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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묵상글 ( 주님 세례 축일. -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고백. 등 )
07:22, 이시간 현재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지
아니하여 공유할 수가 없어 , 상지종 신부님 글을 앞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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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고백>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너는 내가
나처럼 빚은 사람이다
당신은 저를
당신처럼 빚으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당신은 저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나의 사람을 돌보게 한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사람을 돌보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나의 일을 맡긴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일을 하게 맡기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늘 함께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늘 함께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믿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희망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희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사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나에게
바로 나인 사람이다
당신은 저에게
바로 저인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나와
갈림 없이 하나인 사람이다
당신은 저와
갈림 없이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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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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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 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며, 성탄시기와 주님 공현 주간을 마무리해 줍니다. 한편,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가르는 기점이 되고, 이제 성탄시기는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에서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곧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듯이, 공생활의 시작에서는 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일까요? 왜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묘?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도 이를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복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하느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당신 구원의 동반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요한 1,10)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시대 왔음을 알려줍니다. 하늘과 땅이 화답하는 일치의 모습 안에서 그 기름부음의 성취는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 선포의 내용은 셋입니다.
<첫째>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장 7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곧 우리의 세례는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의 탄생’됨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란 ‘유일한 아들’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하여 ‘사랑받은 존재’,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에 드는’ 이란 ‘주님의 종’임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구원의 협조자로, 제 2의 예수님으로, 구원의 도구로 소명을 지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그 은총을 입었기에 그 사랑, 그 용서를 베풀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주님!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리게 하소서.
하늘이 땅에서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게 하소서.
기름을 부으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소서.
사랑받은 존재, 은총을 입은 존재로 살게 하소서.
당신의 영과 함께 아들의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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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6).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0-11).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5-7).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22,16).
우리는 가끔 세례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4,6).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일깨우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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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론도, 하느님 나라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담아낸다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론이고, 바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의 삶일까요?
오늘 독서는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그렇습니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신자로서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준 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변비가 심해서 도저히 관장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습니다. 저는 가운만 걸치고 환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환자의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있는 변을 파냈습니다. 환자는 울면서 고마워했습니다.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일을 제가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전직 국회의원이었다고 하면서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 앞을 지날 때면 과일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결혼 할 때는 어떻게 아셨는지 축의금도 보내셨습니다.
서울 숲 근처에 빌딩을 하나 사서 임대를 주었습니다. 임대료를 싸게 해 주었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습니다.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 드리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했습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조카에게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물으니 ‘치킨 집’을 하라고 했습니다. 인테리어를 하고, 드디어 치킨 집을 열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습니다. 몇 년간 운영을 해 보니 매년 1월은 적자였습니다. 서울 숲은 겨울에 사람들이 적게 오기 때문입니다. 1월 한 달은 휴업을 하고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건강검진도 받고, 자기 계발도 하고,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마친 후에는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익이 커지면 직원들에게 월급 이외에 상여금을 더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더욱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였습니다. 가게에 있으면 손님들이 원하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손님이 유아용 의자와 이유식을 먹일 수 있도록 전자레인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좋아했습니다. 와인을 가져와서 마셔도 좋은지 물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와인을 가져다 놓았더니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드러낸 간호사와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바로 그분들이 세례 받은 신앙인의 모범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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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장면 중 명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시나요? 하늘에서 들려온 이 한 마다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요?
저는 오늘 하늘에서 들여온 이 한마디 안에 모든것이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용기를 전해주는 따스함도 들어있고
마음 구석구석 사랑을 넣어주는 섬세함이 보입니다.
응원의 열정도 느껴지고
늘 함께 있음을 알려 주는 믿음도 보입니다.
저의 느낌대로 오늘의 말씀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너는 내 사람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늘 기뻐하여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로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옆에서 늘 같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 사람이다. 너는 내 사람이다. 그러니 기뻐하여라
오늘도 우리가 우리 이마에 새겨진 인장으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가슴 펴고 두려워하지 않고 선함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세례 축일, 우리들의 세례로서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
그 어렵다는 문제를 우리는 풀어냈습니다.
중국집에 들어서면서 겪어야 했던
그 엄청난 숙제를….
짬짜면이라는 시대의 발명으로 해결했습니다.
이제 다른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김치찌개냐
된장찌개냐….
하나를 선택하자니 다른 하나가 걸립니다.
둘 다를 선택하자니 욕심 가득한 모습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어쩔수 없지요. 어쩔 수 없지요.
어쩔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이랍니다.
어쩔수 없음을 받아들여 인내하는 모습이
어른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오늘도 어른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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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노년기는 행복한 시기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시기일까요? 사실 노년기야말로 인간에 가장 행복한 시기여야 합니다. 많은 경험과 지혜의 축적으로 좋은 것을 극대화하고, 나쁜 것을 최소화하는 데 능숙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으며, 어떤 일이 중요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게 됩니다. 감정으로 더 현명해지고, 그 지혜는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이 노년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남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늙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늙음보다는 당연히 젊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노년기의 장점이 그렇게 많은데도 말이지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을 줄여 나가고, 대신 긍정적으로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관계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합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관계 개선을 그분과 하지 못한다면 더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웃에게 한 행동 하나하나를 하느님께 한 것으로 하겠다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 같습니까?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 가장 좋은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 즉 자신을 가장 낮춘 상태, 어떤 이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굳이 받을 필요도 없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관계가 아닌 긍정의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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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좋은 동반자와 함께하면 먼 길도 가깝다(튀르기에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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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움의 여정
-주님을 따름과 닮음-
어제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고 내일부터는 평범한 일상의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두서없이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요즘 임윤찬 피아니스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가의 풍모가 보이는 아주 젊은 분입니다. 영혼과 사랑이 담긴 동영상 쇼팡의 녹턴이 너무 아름다워 어제는 들으며 위로와 치유의 거룩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배경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과 너무 잘 어울린 곡이었습니다. 또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리흐테르’의 <회고담과 음악수첩>을 틈틈이 읽으며 그의 대가다운 고귀한 인품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서품후 35년 동안 아마도 가장 많이 꿨던 꿈은 “하느님 꿈”일 것입니다. 바로 강론 꿈입니다. 꿈속에서 강론을 완성하고 너무 좋아해서 꿈이 깬후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별을 본후 허전한 맘을 추스르며 강론을 쓴적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복된 ‘하느님 꿈’이라 일컫고 싶습니다. 참 많이도 꿈중에 썼던 강론들입니다.
저는 여전히 일어나면 작년 8.15일부터 시작된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후 강론쓰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아주 상쾌합니다. 얼마전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만세삼창을 들었습니다. 2024.1.1.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미사시 강론 맨 끝부분 말마디가 저에게는 교황님의 성모님 만세삼창으로 들렸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세 번 외치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인류의 빛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로 우리는 세 신비를 기리는 데 바로 어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이를 잘 요약했고 곡도 가사도 참 아름답고 흥겨웠습니다.
“오늘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오늘 혼인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알렐루야!”
바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더불어 그분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세례와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미사시 화답송 후렴 역시 어제 대축일 미사 화답송 후렴처럼 아름답고 흥겨워 하루 기도노래로 바치려합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스치듯 떠오른 말마디-“비움의 여정; 주님을 따름과 닮음”-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시종여일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의 거룩한 생애였고 하느님은 충만한 생명의 부활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삶을 살라는 모범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른 두편의 비움을 갈망하는 자작시입니다. 욕심도 이보다 더 큰 욕심은 없을 것이나 거룩한 욕심이라 생각하며 자위(自慰)합니다.
“커져서 텅빈 공(空)이 되고
작아져 무(無)가 되어 살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배경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온전한 사랑이 되어
예수님처럼!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아(無我)의 삶이겠다
진아(眞我)의 삶이겠다
하느님같은 사랑이겠다”-1999.12.
무려 25년전 시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로우니 진리는 영원한 현재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다음해 주님 부활 축일 다음 파공날 다 외출한후 주방 앞에 환하게 핀 민들레꽃의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한달간 저를 위로하고 치유했던 “민들레꽃”이란 시입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닮고) 있다”-2000.4.24.
비움의 충만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갈수록 비움의 충만의 역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그대로 겸손과 순종으로 직결되어 표현됩니다. 말 구유 안에 뉘어 계셨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니 정말 파격적이요 비움과 겸손의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표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시니 하느님의 기꺼운 화답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신원은 우리의 고귀한 신원도 확인시켜 줍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들어선 우리 하나하나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는 예수님과 우리를 통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가며 닮아가야할 내용입니다. 다음 주님의 종은 예수님이자 여러분 하나하나에 해당된다고 믿으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우리 믿는 이들은 한몸의 운명공동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은 물론 우리들의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그”를 “너”로 바꿔 읽어 봅니다.
“내가 너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 너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너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너는 지치거나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아,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실현시켜 가야할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온통 깨어 있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고요하고 섬세한 모습입니다. 관상가과 신비가의 영성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결코 이기적 폐쇠적 자기 안에 갇힌 수인(囚人)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환히 열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이웃을 위한 복음 선포의 사명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모두의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1.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2.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3.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내기 위함이다.”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무지에 눈먼 중생들에게, 빛을, 길을, 희망을 잃은 중생들에게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이, 주님의 길이, 주님의 희망이, 주님의 해방자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사명이자 과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세례성사를 완성시켜 주며 우리 모두 날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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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주님 세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그리스도의 세례가 지닌 우월성
주님의 세례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섭니다. 세례는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영광을 담고 있습니다, 해가 별보다 더 밝게 빛나는것 이상으로, 주님의 세례는 은총과 권능에서 다른 어떤 세례보다 뛰어납니다, 성인들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겨 보면 그 비할 데 없는 우월성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로서는 침묵할 까닭이 없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를 우리의 길잡이 삼고 거울삼아 수수께끼 같은 미로를 헤쳐 나갈 일입니다.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 허약한 육신과 하찮은 생각으로 그분의 위대하심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를 드높이기 위해서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더듬거리며 선포하는 우리 말더듬이를 참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창조 안에서 신적인 말을 했다. 창조계와 자연 사물안에는 계시가 들어 있다. 돌맹이도 하느님을 드러낸다. 실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메아리다. 피조물은 신의 메아리다. 피조물은 신의 의사전달이다.
“하느님의 완전성조차 피조물이 그분 자신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그분 자신을 피조물에게 전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비우시는 만큼, 피조물은 그분과 동등해질 수 있었습니다. 피조물은 끝없이 흘러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사자가 모래 알갱이나 풀잎이나 니뭇잎보다 허다하게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를 통하여 빛과 은총과 선물이 우리에게로 흘러 내려옵니다.”
모든 창조 행위는 선하다. 그것은 선물을 주는 행위다.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다. 모든 피조물은 신적인 축복이자 하느님의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행위로, 곧 자신의 가장 충만한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의 메아리로 크게 울린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가장 성공한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는 피조물과 친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창조의 행위이기도 하다.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아들을 드러내고, 만물 속에서 아들을 드러낸다. 엑카르트는 또 다른 대목에서 “하느님은 아들 안에서 만물을 토해 낸다”고 말한다 (9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요한 1,1-14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추가 -------------------------------------------------
김명겸요한 신부님 2024.01.08 10:22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마지막으로
교회는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다른 전례 시기보다 가장 짧은 기간이지만
성탄 시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을 전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현을 거쳐
세례까지의 과정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내신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약한 인간과 차이가 크기에
인간이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모습 속에
담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께 다가갈 수 있도록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여러 이유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거부하거나
당신이 인간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즉 함께하는 것을
어떤 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종종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육화에서 세례에 이르는 이번 경우는
구약과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강한 힘을 드러내시기 보다는
피조물의 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피조물의 약한 모습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존중하시는
있는 그대로 보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 약한 모습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면서도
약함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약함을 죄의 결과로 보아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머무신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도 괜찮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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