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화 가옥 평면
유계화 가옥 전경
청원 유계화 가옥 (중요민속자료 138호)
완만한 경사지에 멀리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앞산을 안산으로 하여 편안하게 앉아 있는 유계화가옥은 이 지역에서 보기 힘든 ㅁ자 형의 집이다. 충청도에는 이러한 ㅁ자 집이 5채(홍성엄찬고택/이삼장군고택 등) 가량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집이 생긴 이유를 어떤 분은 퇴계계열의 학파적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ㅁ자 집이 발달한 경상도 지방이 남인 중심의 지역이므로 남인계열의 사람들이 이러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집들과는 달리 ㅁ자로 집을 지었다는 것은 순순하게 지역성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 곳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 형집이다.
안방에서 본 마당
유계화 가옥은 ㅁ자의 폐쇄적인 구조이지만 집 주변은 매우 시원하다 마당도 넓고 뒷마당도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매우 밝고 시원하다. 안마당도 4칸*4칸 규모로 상대적으로 널찍하고 사랑채가 대지의 경사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게 지어져 햇볕이 잘 들고 있어 막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집 전체의 경사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보면 사랑채의 기단이 매우 낮고 안채 쪽으로 갈수록 기단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집에 높이의 차이가 있는지 못 느낄 정도로 자연스럽게 처리하여 놓았다. 목수의 세련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현재 집의 대문은 남쪽으로 문이 나있다. 집 주인의 말에 의하면 원래 서쪽에 문이 있었는데 60년 전쯤에 남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직 집터 서쪽 중문 앞에는 내외담으로 만들어진 담의 일부가 남아 있고 그 담이 바깥으로 둘러쳐진 담까지 연장된 흔적도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이 사실일 듯 하다. 문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지금은 담 밖에 있지만 문화재 지정당시 도면에는 집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랑채 앞에 집의 상징으로 심었던 것일 것이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는 전면 6칸 측면 한칸 반의 규모의 전퇴집으로 꾸며졌다. 현재는 동쪽 맨 끝 칸에서부터 광, 부엌, 사랑방 2칸, 대청 한칸, 방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방으로 꾸며진 4칸 앞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와는 차이가 있다. 사랑채에서 특이한 부분은 사랑채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칸이다. 아궁이가 설치되어있는 곳의 앞쪽 퇴칸은 고루가 설치되어있는데 고루가 설치된 높이가 낮아 머리를 구부리고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반칸 안으로 들어가면 다락도 없고 일반 부엌처럼 되어 있어 사람이 작업하는데 불편이 전혀 없다. 또한 이곳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중문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부엌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함으로서 사용자의 편의성을 배려한 것이다.
사랑채 누마루
안채에는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수맥이 집터 아래를 통과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관념이 있어서인지 집안에 우물을 설치한 집을 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집에 우물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집의 관리가 하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집주인이 가사를 전담했다면 설사 수맥의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우물을 집에 설치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집을 지은 사람은 그러한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현재 우물 옆에 기둥이 하나 설치되어 있고 그 기둥에서 건물의 상인방까지 나무를 가로지르고 그 나무를 도리삼아 지붕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우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물 위에는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다. 주인의 말로는 물을 맑게 하려고 숯을 다섯 가마를 넣었고 물이 차고 맑아 동네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다고 한다.
안채의 몸체는 전후퇴집의 형식으로 퇴칸 쪽에 모두 기둥을 세워 2고주 오량집의 구조로 만들었다. 이 집은 전후퇴집이기는 하지만 전면은 퇴칸으로 남아 있는 반면 후면 퇴칸은 흔적만 남아있다. 집의 발달과정을 보면 홑집, 전퇴집, 전후퇴집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사회가 발달하면서 건물을 보다 다양하게 사용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후퇴집도 초기에는 전퇴, 후퇴의 모습이 명확했지만 점점 방으로 사용되는 부분이 많아지면서 후대로 갈수록 특히 뒤에 있는 퇴칸은 평면상에 흔적만 남게되는 경우가 많게된다. 이러한 모습이 이 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뒤쪽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과거 도면에는 없었던 것이다.
중문과 내외담
안채로의 출입문이 두 곳이다 한쪽은 중문이고 반대편에도 샛문을 두었다. 이렇게 양쪽에 문을 둔 경우도 그리 흔치는 않다. 안채는 중문 건너편 쪽으로 안방과 부엌을 두었는데 부엌은 3칸 반의 규모로서 매우 큰 편에 속한다. 부엌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부엌에는 살강이 설치되어있는데 구조가 특이하다. 처마 밑에 살강을 설치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살강에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고 창도 설치하였는데 창이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형식이다. 또한 살강이 처마 밑에 설치될 경우 비가 들이치는 것을 우려하여 처마 밑까지 올리는데 이곳은 부엌 상부에 설치된 다락의 때문에 부엌 다락이 설치된 높이까지만 설치하였다.
우리나라 옛집의 부엌에 설치된 창은 모두가 살창이다. 이렇게 살창을 설치한 것은 환기 때문이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는 연기를 빨리 배기시키기 위하여 살창을 설치한다. 또한 여름에 음식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환기가 필수적이므로 살창을 설치하여 환기가 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살강에 설치된 창은 띠형식으로 길게 설치되었는데 양 끝단 각 1/8 정도는 살창이 되어 있으나 창문 길이의 3/4정도는 창호지가 붙은 창문이다. 왜 이렇게 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살 강
살강의 돌저귀 흔적
창호지가 붙여있는 창문의 창틀 상부에는 반원형 철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분명 창문을 여닫는 장치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여러모로 살펴보았을 때 이 창이 채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어설퍼 보인다. 또한 살강이 부엌 상부에 설치된 다락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낮게 만들어져 자칫 비가 들이쳐 창호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호지를 설치하였고 또한 부엌의 모든 창을 살창으로 하였음에도 유독 이곳만이 창호지를 발랐다는 것이 궁금증을 더한다.
부엌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다락을 너무 낮게 설치하여 크기에 비하여 부엌이 협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다락을 넓게 만든 것은 이 집의 살림규모와도 연관이 있다. 집주인이 보관하고 있는 유계화씨의 땅문서나 소작료에 관한 문서를 보면 이 주변 뿐 아니라 충청남도에까지 이 집안의 땅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가 집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력가의 집안에서 넓은 창고가 필요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화되어 현재에 맞추어 집을 사용하려 하다보니 오히려 이제는 불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낮은 천정 때문에 집주인이 아쉬워하고 있다. 이곳에서 살기 위하여 개조를 하려 하는데 부엌의 천정이 너무 낮아 입식부엌으로 꾸미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금 부엌 개조작업을 하고 있는데 바닥을 한자(30cm) 정도 바닥을 파서 높이를 적절히 맞추려 하고 있다.
이 집의 문화재명칭은 집이 문화재로 지정될 때의 주인의 이름을 차용해 유계화가옥으로 되어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집의 명칭은 모두가 남자주인의 이름을 차용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집주인도 당연히 남자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당시 소유주는 여성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돌아가신 유계화씨의 순탄치 않았던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 집주인 설명에 의하면 자신이 이 집을 유계화씨로부터 증여 받았다고 하였다. 유계화씨는 자신의 고모뻘되는 분이라고 한다. 유계화씨의 어머니가 유계화씨가 9살 때 남편을 잃었고, 얼마 뒤 혼자 살고 계신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유계화씨는 이화여전을 나왔을 정도 당시 인텔리였으나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계속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유계화씨가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추신 : 유계화씨는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입후한 조카가 재산을 탐내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현재 주인에게 의지했던 것이라고 한다.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지는 몇 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유계화가옥 뒤쪽으로도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자리에도 큰 한옥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한옥의 주인은 홍씨로서 홍판서댁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제시대 좌익활동을 하여 월북한 후 집안이 풍비박산나서 집도 다 사라졌다고 한다. 이념이 무엇인지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낼만큼 중요한 것이었을까 하는 회한에 빠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