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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함경과 니까야의 비교
1).6입처에 관한 경전
12처를 허망한 마음상태로 보는 사상적인 이유는 12연기와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전의 해석에서도 유래한다. 여기서는 일단 경전에서 사용되는 āyatana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12연기와 반야심경은 뒤에 다루도록 하겠다.
이중표 교수는 다음과 같은 잡아함경(二三九, 二四○)를 인용하여 6입이 번뇌에 묶여 있는 허망한 마음 이라고 설명한다.
我今當說結所繫法及結法。云何結所繫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結所繫法。云何結法。謂欲貪。是名結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번뇌에 묶여 있는 것과, 묶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하리라. 어떤 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묶고 있는 것인가? 욕탐, 이것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p.222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所取法及取法。云何所取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所取法。云何取法。謂欲貪。是名取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이제 취해지는 법과 취하는 법을 이야기하리라. 어떤 것이 취해지는 법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을 취해지는 법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취하는 법인가? 욕탐, 이것이 취하는 법이다.”p.224
위 경전에 상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의 [속박경]과 [취착경]을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속박되는 것(saññojaniyā dhammā)과 속박하는 것(saññoja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속박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탐이 그것을 속박하는 것이다."(SN.Ⅲ.167)
"비구들이여, 나는 취착되는 것(upādāniyā dhamma)과 취착하는 것(upādā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취착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탐은 그것을 취착하는 것이다."(SN.Ⅲ.167)
위와 같은 경전을 니까야에 비교해 보니 속박되는 것, 속박하는 것은 수동과 능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잡아함의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 ‘묶고 있는 것’(結法)은 수동과 능동을 살려서 ‘묶이는 것’과 ‘묶는 것’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眼과 色이 ‘묶이는 것’이라고 해서 眼과 色이 서로에게 묶이는 것은 아니다. 眼이 욕탐에 묶이고 色이 욕탐에 묶이는 것들이다. 묶는 것은 욕탐이다.
위 경전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는 상윳따니까야의 [꼿티까 경]을 보면 ‘묶이는 것’과 ‘묶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있다.
[꼿티까] ������벗이여, 싸리뿟따여,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인가,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입니까? 소리들이 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입니까? 냄새들이 코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혀가 맛들에 묶인 것입니까? 맛들이 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입니까? 감촉들이 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마노가 법들에 묶인 것입니까? 법들이 마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까여,
눈이 형상들에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chandarāgo)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도 소리들이 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도 냄새들이 코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혀가 맛들에 묶인 것도 맛들이 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도 감촉들이 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마노가 법에 묶인 것도 법이 마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던가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
[꼿티따]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지 않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이와 같이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게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중략
[싸리뿟따] ������벗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 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있습니다.........중략
벗이여, 세존께서도 눈이 있습니다. 세존은 그 눈으로 형상을 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욕탐이 없으므로 세존의 마음은 잘 해탈되어 있습니다. (SN.Ⅳ.163)
위에서 이중표교수가 해석한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과, 취해지는 법(所取法)이란 내입처와 외입처로 나누어진 12처를 말한다. 이들은 각각 욕탐에 묶여지는 법이다. 내입처와 외입처의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은 묶는 법(結法)이고 취하는 법(取法)이다. 이중표 교수는 12처를 욕탐에 ‘묶이는 법’으로 보지 않고 ‘번뇌에 묶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12처를 “허망한 마음”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의 설명은 분명하다. “눈과 형상이 서로 묶여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있는 것도 아니라 이 두 마리 소는 모두 밧줄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 밧줄이란 욕탐(chandarāgo)의 밧줄이다. 만일 눈이 형상들에 묶이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없애거나 파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경전은 ‘눈이 형상들에 묶여 있다면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범행)은 불가능 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지 않기에 살아서 이 몸을 가지고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범행)이 가능한 것이다.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chandarāgo)의 밧줄을 끊으면 되기 때문이다. 세존도 눈이 있어 그 눈으로 형상을 보지만 세존은 욕탐(chandarāgo)의 밧줄을 끊었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명확하고 합리적인 불교수행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12처를 ‘번뇌에 묶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12처는 우리의 허망한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거나 “생사윤회의 중생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이입처를 없애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주장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음으로 잡아함경 335번의 [제일의 공경]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이 경전은 니까야와 상응하는 경전이 없다.
眼生時無 有來處。滅時無有去處。如是眼不實而生。生已盡滅。有業報而無作者。
“비구들이여, ‘보는 것’은 생길 때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부실하게 생겨서 생기면 곧 남김없이 사라지나니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p.215
이 경전에서 이중표교수는 眼을 안입처라고 보고 안입처를 ‘보는 것’ ‘보는 놈’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안입처와 색입처는 "이렇게 보는 것을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안입처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색입처“p.214라고 말한다.
이중표 교수처럼 眼을 이해하고 위 경전을 다시 읽어보면
‘‘비구들이여,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생길 때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부실하게 생겨서 생기면 곧 남김없이 사라지나니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부실하게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는 안입처는 없애야 할 허망한 마음 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경전을 그의 의견에 따라 해석하면 무명이나 욕탐을 없애지 않고도 안입처가 생기고 사라진다. 무명이 생기거나 소멸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버려야 할 허망한 마음이라는 안입처가 수시로 생기고 사라진다는 말인가? 이 경전에서 眼은 대상이 나타나면 보는 작용이 나타나고 대상이 사라지면 보는 작용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눈과 대상이 만나는 장소, 눈이 대상과 만날 때 안식이 일어나는 장소로 봐야 한다.
청정도론은 눈과 형상이 만날 때 “우리가 만날 때 안식이 일어나기를” 이라고 생각하거나 바라지 않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서로에게 ‘호기심도 없고 관심도 없는’ 안입처와 색입처를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는 놈(안입처)이고,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색입처)”이 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대구치라경의 해석을 보자. 특이한 것은 중아함 211경인 大拘絺羅經은 사리뿟따가 꼬띠까에게 물음을 전지는 경인데 이경에 상응하는 니까야의 대방등경 (MN.43)은 꼬띠까가 사리뿟따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誰爲彼盡受境界。誰爲彼依耶。尊者大拘絺羅答曰。五根異行․異境界。各各自受境界。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意爲彼盡受境界。意爲彼依。
“이렇게 오근은 각기 다른 경계를 상대로 활동하여 안근과 이비설신근은 각기 자신의 경계만을 인식하는데,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것은 어떤 것이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구치라가 대답했다. 오근이 개별적으로 인식한 내용은 모두 다 경계로 인식하는 것도 意며,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意이다.” P.248
여기에 상응하는 마지마니까야 43번경은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벗이여, 오근은 각각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가지고 서로서로 경계와 대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입니다. 벗이여, 오근은 각각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가지지만, 서로가 서로의 경계와 대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이것들(오근)에게 마노는 의지처이고(Imesaṃ mano paṭisaraṇaṃ) 마노가 그들의 경계와 대상을 경험합니다(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MN.Ⅰ.296)
여기서 경계(gocara)와 대상(visayaṃ)이라는 단어는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해서 눈은 색을 경험할 때 色은 눈의 경계(gocara)이기도 하고 대상(visayaṃ)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문은 경계와대상을 간단히 境界라고 번역하였다. 意爲彼盡受境界는 마노가 오근의 대상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고, 意爲彼依는 오근에게 마노는 의지처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눈은 색(경계,대상)을 경험하고 귀는 소리(경계,대상)를 경험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만의 대상을 경험 할뿐이고 다른 대상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근(마노)은 오근들의 대상을 모두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意爲彼盡受境界 意爲彼依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렇다면 의근이 인식한 사과는 우리의 몸밖에 있습니까? 구치라는 그렇치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구치라 존자는 의근이 대상이 되는 경계는 의근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p.251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p.252
그러나 사과는 우리의 몸 밖 있다. 눈이 그것을 보고 사과를 인식하면 身口意로 어떠한 행위(수상행)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모르는 것을 계속 보고 듣고 경험하며 배운다. 어째서 우리가 새롭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란 말인가? 그는 “오근에게 마노는 의지처”라는 말을 “의근이 대상이 되는 경계는 의근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석하고는 모든 걸 마음 안의 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인식의 폭이 증가하고, 이렇게 폭넓어진 인식을 토대로 새롭게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가갑니다. 이와 같은 삶에는 나와 세계가 분별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p.2.28
무명이 멸해야 사라지는 육입처, 멸진정에서 사라지는 육입처,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는 것도 욕탐이라고 말하고, “모든 사물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위처럼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 나와 세계가 분별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깨달았을 때라야 비로서 “허망한 마음”인 육입처가 없어진다는데 우리의 생명현상인 육근이 활동할 때는 육입처는 잠시 멈추어 주는가?===========================================================
--> 이글의 원본은 원래 아주 긴글입니다. 산그리워님이 윈래 전체를 올리셨는데 토론이 산만해질까해서 부분을 올려달라시니 잘 모르신다 하셔서 제가 대신 발체해서 올립니다.
이에 산그리워님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산그리워님이 쓰셨던 댓글-->
보는 것, 보이는 것을 불교에서는 색이라 한다...이중표교수님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것= 안입처, 보이는 것= 색입처라 하니
파초님은 아니라고 하셨고요....
윗글의 주장은 새겨 보시구요.
윗글에서 이중표교수님의 보는 것, 보이는 것만을 발췌해 봅니다....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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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리워
4. 아함경과 니까야 비교.
1). 육입처에 대한 경전
이 글에서 이교수님은 보는 것= 안입처, 보이는 것= 색입처라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긴 글이어서 읽기가 복잡하지만 두 분의 견해에 나름대로 생각해 보십시요.....
파초님, 보는 것= 안입처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노랑이가 가져온 이교수 보는 것 보이는것 글
->
[이렇게 보는 것을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안입처(眼入處)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색입처(色入處)라고 합니다.-불교이해실천에서-]
[우리는 눈이나 귀, 코, 혀, 몸 등으로 보이거나 만져지면 그것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는 눈, 귀, 코, 혀, 몸 등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불교에서는 色이라고 부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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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노랑님의 노랑으로 색도 입혀 주시고 감사드립니다...
글은 올려드렸지만 사실 너무도 반복되고 있습니다.이제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지금 몇날을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걸까요? 보는것 보이는 것은 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고 무척 많이 이야기 해드렸던 것 같은데요.
1. 후박 :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眼과 色이 ‘묶이는 것’이라고 해서 眼과 色이 서로에게 묶이는 것은 아니다.
-> 라고 하고 있는데,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a)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묶고 있는 것인가? [욕탐], 이것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b)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을 취해지는 법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취하는 법인가? [욕탐], 이것이 취하는 법이다.”
1.1. 후박이 인용한 어디에 이교수가 '안이 색을, 색이 안'이 묶고 있다고 하는가?
그럼에도 후박은 '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라고 하니 무슨 이런 무식한 이해가 있느냐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글이 버젓이 돌고 있으니.. 그 글을 보는 자 역시 똑같이 무식한 자들 뿐인가?..
산님도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으리라.
2. 멍청한 자는 계속 멍청한 소리를 중얼거린다.
후박 : 무명이나 욕탐을 없애지 않고도 안입처가 생기고 사라진다. 무명이 생기거나 소멸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버려야 할 허망한 마음이라는 안입처가 수시로 생기고 사라진다는 말인가?
-> 라고 하는데..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독교와 같은 상견이나 과학과 같은 단견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깨뜨리는 게 아닌가?
상, 단견이 생기는 이유는?.. 실재하는 게 있다고 믿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 실재가 항상한다고 믿으면 힌두교 같은 게 나오고, 항상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이 생만 즐기자는 쾌락이나 허무가 나온다.
곧 [실재]를 믿는 게 왠수인 것이다
3. 만일 후박이 말하듯 안입처등 12입처가 수시로 사라지고 생기는 것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그래도 중생이 나올 수 있을까?..
이미 다 깨쳤지.
불행하게도 [나]로 알고 있는 6처가 어느 시기 동안은 항상하는 것으로 알기에 고통이 생기고 생사가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후박은 불교를 무엇으로 공부했는지??.. ㅉㅉㅉ
4. 모든 것은 무상하다. 변한다. 그러니 어제의 후박이 오늘의 후박과는 다르리라.
그런데 때로는 아주 천천히 변하는 것도 있다.
어제의 후박이 천천히 맴맴하고 있다면..
“의근이 대상이 되는 경계는 의근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석하고는 모든 걸 마음 안의 일로 만들어 버린다
-> 라고 말하듯,
그는 '“의근이 대상이 되는 경계는 의근에 의지하고 있다'" 는 말의 뜻을 일백번 고쳐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이곳에 오는 님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님이 후박님을 좋아 한다면. .위와 같은 엉라이 글을 올리지 마십시요.
후박님은 물론 글을 올리는 님 역시 창피한 수준이 됩니다.
불자에게 가장 큰 죄는 엉터리 佛法을 전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웃 방에 전문을 산그리워님이 올려놓았군요..^^
허. 참^^..
관리자님 이웃방에 있는 후박님의 창피한 글을 지워주셨으면 합니다..^^()
과거에 올라온 것으로 충분하니, 이제는 이곳 카페에 올라올 내용이 못 됩니다..
5. 후박님이 인용한 꼿띠카 경을 보면
눈이 형상들에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 라고 합니다, 곧 2법을 결박하는 것은 욕탐인데, 그 욕탐은 2법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게 참이라면 욕탐을 멸하더라도 2법은 그대로 있을 겁니다, 단지 결박이 되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6내외입처는 6근경과 근원이 같은 실재하는 법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지요.
하여 6입처는 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6. 같은 내용이 <잡아함 250경>에 전합니다.
존자 마하 구치라여, 비유하면 검고 흰 두 마리 소가 한 멍에와 굴레에 묶여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검은 소가 흰 소를 묶었는가, 흰 소가 검은 소를 묶었는가' 하고 묻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것을 바른 물음이라고 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검은 소가 흰 소를 묶은 것도 아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묶은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에 멍에나 혹은 굴레를 씌우면 그것이 곧 묶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소가 소를 묶고 있는 개 아니면서 멍에나 굴레에 비유된 욕탐이 2법을 묶고 있지만, 욕탐이 2법에 의해 생겼다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7. 다시 비유로 돌아가 두 소를 묶고 있는 멍에나 굴레라 하었는데..
멍에가 두 소를 조건으로 생겨난다고 하는데.. 소는 무슨 신통력으로 자기와 전혀 다른 멍에를 만들 수 있을까요?..
설마 되새김질을 하려고 저장해 두었던 짚 등을 꼬아 멍에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8. 2법에 의해 욕탐이 생겨나, 그 욕탐에 의해 2법이 묶인다고 하는데.. 무슨 요술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누에가 스스로 집을 만들어 그 속에 갖힌다고 비유하는 게 좋았을까?..
저는 의사입니다. 대학 1학년때 불교학생회 활동했으니 불교와는 30년넘게 가까이 지냈지요. 부처되겠다는 열망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를수도 잘못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론할 수 없다고라, 대화의 기본이 안 되었다고라 이런 말 운운하면서 자기 주장이 틀리면서 부처님 법을 호도하면서 이렇게 글 올리시면 아니되지요...색은 물질이다 하면 큰일납니다. 저는 30년넘게 존재를 추적했습니다. 존재로 부처님 법에 다가서기란 뱅글뱅글 돌고 돌고 산전수전 돌고돌고입니다.
노랑님, 초심님, 파초님, 그리고 나....모두 불자입니다.
불자끼리 합심해야 적어도 불교가 바로 섭니다.
존중합시다!!!!
설명해달라 하셔서 설명을 드리면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근거가 부족한 내 주장을 계속해서 피력하셔서 일어난 일이죠.
최근에는 님께서 안=색을 주장하기 위해 가져온 자료 육입처경은 안=색이 아니라 촉에서 색수상행식을 설명하고 있었고 이 교수 자료는 안=색을 뒤바침할만한 이야기가 없는데 작은 언어문제로 이교수가 안=색이라 뒤박침 하는 것처럼 말씀 하셨습니다. 제가 아함중도를 뒤져 페이지쪽까지 제시하며 색은 안=색이 아니라 18계의 6계의 4계라고 보여드렸는데 살펴보셨나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분들도 경을 올려드렸고 설명을 나름대로 드렸는데 귀를 기우리셨나 싶어요.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무려 몇날을 보냈는지 뿔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모두 바쁜시간내어 적어 드렸는데요.
산님께서 적어도 설명해달라 해서 설명한 성의를 받아 드린다면
스스로의 견해는 잠시 뒤로 하고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함께
풀어가는 것이 현명 했었을 것입니다.
모두 인내를 가지고 대하지만 한계를 맞이하여 하신 말이라 생각 해주셨으면 합니다.그리고 공부 많이 하신 분들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단정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우리는 나타난 글로 대화를 나눌 뿐입니다. 이곳에 글쓰시는 분들은 모두 직접 포교일선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십니다. 산님에게 바램이 있다면 상대가 경이나 자료를 제시 하여 보여드리면 자기 생각을 한번쯤 보류하고 자료나 경을 정검 해주셨으면 합니다.
()..
먼저 산그리워 님께 사과드립니다..()..
어느 때 부터 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겨 있었습니다.
왜그랬을까?.. 하고 보니..
님의 견해인.. 12연기법에서 6입처를 색(온)이라 고집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님은 아직도 [12연기법의 6입처]를 색온이라 하고 계십니다.
초심은 12처->18계->5온 순으로 생겨난다고 하듯,
6입처는 [아직] 색온은 아니고, 색온이 될 질료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워님은 계속해서 안입처가 색(온)이라고 하는 예를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초심에게 안입처는 색온이 아니라는 것으로 계속 보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 존중을 아주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말하듯 사람은 누구나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는 이곳 회원은 물론 이교수, 심지어 <잡아함경>이나 <니까야>를 편집한 불제자님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 에 집중을 하게 되지요.
하여 산그리워님에게 묻습니다.
1) 님께서 5온의 색이 촉이 생기기 전인 6입처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2) 그렇게 이해할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해프님이 일어날까요?..
3) 색온을 포함한 5온을 초심은 존재화가 된 有로 봅니다. 그런데 님은 색(온)을 존재로 보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를.. 산그리워님을.. 무시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1). 파초님의 질의에 답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기가 고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기전이라면 문맥상 6입은 색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에도 '안과 색이 연하여 안식이 생하고 이 셋의 화합을 촉이라 하고 촉연후에 수생행이 발생한다'합니다.
안과 색이 색이니 촉 이전에 발생하는 것이고요...
산님은 바로 오온에 대해 수상행은 바로로 위에 적은것과 같이 하셨고
색과 식은 [안이비설신= 색, 색성향미촉= 색.
의=식, 법= 식]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경에 의하면 촉은 12처(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와 6식 입니다.
님의 논리라면 수상행은 색(안이비설신색성행미촉)과 식(의,법)을 인연하여 일어난다는 말인데 수상행은 색과 식을 인연할까요?
그리고 오온의 색수상행식 배열을 보면 식이 마지막에 있습니다.그런데 산님의 말씀처럼 12처 의,법이 오온의 식이라면 12연기 육입-촉-수..로 보면
색,식,수상행이 됩니다. 이러한 교리 낫섭니다.
2). 12연기는 저는 상좌부 이론이라고 봅니다.
상좌부에서 밝혔듯 12연기는 삼세를 말하고 9지연기는 찰나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제 고집 같지만 제가 이해못하는 12연기는 교리라고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9지연기는 처음, 중간, 끝이 분명하지만 12연기는 무명- 행....처음부터 비약이라고 봅니다...
부처님 법이라고 보기보다는 상상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불교를 처음하는 불자에게 너무도 어려운 교리가 됩니다.
저한테도 어려우니까요....9지연기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12연기는 현재에 나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현재 의식구조'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12연기가 상좌부 견해라는 것은 12연기를 태생적 삼세양중으로 만 생각하시는 님의 개인적 생각일 뿐입니다.
12연기를 님이 이해 못하는 이유로 부처님법이 아니고 상상이고 비약이라는 것은 12연기 부당성을 밝히는데 근거가 안됩니다.님의 이해도에 따라 부처님법이 되고 안되고 하는 것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본 아함경에 有에 대해 말씀한 경이 있습니다.
有는 苦를 말합니다....
존재화는 이해할 수 있지만 존재는 아니라고 봅니다...
원하시면 이 경을 실어오겠습니다....
오온의 존재화가 된 존재란 님이 말하는 고와 같은말입니다. 초심님이 사용한 존재란 의식이 존재화 된 후 만들어진 영역을 간단히 말한 것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객관적 사물로써 존재가 아니고 법입니다. 지난번 용수때와 같은 愚가 일어나신 것 같습니다.님의 범주로 기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긴 초심님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으니 경 가져 오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논의가 진행되면서 몇번이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상좌부에서 색을 물질이라고 보면 열반에 이르는데 큰일나는가?
2). 색이 촉인연후 발생한다면 열반에 이르는데 큰일나는가?
1)은 큰일은 아니라도 '큰일까지' 정도는 생각해씁니다.
2)는 12연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리수(?)를 둔 까닭입니다...
쉽고도 명확한 교리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교학자 아니고 역량도 부족하지만 이런 생각이 모여
초심님이 말씀하는 부처님 의도에 쉽게 다가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들었다.
어떤 것이 색모임이며, 어떤 것이 수상행식 집인가..
云何色集。受.想.行.識集。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합하여 촉이 생기며, 촉을 인연하여 수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생기며···이리하여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나니, 이것을 색의 모임이라 하느니라.
緣眼及色眼識生。三事和合生觸。緣觸生受。緣受
生愛。乃至純大
苦聚生。是名色集。
이와 같이 이비설신의 을 인연하는 것도 그러하며, 의와 법을 인연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합하여 촉이 생기며, 촉을 인연하여 수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생기며···이리하여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까지 생기게 되나니, 이것을 물질의 모임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모임이라 하느니라.
如是。緣
耳.鼻.舌.身.意。緣意及法生意識。三事和合
生觸。緣觸生受。緣受生愛。如是乃集。]
->이경은 육입처 68경 님이 가져오신 경입니다. 모두 촉인연후 색수상행식이라고 설명합니다.
68경은 부처가 깨달아 열반을 얻어 중생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경에서 보는 바와같이 촉인연후 색수상행식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므로
[색이 촉인연 후 일어난다는 것은 열반을 이르는데 큰일 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을 이르는 길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가져 오신 경이라 여쭙는데요.
제가 위 댓글 2개에 올린 68경에 촉인연후 색이 나오나요 안나오나요?
답변 해주셨으면 합니다.
12연기를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고 그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하시는 그 단정은 무리한 자신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이해 못하면 부처님 법이 아닌 것입니까? 교리를 정확히 설명하지도 못하시면서 엉뚱한 주장만 되풀이 하고 계시니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잘 안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육입처경에서는 색,수,상,행,식 자체가 촉 이후에 모두 발생하는 것을 글자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경을 퍼오시면서 색식이 먼저고 촉이후 수상행만 나중이라 우기시니..이런 주장을 보고 존중감이 잘 안 생기지요.
모든 경은 색- 촉- 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노랑님이 인용한 경도 색-촉-수를 말합니다.
노랑님, 파초님이 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지요...
색과 색이 인연해서 촉이 생긴다는 말이고요.
안과 색이 색이 아니다 하시니 빚어지는 오류입니다.
안과 색은 색입니다.....
계속 아니다 하시니 할 말씀이 없습니다.....
색과 색이 인연해서 촉이 생긴다 하시니 이것은 아비달마의 유물론을 연상시킵니다. 색과 색이 인연해서 촉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안과 색이 인연하여 안식이 생기고 그 셋의 화합이 촉입니다.
헌데 그 안과 색을 자의적으로 색과 색으로 바꾸시기까지 하시는군요. 또 안식은 어디로 가고 색과 색이 인연해서 촉이 되네요... 정말 법을 혼자 마구 만드십니다.
안과 색이 인연해서 생기는 안식(眼識)은 색수상행식 중 무엇일까요?
노랑님, 파초님께 여쭤봅니다......
님은 그 안식이 색수상행식 중의 식이라도 되는 줄 아시는가 봅니다....안과 색이 인연해서 생기는 안식이 그대로 오온의 식과 같은 줄 아시는데 줄긋기를 벗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의사분께서요.
그것은 그렇게 질문할 성질이 아닙니다. 식이라 하니 이 식이 저 식이 되고 저 식이 이 식이 되고... 글자 같다고 같은 뜻, 같은 내용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지금 제일 문제입니다.
이상하네요. 저의 개인적 생각일수도 있으니 여러분들에게 문의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