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만력 29년, 선조 34년(1601년)
2월 선전관을 보내어 전라 감사 이홍로(李弘老)를 불렀다. 이홍로는 빨리 달려와 상경하였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서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겸임하였다. 다른 도도 다 그렇게 하였다. 영남도 마찬가지로 대구 부사가 겸임하고, 호서는 공주 목사를 겸임한 것 따위가 그것이다.
○ 명 나라에서 대내전(大內殿)에 하사한 고명(誥命)과 면복을 난리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으므로 하절배신(賀節陪臣) 조정(趙挺)을 보내 다시 내려줄 것을 주청하였더니, 조정이 돌아올 적에 국왕 및 의인왕후(懿仁王后)의 고명과 면복을 다시 내려주었다. 그 고명에 이르기를, “짐이 생각건대, 왕자(王者)가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고 폐한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인(仁)보다 후한 것이 없으며,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에는 예(禮)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예가 욕되지 않는 데서 진작시킬 수 있고, 국가가 욕되지 않음으로써 흥기시킬 수 있으니 비록 문장(文章)과 물채(物采)라도 감히 폐함이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본래 예교에 돈독하고 충경(忠敬)에 독실하니 우리는 특별히 아름답게 여겼다. 근년 이래 난리중에 있어 문물 제도가 거의 탕진되었기에 짐이 너희를 위하여 흉악한 요물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국토를 회복해 준 것은 진실로 우리 무장과 문신의 힘이지마는 또한 너희가 예의를 지킨 보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군대가 어찌 활동하였으며, 정령(政令) 이 어찌 행하여졌겠는가? 순리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대역인데 어떻게 이번의 승전이 있었겠는가? 이제 왕이 고명과 면복을 난리중에 간수하지 못했다고 사신을 보내와서 처음과 같이 내 주기를 청하였다. 위를 섬기고 아래에 임할 때에는 모름지기 이에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여 한(漢)의 위의(威儀)를 회복해야 하므로 짐이 어여삐 여겨 허락하고 칙서를 내려 상방(尙方)에게 지어주게 함과 동시에 고명을 내리는 바이니 그대는 더욱 공경할지어다. 짐은 예를 함부로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으니, 그대는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 하여 예를 폐하지 말라. 누더기를 입고 초(楚) 나라를 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위(衛) 나라를 일으켰으며,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월(越) 나라가 이긴 일들은 모두 왕이 오늘에 해야 할 일이니, 짐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힘쓰라.” 하였다. 왕비 박씨에게 내린 고명의 요지는, “일찍 좋은 배우자로서 왕과 짝이 되었도다. 근래 난리로 파천했다가 이제 돌아왔다니 마땅히 새 명령을 받아야 하겠기에 옛 법령과 규칙을 내리노라.” 하였다. 배신 황신(黃愼)을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숙배하였다. 《고사(攷事)》
○ 이원익(李元翼)을 체차하고 이덕형(李德馨)으로 체찰사를 삼았다. 체찰사가 서울에서 영남으로 순찰해 내려와서 이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였다가 곧 영남으로 돌아가 성주(星州)에 머물렀다.
3월 11일 햇빛이 서로 부딪치더니 얼마 안 되어 별똥이 서해에 떨어졌다. 삼각산(三角山)에 우레 소리가 있었으며, 한강물이 또 붉었다.
○ 통영(統營)을 거제(巨濟)로 옮겼다.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전라 좌수영으로부터 거제로 체직되어 들어왔으며, 거제 수사 배흥립(裵興立)이 전라 좌수사로 전출되었다.
6월 왜의 사신이 또 와서 잡혀간 사람 전 현감 남충원(南忠元) 등 2백여 명을 바쳤다. 본도 좌수영 우후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달 21일에 황령산 봉수군(黃嶺山烽燧軍) 송기필(宋己必) 등이 달아나는 자를 잡아가지고 돌아왔다고 고하는데, 전 현감 남충원 등의 공초(拱招)에 “우리 나라 사람 남녀 모두 2백 50명과 왜인 8명을 네 척의 배에 나눠 싣고 나왔다.” 하므로, 적의 정세에 대하여는 뒤에 문초하여 수사가 곧 장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남충원을 다시 문초한 공초에, “이 몸은 젊어서 임금의 은혜를 특별히 받아 청산 현감(靑山縣監)에 임명되어 전후 8년이나 근무하였고, 경질되자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에 종사하다가 얼마 안 되어 진천(鎭川) 본가로 내려왔습니다. 정유년의 난리에 온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문경(聞慶)과 상주(尙州) 등지를 왕래하면서 피란을 가다가 적병이 도로 내려갈 때에 자식 두 사람과 함께 청정(淸正)의 군사에 붙잡혔습니다. 얼마 안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는데, 왜의 우두머리 수길(秀吉)이 적장 증전우문위(增前右門衛)에게 저를 주어 그 왜인의 집에 한때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매일 우리 나라 사인(士人) 하동(河東) 사람 정창세(鄭昌世)ㆍ서울 사람 박언황(朴彦璜)ㆍ이산(尼山) 사람 송정수(宋廷秀) 등과 더불어 상의하여 늘 도망해 나올 것을 꾀하던 차에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조신(平調信)ㆍ평의지(平義智) 등이 지난해 우리 나라의 사자 박희근(朴希根)이 가지고 온 글의 사연을 가강(家康)의 처소에서 직접 의논하기 위하여 대판(大阪)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 만나보기를 청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조신(調信)과는 전날 통신사로 왕래했을 때에 제가 청산 현감으로 있으면서 지응(支應)하는 차사원(差使員)으로 인하여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조신은 말하기를, ‘조선의 전성시기에 우리들이 화친을 맺어 서로 통하여 작록(爵祿)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므로 평소에 한결같이 마음속에 새겨져 잊히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임진년의 싸움으로 해서 이웃나라와 사귀는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만, 관백(關白)이 임종할 때에는 마음으로 뉘우치고 화친을 구하려는 뜻이 듣고 보는 모든 일에 나타나 있었음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일찍부터 이 뜻을 조선에 전달하려고 한 것이 벌써 여러 해 되었습니다. 우연히 지난 여름에 조선에서 박희근(朴希根)으로 하여금 그가 예조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전하고 곧 바다를 건너 돌아간 뒤로는 두 나라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오래도록 답서를 보내지 못했으니, 당신들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왜 사신과 함께 보내어 예조의 공문에 답하게 하고 왜인 8명을 같이 내어 보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달 21일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였습니다. 같이 나온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더러는 임진ㆍ계사ㆍ갑오 혹은 정유년에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일본 적의 상황은 관백이 죽은 뒤 관동대장(關東大將) 가강이 관백의 아들 수뢰(秀賴)를 세워 주(主)를 삼고, 가강이 임시로 정권을 잡고 나랏일을 마음대로 주무르기를 관백과 다를 것이 없이하여 한 지방을 통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관동 중납언(關東中納言) 경승(景勝)이 성을 점거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지난해 6월에 가강이 대병을 일으켜 바로 관동으로 향한 뒤에 서경 유진대장(西京留鎭大將) 모리휘원(毛利輝元)이 왕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서로(西路)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강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이내 바로 관동으로 향하여, 가강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도리어 크게 패하여 서로의 여러 장수 석전치보부(石田治甫部) 및 승장(僧將) 안국사(安國寺)ㆍ소서비(小西飛)ㆍ평행장(平行長) 등이 모두 참살을 당하였습니다. 가강은 관동으로부터 바로 서경으로 향할 때에 여러 고을을 모조리 도륙하였으나 휘원(輝元)만은 죽이지 않고 머리를 깎아서 중을 만들고 그의 식읍을 모조리 빼앗고 성밖에 안치하였다 하며, 그 밖의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공초에 들어있는 잡혀간 사람 2백 50명을 이제 다시 이름을 대조하여 조사하니 2백 31명이었는데, 체부(體府) 종사관의 분부에 따라 가까운 고장 사람은 곧 고향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는 만호 손문욱(孫文彧)이 거느리고 체부로 보내기 위하여 어릴 때의 이름과 그들이 살던 고향을 열거하여 올리게 하였습니다.
○ 길운절(吉雲節)ㆍ소덕유(蘇德兪) 등이 사형을 받았다. 운절은 경상도 선산(善山) 사람으로 작고한 직강 길회(吉晦)의 아들이요, 덕유는 전주(全州) 사람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조카이다. 기축년에 잡혔으나 마침내 은혜를 입어 제주에 안치되었었는데, 이때 운절이 제주에 몰래 들어와 덕유와 모반을 꾀하다가 덕유의 아내에게 발각되자 운절이 먼저 고발하였으므로 목사 조경(趙儆)이 덕유 등을 붙잡아 서울로 보내어 죽였다. 본도 병사 안위(安衛) 전 수사 김억추(金億秋) 등이 연루자로 붙잡혀 서울에 이르렀으나 용서되었다. 어사를 제주에 보내어 남은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며, 운절은 사전에 고발하였다 하여 용서를 받았으나 그뒤에 은전(恩典)이 미치지 않음을 몹시 원망하다가 도로 잡혀 참형을 당하였다. 기축년에 역모를 한 자 중에 길삼봉(吉三峰)이라는 자가 있었다고 하나 아직 잡지 못하였는데, 이 운절의 머리에 점이 세 개가 났다 하여 아명을 삼봉이라 하였다 하니, 이 자가 그 길삼봉임에 틀림이 없다.
12월 양전(量田)을 설치하였다.
○ 명나라의 사신이 서울에 와서 열흘 동안 머물고 돌아갔는데, 가는 길이 쓸쓸하였으므로 주사관(主事官)이 시를 짓기를,
사냥개처럼 왔다가 바람같이 가버리니 / 來如獵狗去如風
전화가 수습된 조선 땅이 온통 비었구나 / 收拾朝鮮一境空
저 푸른 산은 그대로 있어 움직이지 않으니 / 猶有靑山移不動
다음날 그림 가운데 본떠 가련다 / 將來模得畫圖中
하였다.
○ 왜인 귤지정(橘智正) 등이 세번째 나와서 몰래 명 나라 군사의 있고 없음을 탐문하였으니, 정세를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수병장(水兵將) 한 사람을 보내주어 선봉 수백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독려하고 병졸을 훈련하며, 그 소문을 멀리 퍼뜨리게 하여줄 것 등을 하절배신(賀節陪臣) 김륵(金玏)에게 부쳐 명 나라 황제에게 아뢰었다.
[주-D001] 누더기를 …… 열고 :
초 나라의 시조 웅역(熊繹)이 형산(荊山)에 숨어 있을 때 누더기옷을 입고 풀숲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주-D002] 굵은 …… 일으켰으며 :
위 문공(衛文公)이 굵은 베옷을 입고 민력을 기르고 교육을 진흥시켜 위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주-D003] 지응(支應) :
관원이 공무 출장중에 소용되는 물품을 현지에서 대어주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