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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이후까지 지리산 등 산악 지대에서 활동한 빨치산과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교전 및 토벌 작전.
[지리산의 자연 조건과 특징]
지리산은 사람 몸에 비유할 때 우리나라 척추에 해당하는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다, 다시 서남쪽으로 갈라져 간 끝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악집단이다. 1967년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높이 1,915m로, 한라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정상인 천왕봉[높이 1,500m]을 중심으로 반야봉, 제석봉, 촛대봉 등 높이가 1,500m가 넘는 거대한 봉우리들이 10여 개나 구름 위로 솟아 있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도 20여 개이며,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진 명산 중의 명산이다. 지리산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등 3개 도와 5개 시·군을 아우르며 둘레 320㎞, 넓이 472㎢에 달한다. 경상남도 함양군·산청군·하동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이 지리산 지역으로 걸쳐 있으며 주된 봉우리는 주로 함양군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중국 전설에 의하면 동쪽 삼신(三神)산이 있는데,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 방장산[지리산]이 이에 해당한다. 삼신산에는 늙거나 죽지 않는 불로 불사초가 있어 진시황과 한나라 무제(武帝)가 선남선녀 3,000명을 보내어 찾아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지리산은 영험함과 신비감을 간직한 신령스러운 곳으로 오늘날까지 지역 민중들의 삶과 고락을 함께해 오고 있다. 또한 지리산의 천왕봉[어머니신], 반야봉[아버지신], 노고단[할머니신]은 3대 영봉으로 추앙되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산신 사상의 기원이 되어 왔다. 천왕봉 아래 있는 성모 형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네 가지 산신 설화가 있다. 첫째, 고려 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황후설과 둘째,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불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셋째, 무당설, 넷째, 법우화상(法祐和尙)과 무당의 관계설이 있다. 이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경승지와 관광자원을 포함하고 있는 함양의 관광지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과 빨치산 투쟁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의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빨치산 부대와 함양]
해방과 분단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되자, 우리 민족은 우리 손으로 통일국가 수립을 이루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의 군정(軍政)이 실시되면서 민족의 기대와 달리 남북 분단이 시작되었다. 1948년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시행이 다가오자,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여순사건]이다. 여기에는 해방 후 활동해 오던 좌익세력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미국 군정은 경찰과 국방경비대를 동원하여 반란 사건들을 진압하였다.
이 가운데 지리산 빨치산 형성과 직접 관계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실시한 숙군(肅軍) 과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군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 1948년 4월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차출된 군인 2,000여 명이 파병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4연대 반란군과 지방 좌익세력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인근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유격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들을 일컬어 빨치산이라 부른다. 빨치산이란 ‘파르티잔(partisan, partizan)’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게릴라부대]를 말한다. 한국사에서는 ‘좌익’, ‘공산비적’, ‘공비’ 등으로도 불렸다. 반란군은 전라남도의 경우 구례군과 광양군의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 덕유산·백운산·회문산·입암산 일대에 분산 은거하여 유격 근거지를 구축하게 된다. 거창군·산청군·함양군·합천군 등 경상남도 지역에도 지리산과 주변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한편 북한은 남한에서 월북해 올라간 좌익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1948년 1월 1일 군사교육기관인 ‘강동정치학원’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남로당 등 좌익 출신을 훈련시키고, 인민유격대로 양성한다. 1948년 11월부터는 남한으로 남파시켰는데, 1950년 3월까지 총 10차에 걸쳐 수천 명의 유격대원을 남한에 내려보낸 뒤 기존 빨치산부대와 합류시켜 무장대를 조직하였다. 1949년 여름 당시 함양을 포함한 지리산 자락은 14연대 반란군의 활동 근거지인 동시에 북한에서 파견한 인민유격대의 활동 거점 지역이었다. 이 가운데 유격대장 이현상의 지휘하에 있던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650명의 막강한 전력을 가진 부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유격대는 어떻게 생활하였을까. 유격대가 처음 조직될 당시는 낫, 칼과 같은 초보적인 무기로 무장하였지만, 점차 카빈총, M1,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해 갔다. 특히 지리산 지구에는 무기 수리와 폭탄 제조를 위한 철공장이 운영되었다. 제2병단 사령부에는 무전대와 촬영기대도 배속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유격대원들의 옷을 만들거나 수선해서 입는 장비와 시설들도 갖추고 있었다. 유격부대가 해방시킨 마을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해 신문과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부락 인민에게 배포하는 선전 활동도 벌였다. 이처럼 지리산 지역에서 빨치산의 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은 유격지구와 가까운 마을 주민들로부터 지원과 협조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빨치산은 군인과 경찰의 수색이 미치지 못하는 산간지역을 소위 ‘민주부락’이라 부르며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는 보급처로 활용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빨치산들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대한민국 국군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전투사령부(1948년 10월), 호남방면전투사령부(1948년 10월 30일~11월 30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1949년 3~5월, 사령관 정일권 준장) 등을 설치하여 군경 합동으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소위 ‘민주부락’의 주민들은 낮에는 군경의 토벌과 색출에 협조해야 했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들의 요청에 협조해야 하는 이중 고통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고문당하거나 사살되기도 하는 등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특히 산악지대에서 겨울철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힘든 조건을 이용한 ‘동계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토벌이 이루어졌다. 군경은 산청군과 함양군에 걸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집중적으로 토벌 작전을 계속하였다. 함양군은 북쪽으로는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깃대봉, 월봉산, 황석산 등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민간 마을이 지리산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였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은 1949년 12월 29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청군·함양군·하동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50년 3월 15일까지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산청군과 함양군 등의 많은 민간인이 토벌대와 진압군에 의해 집단 희생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토벌 작전에 나선 군경은 빨치산과 직접 전투를 벌이거나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작전지역 산간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는 소개작전으로 민간인과의 연계 가능성을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지리산 자락에 있었던 함양군의 마천면, 휴천면, 유림면의 마을 주민들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발발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인 정순덕이 붙잡힐 때까지 15년의 세월 동안 빨치산과 아군 양측에 의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빨치산 남부군을 소재로 한 이태의 수기 『남부군』에 나오듯 겨울철이 되면 지리산의 천왕봉, 반야봉, 칠선골, 백무골 등 응달의 골짜기마다 토벌군의 초소가 배치되지 않은 지역이 없었다.
[한국전쟁과 지리산-함양 빨치산 전투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내 활동하던 빨치산 부대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조선인민군과 합류하여 교전에 투입되거나, 후방에서 조력하는 제2전선 임무를 맡았다. 1951년 5월, 남한 전역에 걸쳐 활동하던 6개의 빨치산 총 부대들이 도당회의를 열어 지금까지의 분산된 유격투쟁을 통합·지휘할 지휘본부를 지리산에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으로 남한 유격대 총괄부대인 ‘남부군’이 탄생하였으며 지휘관은 이현상이 맡았다. 남부군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북한 인민군의 전투 작전에 따라 제2전선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경상남도 함양군 일대에서도 국군과 유격대 간의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발발 시간순으로 몇 가지 전투 사례를 들면 이러하다. 1949년 1월 1일 일어난 ‘문하전투’는 문정마을 전투부대[주재소장 최홍식, 울산에서 온 지원부대 40명]와 반란군의 기습으로 경찰관 8명이 전사하고 반란군 1명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된 사건이다.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여세를 몰아 7월 25일 육십령 고개를 넘어 함양으로 진격한 뒤, 북한군 4사단이 안의군과 하동군에 도달하자 미 8군 사령관 및 국군의 합동작전으로 7월 24~29일까지 벌인 ‘함안·안의 방어 전투’도 있다. 1950년 10월에는 인민군의 낙동강 전투 패배 후 퇴로가 막힌 인민군들이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에 합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무제봉 진관고지에서 함양전투경찰과 빨치산 부대 간에 교전이 발생하여 수십 명이 사살되고 적군 5명 생포, 인민군의 직사포 1문이 노획되는 전과를 올린 일명 ‘진관고지 전투’가 발생한다. 1951년 2월 7일에는 국군 11사단 소속 9연대 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중 “견벽청야 작전”[유격지구 모든 산림을 비롯하여 산간마을을 불살라 없애는 소개작전으로, 적의 보급로와 숙식을 차단함으로써 빨치산 세력을 약화하는 동시에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적을 한꺼번에 소탕할 수 있는 작전이다. 견벽청야 작전으로 엄천 지구 오지마을인 송전·운서·문정 3개리의 200여 가구, 600여 명이 소개 명령으로 마을을 떠났다.]을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공비들과 내통한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송정마을 일대가 방화로 폐허가 되자 주민들은 식량이나 가축 등을 문하·한남·남호 등에 숨겨놓고 낮에는 일, 밤에는 농막을 지어 수색특공대로 이를 감시하였다. 1951년 4월 1일에는 노장대에 머물던 빨치산 이영희 부대원 약 100명이 세동마을을 지나 수성골로 이동 중 노출되어 집중 사격으로 7명 사망하고 2명이 생포된 ‘세동 전투’가 발생한다. 1951년 12월 10일에는 한국전쟁 중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금반리에서 충남 제4지대 빨치산부대와 국군 아군 1개 중대 병력, 휴천지서 경찰관 30명, 특공대 120명이 10시간 넘게 교전을 벌인 ‘휴천 금반리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지리산 동북지락의 울창한 산악지형을 이용한 빨치산들의 자연 비트[비밀 아지트]에는 이영애 부대, 이영상 부대 2개 대대 수백 명이 머물고 있었다. 이 외에도 경찰 207 전투부대 150명이 산청군 덕산골의 빨치산과 교전하면서 노장대로 진격하던 중에 벌어진 ‘노장대 전투’, 1952년 2월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 고지를 점령한 빨치산 부대와 이를 반격한 국군 토벌대 간에 벌어진 ‘동호고지 전투’ 등 수없이 많은 전투가 전쟁 기간 동안 함양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지리산 빨치산의 최후]
그 후 빨치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1951년 중반 이후 한국전쟁 전선이 장기전에 접어들자, 육군본부는 1951년 11월 지리산지구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선엽 장군 휘하에 전투사령부를 전라북도 남원시에 설치하였다. 전투사령부는 1951년 12월~1952년 3월까지 본격적인 ‘동계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지리산 지구 유격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군 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1952년 3월 10일 기준 지리산 지구 잔존 빨치산은 1,248명으로 추정되었다. 세력은 비록 약화되었으나 1952년 후반 빨치산의 활동지역은 지리산 지구[5지구당 산하 김지희 부대, 이영희 부대], 회문산 지구[전북도당 산하 무장부대], 속리산 지구[3지구당 빨치산], 운장산 지구[전북도당 빨치산], 백운산 지구[전북도당 유격대], 덕유산 지구[경남도당 유격대], 신불산 지구[제4지구당 남도부 지대] 등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월북하지 못한 채 남한에 잔류한 빨치산들은 1,388명으로 추정되었다. 휴전 후에도 토벌 작전은 계속되었다. 1953년 9월 18일 남한 빨치산 총수이자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전라남도 구례군 빗점골에서 사살됨으로써 남한 유격대는 최대 타격을 입는다. 이현상의 죽음 이후 남아 있던 빨치산들은 장기전에 대비한 소규모 부대로 편성하여 지구전에 돌입하거나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지리산 지구, 덕유산 지구, 회문산 지구, 형제봉 지구, 모후산 지구, 전남 동부 지구, 영광, 장흔지구, 운장산 지구 등이 소규모로 남아 있었다. 이들을 따라 군경 토벌 작전은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 근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54년 2~3월 말까지 전개된 전투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빨치산의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자 생존 부대원들은 다시 조직을 편재하여 1954년 4월에는 925부대, 727부대, 남원군당 등 8개 부대가 지리산에 남았다. 이 외에도 백운산에 전남도당, 향미연대, 덕유산에 전북도당 등 5개 부대가 남아 있었으나, 이들도 1954년 4~5월 국군 토벌 작전으로 대부분의 전투부대가 사라졌다. 1955년에는 후반기 토벌 작전으로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부대가 전멸하면서 남한 빨치산 유격부대는 대부분 소멸하게 된다.
[보도연맹이 만들어지다]
민족의 분단과 전쟁은 수많은 아픔과 희생의 기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북 분단과정에서 좌우 이념 대립과 갈등은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좌익사상을 가졌거나 활동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매우 컸다.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정권은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하였던 남로당 계열의 좌익분자나 활동 경험자들을 전향시켜 관리·통제할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었다. 1949년 10월 25일~11월 30일까지 자수 기간을 설정하여 대대적인 전향 작업을 벌이자, 각 지방에서도 좌익 계열의 전향을 목적으로 검경을 비롯한 각급 행정기관을 동원하여 자수와 전향을 독려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이 자수하였다. 특히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발생 후 진압과정에서 전라남도·경상남도 일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주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반란군에게 식량을 제공하였거나, 14연대 군인 또는 좌익 활동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거나 복역 후 출옥한 사람들, 또는 집단 희생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14연대 소속 군인으로 복무 중에 여순사건이 발발하여 반군에 가담하였다가, 진압군에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출소한 군인 중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또 반군에서 도망친 뒤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도 경찰국에 치안국장[장석윤] 명의로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성서사(城署査) 제1799호]의 비상 통첩을 무선전보로 보냈다. 전보의 주요 내용은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서 구금할 것’, ‘전국 형무소는 형무관 경찰 합동으로 경비할 것’, ‘주요 시설 건물 요인 경비에 만전을 기할 것’ 등이다. 이 전문에 따라 전쟁 발발 직후부터 요시찰 제1대상인 보도연맹원들은 관할지서, 경찰서 등으로부터 소집통보를 받고 검속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예비검속’이라 부른다. 예비검속이란 일제가 전시체제에 범죄예방을 구실로 실시한 ‘조선정치범예비구금령[1941.5.5.]’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방 직후 대표적인 일제 악법으로 규정되어 1945년 10월 9일 군정법령 제11호로 폐지된 바 있다. 1950년 6월 25일 비상 국무회의는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선포하였다. 특조령이 지정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사형선고가 가능하고, 단독판사 판결로 선고 결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7월 8일에는 전시하 작전 수행을 위해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12일에는 ‘체포·구금특별조치령’이 선포되어 군 작전 필요에 따라 체포·구금·구속, 예방구금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법률 근거에 의해 치안국 통첩으로 시행된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예비검속이 계엄사령부 명령으로 공식화되었다.
[보도연맹과 민간인 학살]
민간인 학살은 왜 일어난 것일까. 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군이 곧바로 점령한 한강 이북 지역인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예비검속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전선 이동지역에 따라 그 지역의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 대부분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관할지서나 경찰서로부터 소집통보를 받았다. 이들 대부분이 자진 출두하여 예비검속에 응하게 된다. 보도연맹원들이 소집에 응한 이유는 전쟁 발발 사실을 몰랐으며 평소에도 교육, 훈련 소집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지서, 인근 창고, 경찰서 등에서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구금되었으며, 구금 중 심사를 거쳐 좌익활동 경력에 따라 갑·을·병 또는 A·B·C로 구분되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갑(A)은 사살대상자, 을(B)은 선별 사살대상자, 병(C)은 석방 대상자로 구분되었다. 좌익활동 정도가 중한 갑(A)종들은 별도로 분리하여 수용된 후 첫 번째 시기에 사살되었고, 을(B)과 병(C)종들은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후퇴시기에 집단 살해되거나 석방되었다. 지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밝혀졌거나 추정된 수는 총 5,129명이다. 이 가운데 경상남도의 경우 1,551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이 인원은 어디까지나 예비검속 사건 전체 희생자 중 진상 규명이 신청된 후 확인된 결과로, 전체 희생자 중 일부에 해당한다.
경상남도 민간인 학살은 ‘거함산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하여 ‘함양·산청 보도연맹사건’, ‘함양 민간인 학살사건’ 등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거함산보도연맹사건’은 1950년 7월 20~28일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이경록(李慶彔) 외 90명의 거창군, 함양군, 산청군 지역주민이 거주지 관할 경찰 등에게 국민보도연맹원 혹은 인민군에 동조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되어 집단 살해된 사건이다. 거창 지역의 경우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 학살 사건[7.21]’과 ‘합천군 봉산면 권빈재 학살 사건[7.27]’이 대표적이다. 함양 지역은 1950년 7월 21일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난평리 보골[신기마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밤나무 숲, 함양읍 백연리 두재고개, 지곡면 보산리 가운데 고개 등에서 총살되었으며, 함양군 휴천면 보도연맹원 50여 명도 대포리에서 국군 1개 소대와 휴천지서 근무자들에게 총살되었다. 산청 지역은 7월 20~28일 사이 본통고개 등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좌익활동과 관계없이 대체로 20~40대로 농업에 종사하는 민간인들로, 산청군의 경우 국민보도연맹원 소집 당시 도피하여 입산한 자의 가족, 친척 등 10명을 연행·구금한 후 사형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영·유아 4명과 임신부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함양·산청’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 작전 중 함양군·산청군 일대 민간인들을 통비(通匪)[내통]분자로 간주하여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이 외에도 인민군 후퇴기 경상남도 산청군·진주시·함양군 등에서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도 발생하였다. 특히 진주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경상남도 지방 경찰, 군인, 공무원 등의 우익인사와 그 가족 등 소위 반동분자로 분류된 300여 명이 9월 26~28일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중,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대황재에서 집단 희생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무기는 기관총, 소총, 수류탄, 유류[기름] 등으로, 비무장한 민간인들에 대해 매우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 관련 희생자는 남성이 95%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자들이며, 연령별로는 20~30대 청·장년층이 전체 75.8%로 가장 많았다. 이렇듯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희생됨으로써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은 더하였다.
[지리산 빨치산의 아픔과 역사적 기억]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인가. 남도 땅에서는 제일 큰 산인 까닭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조정래, 『태백산맥』 중-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 배경으로 그려졌던 지리산은 민족의 정서와 혼, 애환과 함께 호흡해 온 산이다. 특히 민족 분단과 전쟁을 지나온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빨치산 투쟁의 현장이었던 지리산은 고통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다시는 전쟁과 같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족회들이 모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전국피학살자유족회’가 10월 20일에 결성되어 최초로 합동위령제와 추모사업들이 추진된 바 있다. 그러나 유족회의 진상규명 활동과 추모사업은 이어진 1961년 5·16 쿠데타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5월 31일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에 따라 1945년 해방부터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규명 사업이 진행되어, 총 신청건수 9,609건 가운데 8,187건이 진실규명되었고, 464건이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다. 국가는 분단과 전쟁으로 죽어간 빨치산들과 토벌작전에서 희생된 군경과 이 과정에서 무참히 죽어간 민간인들의 희생에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을 더욱 책임 있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난 역사의 아픔을 국민 모두가 함께 치유하고 극복해 감으로써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이 열릴 것이다.
첫댓글 내기억과 사실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총살당한 피해자 대부분이 어린아이다
피해자 숫자도 0,5%박에 된다 인구가 30만이 불어나야할것이 100만이 줄었다
얼마나 죽였는지 감이 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