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신세 되어
김 상 립
올 봄부터 나에게는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새벽 네 시쯤이면 잠을 깨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느닷없이 허기가 일어난다. 다급한 김에 곁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마셔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날 밝기를 기다려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하고 숟가락을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허기는 사라진다. 마치 바닥 모를 깊은 동굴에서 솟아오르는 오스스한 기운까지 더해져 내 몸을 뒤흔들던 허기가 돌연 멀리 가버리니 기막힐 일이다. 지금의 내 처지에서 보면 달리 출세 길을 꿈꾸어 몸살을 내거나 돈을 더 벌지 못해 안달할 입장도 아니다. 또 뒤늦게 명예를 얻지 못해 억울하다거나 숨겨진 부채나 여자문제로 초조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새벽 허기가 나를 공격하니 분명 그 이유가 따로 있을성싶다.
생각해 보면 돈을 불리는 솜씨도 신통찮고 성격마저 불 같은 자가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잘 지내온 것은, 내가 세상을 향해 베푼 것보다는 부지불식간에 받은 게 더 많은 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나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우선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하여 뭐라도 세상에 갚음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퇴직할 무렵 아내가 중병을 얻어 여태까지 앓고 있고, 그 사람을 간호하던 나도 건강이 여의치 않아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결과적으로 내가 세상에 진 빚을 조금씩 갚기는커녕, 지난 십여 년 동안 되려 빚을 늘리며 살았다는 안타까움에서 생긴 허기가 아닐까 하는 감이 온다.
나는 팔순까지 이렇다 할 큰 병을 앓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은연중 건강을 과신한 까닭인지 건강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하고 싶은 짓이나 먹고 싶은 것을 건강 때문에 통제하는 짓은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팔순에 들어서니 갑자기 몸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기 시작하여 끝내는 심각한 처지에 놓였다. 아마도 오랜 세월 내 멋대로 살아온 벌을 이제야 톡톡히 받는 모양이다. 그 동안 가까운 지인들이 병고로 시달릴 때, 내가 바꿔진 입장에 서서 깊이 생각하고 진정으로 위로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되는지 선뜻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파 보니 진정 어린 조언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절실히 느낀다. 그 뿐인가? 지인들을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나 도움을 줘야 할 때에도, 내 자신이 얼마나 마음을 다해 행동했는지를 되돌아보면, 그 또한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니 이런 일 역시 마음에 빚이다.
참 어리석었다. 내가 금융기관이나 남에게서 돈을 차용했을 경우 이외에는 빚을 졌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빚지지 않으려고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모질게 견뎌왔는지 나 이외에는 모를 터이다. 이제와 보니 엉뚱하게도 사람에게 진 빚이 돈보다 더 무거운 빚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빚을 갚는 데는 때가 없다는 것을 더 일찍 깨우쳐야 했다. 살기가 좀 나아지면, 시간여유가 생기면, 적당한 기회가 찾아오면 행동으로 옮기자는 맹세는 죄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가 진짜 노인이 되니 스승이나 선배들은 거의가 먼 길 가셨고, 신세 졌던 이들 중에도 연락 닿지 않는 분이 대부분이니 한숨만 나온다. 얼마나 경우 없이 살았는지 혼자서도 부끄럽다.
내가 노인반열에 들게 되면 이런저런 일은 잊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리라 믿은 것이 바보였다. 혼자 있는 멍한 시간이 늘어가니 내 생각은 수시로 잠재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가 내가 잘못한 일들, 특히 대인관계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실수나 과오까지도 용케 파내어 되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래 교류해 왔던 품위 있고 심성 고운 수필동인들에게서 받은 분에 넘치는 도타운 정은 내 의식이 영 끊어질 때 까지는 빚으로 남을 것 같다.
긴 세월을 두고 내게 행운처럼 찾아온 좋은 일이나 내 힘으로 이루어 내었다 믿었던 작은 성공까지도, 모두가 주변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고 무척 당황스럽다. 오직 나의 능력으로 썼다고 여겼던 수필작품들도, 결국은 지인들과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함께 만들었던 글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연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 쓰기에서마저 빚을 지고 만 셈이다. 이처럼 내가 홀로 성취했다 여겼던 많은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빚으로 남아 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기는커녕, 끝내 허기의 탈을 쓰고라도 찾아오다니 삶의 업보가 섬뜩하도록 무섭다. 이젠 아무리 새벽 허기가 홀로 감당하기에 벅차더라도 억울해하지 말자며 온 몸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아! 이 많은 빚을 어쩌나 싶다.
첫댓글 남편 선생님 "빚쟁이 신세가 되어"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많은 걸 깨닭게 됩니다. 특히 자영업 하는 사람으로서 더욱더 깨닭게 됩니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일들을요. 저도 세상 사람들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입장이라 선생님 글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감사 합니다.
사람이 나이들면 내세우고 뻐길것도 없지만 진정으로 후회투성이 입니다.
보다 철저히 보다 냉철하게 참회함으로써 삶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벼워
지리라 생각합니다.
건강도 여의치 않으신데 이렇게 진솔한 작품을 올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글 한편에 10년 빚을 갚은 것으로 계산합니다. 진솔한 글 한편의 가치가 그보다 더 크지만 10년 빚 정도는 갚았다고 제가 후배 문인으로서 인정해 드립니다. ^^
이제 일곱 편 만 더 쓰시면 완전 탕감입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요.
말씀이라도 그리하시니
기분이 훨 좋습니다.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임표회장님.
누구나 빚을 지고 삽니다.
남평 자문위원님, 힘 내세요.^^
고맙습니다.
신회장님.
여러회원들의 글에 제일
열심으로 댓글다는 분이
바로 신노우 회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