 읽었습니다^^
김훈 작가께서 설마 책임을 묻겠습니까? 사랑스런 독자께 책을 선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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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양자역학' 이라는 물리학 용어를 빌려 보자면...,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구원은 믿음이냐? 행위냐?
삶은 계명이냐? 복음이냐?
세상은 경계 대상이냐? 사랑의 대상이냐?
어떤 문제를 경쟁과 싸움으로 해결하느냐? 협력과 대화로 해결하느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한 답을 주셨지만 아직도 두갈래길에서 헤멜때가 많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접근할 수 있으려면 세상 사람들이나
타종교인들의 어떤 선한 행위(?)를 무가치한 것으로, 육에 속한 것으로,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정죄하는 것보다, 그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른 선한 도덕과 교훈이 있음을 인정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안믿는 세상 사람들에게
독선적인 자로 여겨지게 되죠.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나누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믿는 자들이 무가치하고 위선적인 것으로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진 못하지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소통보다 설교에 익숙한 분들이 신앙인들에게 많이 있음을 봅니다. 또한 잘못된것에 대해서는 성경을 들어 귀신같이 잘 찾아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내가 진리에 속했으니 너는 진리를 잘모른다는 태도를 보이는분들도 많습니다. 그러한 당당함이 얼핏 맞는것 같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진 못하지요.
기독교인들이 말은 청산유수이고 틀린말은 별로 안하지만 본받을 점은 없다고 하는 불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아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불자들을 회개시키려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대화 시도 자체가 안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들의 교리관이 죄악인 것이지 그들의 선한 행위까지도 죄악일 수 없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진공묘유 또는 중도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않았기에 우리의 이해와 관용으로 충분히 회개토록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내 목소리에 대하여 이단적이다라고 성토 될 때 그 참담함이란...
그래도 이곳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셔서 위로가 되고 고맙습니다.
불교나 타종교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데에 공감합니다
타종교에 대해 내 믿음을 내세우며 배타적인 주장을 하면 잘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타협과 투쟁은 공감과 지지를 받기가 쉽습니다. 강한 충성심을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타자를 철저하게 깔아뭉개는 것인데 이는 상호간의 싸움만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랬고(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슬람의 지하드가 그렀습니다. IS와 알카에다 모두 투철한 이슬람 신앙에 근거를 한 것인데 나만이 절대적이고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뜨거운 신앙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결국 칼이냐 코란이냐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선택만이 남을 뿐입니다.
근본주의적인 태도로보면 우리외에는 다 적이다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 종교 근본주의가 권력이나 세력을 규합하면 재앙이 되는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품안에서 변화되어 잘 삽니다라는 것만 보여주면 그보다 확실한 전도는 없다고 봅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서 본다면 애굽은 세상을 대표 합니다
또한 광야도 세상을 대표 하지만 광야가 의미 하는것은 물질적인 세상 입니다
반면 애굽이 의미하는 세상은 도덕적 의미가 있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실질적인 ( 물질적인 )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
도덕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장소를 말하고 하나는 조직을 말하지요
많은 것들이 이 조직적인 것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요
보기에 좋은 것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허영심을 갖게 합니다 . 이것이 애굽 입니다
김훈 작가의 글은 그 문체가 마치 옛시를 읽는것 같아서 저도 참 좋아 한답니다....현의 노래.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등 요
그중에 남한산성은 제일 좋아해서 이띠금씩 다시 꺼내서 읽곤 하지요....각설하고
작은아이님의 숙제를 어제도 생각하다 나가고 오늘도 다시 생각하다가 나갑니다...조금더 생각을 해볼께요 ㅎㅎㅎ
마음과 댓글로 화답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항복 문서를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를 다시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찢는 사람도, 붙이는 사람도 모두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두 사람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기에 모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렇듯이 상충되는 논쟁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은 틀렸다가 아니라
함께 옳을 수도 있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었답니다. 모두가 우리 포럼을 통해서
유익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아무튼 애정을 가지고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맞습니다.
상충되는 논리라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진리에 있어도 상대방을 근본주의자 혹은 다원주의자로 지나치게 몰아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 좋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