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참 깨끗한 선비
권다품(영철)
"오리양반이 세상 빌었단다. 할마이 죽어뿌고 혼자 끼리 묵디마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세상 빌었다 카네!"
"병원에 입원했다 캐도 예사로 생각했디마는 안 좋은 병이었던가배?"
"위암이었단다. 아이구~, 그 양반 참 안 됐다. 상주가 니 친구재?"
시골 어머니께서 전화로 친구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셨다.
고향 마을 어른이시기도 하지만, 국민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의 아버님이라 상가에는 당연히 다녀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고향분이다 친구의 아버님이다보다, 그 분의 인품 때문이라도 반드시 문상은 갔다오고 싶었다.
혹시, '시골 사람이 다 똑같지 뭐' 할 지도 모르지만, 그 분은 달랐다.
그분은 함부로 살고있는 우리가 부끄러울만큼 자상하시고 마음씨또한 고운 분이셨다.
그것뿐 아니었다.
말과 행동에 정말 빈틈이 없으셨다.
나는 아직 그 어른께서 말실수를 하시는 걸 못 봤다.
큰소리나 화를 내는 경우도 한 번도 못 봤다.
시골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겐 잠시도 쉴틈이 없다.
들일은 들일대로 바쁘고, 집안일은 집안일대로 바빴다.
깜깜할 때까지 일을 하고, 하루종일 일하느라 힘이 다 빠졌는데도, 그 수확한 것들을 리어카에다 싣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 시골 노인들의 일이다.
집에까지 끌고온다고 끝이 아니다.
싣고 온 곡식들을 비가 맞지않는 곳으로 옮겨야 하고, 혹시라도 비 덧칠까 싶어 비닐도 두르고 단속도 해야 한다.
또, 아무리 자기 배가 고파도, 주인 오기만을 기다리던 눈이 움푹 들어간 소에게 죽을 먼저 끌여줘야 한다.
"헤헤이~, 아무리 짐승이지만 배가 얼마나 고팠겠노! 죄 받겠다, 죄 받겠어."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시면서도, 일손이 조금 뜸해진다고 좀 쉬지도 않으신다.
산으로 나물캐고 약초캐러 가시는 마나님을 위험할까봐 혼자 보내질 않고 항상 지게를 지고 같이 가신다.
그렇게 같이 약초를 캐고 산나물을 뜯어서는, 그 무거운 보퉁이를 당신 지게로 지고 내려오신다.
집에 와서는 고픈 배를 식은 밥 한 덩이로 떼우고는, 밥상도 치우지 않고 또 그 밥상 옆에서 하루종일 뜯고 캔 약초나 산나물들을 마나님이랑 같이 앉아서, 고운 웃음으로 얘기를 나누시면서 다듬으신다.
피곤에 지친 할머니가 조는 걸 보고는 잠을 깨우려고 자꾸 말을 걸기도 한다.
"고사리가 벌써 살이 마이 찠네! 수리초가 차암 부드럽네! 내일 장에 나가면 잘 팔리겠다!"
그렇게 다듬고 가려서 포대나 자루에 담아 끈으로 야무지게 묶어 마루끝에다 내놓고는, 그 마지막 설겆이는 항상 당신이 하겠다며, 마나님에게는 먼저 자라고 하시는 분이셨는데...
그러던 분들이, 일 년전에 마나님이 화상을 심하게 입고는 그만 돌아가셨다.
친구 어머님이라 당연히 문상을 갔었다.
그때 부인의 빈소 앞에 가만히 앉아계시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아이구~, 이 사람 영철이 아인강! 우째 올 시간이 있던강? 학원이 그래 바뿔 낀데 고맙구로...." 하시던 어른이셨는데....
그때 어르신의 속으로 눌러참는 눈물을 읽을 수 있었다.
"차암.... 사람 목숨이라 카는 기 이래 마음대로 안 된다 이 사람아."
그런 눈물묻은 말씀을 하시던 분이셨는데....
돌아가신 분보다, 그 어른의 눈물 감추려는 슬픔 때문에 내 가슴이 더 아팠는데....
그후 일 년 남짓이었는데, 그새 돌아가셨단다.
동네에서 하우스를 하는 젊은 사람들이 돈을 걷어, 마을 어른들을 다 모시고 놀러 가던 날도, "나는 우리 할마이 안 가마 나도 몬 간다. 산에 가뿌마 나도 따라가야 된다. 위험해서 혼자 보낼 수 있나 어데."하시며, 동네 사람들이 다 가는 놀러도 못 가신 어른이었는데 ....
술도 거의 안 드셨던 어른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술도 한 잔씩 하시고, 동네 젊은이들이 억지로 매어드라는 장구도 매고 노래도 부르신다는 소문도 들렸는데 ....
"할마이 돌아가시뿌고 나이끼네 집에 혼자 있기가 안 무섭겠나! 그거 떨치뿔라꼬 동네 사람들 모이는데는 다 안 나오고 싶겠나! 인자부터라도 좀 편하게 사시다가 가셔야지. "
동네 사람들도 이렇게 바랬는데 ....
두 분이 아무리 소꿉친구처럼 친하게 사시던 분들이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도 못 참으시고, 그새 마나님을 따라가시는가!
어릴 때 묘사를 지낼 때는, 산자락마다 그 분이 읽으시던 "유~ 세차~......" 하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동네 초상이라도 났을 때는, 그 옥필로 쓰신 축제문을 도포입으신 낭랑한 목소리로 읽으셨는데....
그렇게 바쁘게 일을 하시다가도, 동네에서 무슨 모임이라도 있을 때는 선비답게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나오신 분이었는데.....
혹시 젊은 사람들이 잘못이라도 저질러서, 동네 어른들이 소리소리 질러서 혼을 내고 있을 때는, "인자 그만하게. 그만 했으면 안 알아들었겠나! 인자 그런 짓 안 하마 된다. 가서 놀아라."며 인정스럽게 말려주셔서, 큰소리로 야단치던 어른보다 더 조심스러웠던 어른이셨는데....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앉은 어른들이 집안마다 서로 "우리가 선비 집안이라"며 무식한 언성을 높일 때도, 자기 성씨를 자랑하기보다, 남의 성씨를 높여줄 줄 아는 분이었는데......
"양반이야, 안동권 씨를 따라갈 만한 문중이 있나 어데! 권 씨는 양반 맞다! 육 씨도 옥천 지방에는 벌족으로 살고, 그 지방에서는 대단한 문중이지!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여사가 옥천 육 씨 아이가! 옛날 같으면 왕비 집안 아이가!"하며 남의 문중을 존중할 줄 알고, 당신 문중 자랑은 안 하시던 분이셨는데 .....
동네에서도 그분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고, "오리양반이야 법없어도 살 양반 아이가!" 이런 말만 듣고 사셨던 분인데.....
충분히 더 사셔도 될만큼 그렇게 많은 연세도 아니었는데 ....
그 동안 고생만 하셨으니 이제 조금 편하게 사시다 가셨으면 더 좋았을 걸....
어르신, 안녕히 가십시오.
시골 일 때문에 비록 겉모습이 초라하긴 했지만, 그 훌륭한 선비의 모습은 늘 기억하겠습니다.
그 가신 곳에서는, 말씀이나 행동만큼 어울리시던 그 깨끗하던 도포에 유건 쓰신 단아한 선비의 모습으로만 편하게 계시길 빌겠습니다.
2011년 3월 8일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