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소리
처서가 지나고 백로를 앞둔 절기다. 아침저녁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이제 밤이면 베란다 창문을 닿고 자야할 정도다.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처서가 지나면 더위가 고비를 넘어 날씨가 선선해지므로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기세가 약해지는 현상을 이르는 속담이다. 올해는 가을 들머리 우리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모기들이 물살에 다 떠내려갔을 것이다.
팔월 하순 어느 아침 출근길이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뒤로 창원천에 물이 많이 불어났다. 진례산성에서 발원한 창원천은 용추계곡을 지나 창원대학 앞을 지나 퇴촌교에 이른다. 평소 반송공원 북사면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반지동 대동아파트 못 미쳐 창원천 징검다리를 건너다녔다. 창원천에 불어난 물로 며칠 동안 그 징검다리 이용하지 못하고 퇴촌교 건너편 둔치 산책로로 다녔다.
며칠 새 냇물이 줄어들어 징검다리를 건너갈 수 있지 싶어 반송공원 북사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번 내린 비로 반송공원 산자락 군데군데 토사가 물살이 휩쓸려 내렸다. 길섶 배수로는 흙으로 뒤덮였고 풀잎이 드러누워 있었다. 자연은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복원력이 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아물지 싶다. 한동안 산책로와 운동기구엔 인적이 드물었는데 사람들이 보였다.
길섶 풀잎은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말 그대로 순수하고 영롱한 이슬이었다. 풀잎에는 이슬만 맺힌 게 아니라 청아한 풀벌레 소리까지 들려왔다. 시골 들녘 들길이 아닌 도심 속 공원의 산책로에서 듣는 가을이 오는 소리였다. 제법 거리를 둔 개울 건너편은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붕붕거렸다만, 그 인공의 소음과는 비교할 수 자연에서 들려오는 귀가 즐거워지는 소리였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 낮은 기온이 상승하기에 소리가 자연히 떠올라 공중을 나는 새가 먼저 듣게 된다. 밤은 기온이 하강하기에 소리도 땅으로 퍼져 내린다. 그러니 지상의 쥐가 먼저 듣게 되리라. 해 뜰 무렵은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낮은 때다. 내가 출근길에 들은 풀벌레 소리는 지상의 가장 낮은데서 들려왔다.
산책로 길섶에서 들려온 소리의 주인공은 여럿이지 싶다. 여치나 찌르레기들도 있겠지만 밤을 새워 울었던 녀석은 귀뚜라미였으리라. 참, 귀뚜라미는 울었던 게 아니라 노래했다고 해야 하나? 노래도 아닌 듯 연주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귀뚜라미 소리는 사람처럼 성대에서 발성되는 것이 아니다. 몸통 안에 공명기관이 있어 소리가 울러 퍼지는 것도 아니다. 그 소리는 어떻게 나올까?
귀뚜라미는 통통한 뒷다리로 자신의 몸통인 배를 비벼 문질러 소리를 낸다고 한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밤새도록, 아니 날이 밝아 해가 뜨는 데도 쉬지 않고 방아 찧듯 다리를 비벼댔다. 잠시 쉬어가며 연주해도 되겠건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뚜라미는 처절하게 죽기 살기로 신체기관을 움직여 소리를 들려주었다. 도대체 귀뚜라미는 무슨 사연으로 하루도 아니고 가으내 울어야만 할까.
지구상 남녀 성비가 1대 1이듯 모든 동물의 암수도 비슷할 테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모두 수컷들이다. 수컷 귀뚜라미는 종족보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그토록 소리 높여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렷다. 봄부터 땅속 어디선가 애벌로 자라 여름날 온전한 귀뚜리미로 변신에 성공했다. 이제 거룩하고 성스러운 짝짓기를 하는 일이 남았다. 언제 그날이 오려나.
수컷 귀뚜라미들이 울어대는 풀숲에는 같은 개체 수의 암컷 귀뚜라미들이 엿듣고 있단다. 여유 만만한 암컷은 어느 녀석이 더 힘차고 우렁찬 소리를 내는지 지켜보리라. 수컷은 암컷한테 선택 받고자 젖 먹을 때 힘마저 다 짜내 밤새도록 울어대는 것이다. 암컷 귀뚜라미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수컷 귀뚜라미를 애타게 만들었다. 녀석 덕분에 가을 한 철 청아한 소리를 잘 듣는다. 1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