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출신.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이박사는 1875년에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平山郡 馬山面)에서 청빈한 왕족(王族)이경선(李敬善,1837~1912)공과 서당훈장 김창은의 외동딸인 어머니 김해 김씨(1833~1896)의 3남 2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이 둘 있었으나 이박사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홍역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이 되었다. 그의 큰누님은 황해도 해주의 우씨 집안으로, 작은 누님은 평산의 심씨 집안으로 각각 출가했다. 이박사는 이씨가문의 6대독자다
이승만에게 조기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시골 서당 훈장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학식이 높았던 이승만의 어머니는 아들이 두세 살이 될 때부터 책을 읽어 주었다. 너무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어머니가 글을 알았기 때문에 유아기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이승만이 글을 조금씩 깨우치자 어머니는 <천자문>과 함께 일찌감치 한시를 짓는 시작(詩作)을 가르쳤다. 한시에 대한 조기교육 덕분에 이승만은 훗날에 감동을 주는 수려한 한시를 숱하게 남겼다. 그는 지식인 어머니 덕분에 서당에 입학하기 전부터 수준 높은 조기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곁에서 자상하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면, 아버지는 가끔씩 나타나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가르쳤다. 풍수와 족보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씨 왕조의 족보집을 한 보따리 던져 주고 달달 외우도록 엄명을 내렸다. 어린아이가 가계도가 복잡하기 그려진 족보집을 외우기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후에는 족보를 조그마한 요약집 형태로 만들어 암기를 하기도 했다. 족보집 외우기는 얼핏 불필요한 공부처럼 보이지만 난해한 내용들을 외우는 과정에서 한문 실력과 전통,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이승만은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10년 동안 도동서당에서 <사서오경>을 익히고 문장술을 연마했다. 명망 있는 한학자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이다. 영리했던 이승만은 서당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늘 장원을 차지했다. 그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열세 살 때부터 나이를 속여 해마다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일곱 번이나 연거푸 낙방했다. 이승만의 낙방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부정부패가 심한 당시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스무 살 때 서양학문을 배우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른 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만약 이승만이 과거에 급제했다면 미국 유학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기교육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한문 실력과 함께 서양 학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우리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왕조 가문의 영광을 타고난 이승만이 가장 빠른 조기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으로 꼽힌다. 이승만은 척박한 1870년대에 태어났지만 뼈대 있는 가문과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 형편 그리고 지식인 부모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양질의 조기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