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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황야의 무법자> 테마음악 '방랑의 휘파람'
[ 영화 <황야의 무법자> 이야기 ]
오래전부터 역사의 발전은 개혁을 통해서 이루워 졌다고 할 수 있겠죠. 영화계도 다르지 않아 간간히 개혁적인 문제작들이 등장하면서 그동안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1964년에 발표된 이 <황야의 무법자>도 당시로서는 영화계에 거의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파격적인 개혁 성향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그동안의 대표적인 고정 관념,세가지를 타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서부 영화는 언제나 많은 돈을 들여서 미국 헐리우드에서만 제작한다는 관념을 깼으며, 둘째.서부 영화의 주인공은 항상 옳고 언제나 지지 않고 이긴다는 관념을 깼고, 셋째,또 영화음악은 언제나 촬영 후 거창한 악단 연주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관념을 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음악의 비중을 기존의 영화들보다 훨씬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와 마카로니 웨스턴 >
* 세르지오 레오네
20세기 초반, 무성 영화 감독이었던 아버지 빈센조 레오네와 여배우 바이스 왈레란 사이에서 태어난 개혁적 성향의 세르지오 레오네(1929-1989)는 이미 10대 때부터 단역 배우로서 이태리 영화계에 종사하기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서서히 명성을 얻어가던 20대에,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을 위해 유럽으로 촬영을 온 미국 현지 팀에 감독 보조로 합류를 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고 이후, ,쿼바디스(1951),<벤허(1959)>등의 거자 사극 영화의 제작에도 참여를 하게 됩니다.
1961년에 드디어 감독으로서 첫 작품인 로마 사극 <Colosso Di Rodi>를 발표하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합니다.
1960년대 들어, 미국 본토에서 서부 영화의 열기가 식은 것을 확인한 그는 유럽의 자본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서부 영화로 두 번째 작품을 기획 하게 되는데,이번에는 흥행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미국 배우 중에 제임스 코반 혹은 헨리 폰다나 찰스 브론슨을 섭외 하였지만 실패를 하고 대신 TV 시리즈 <로하이드>에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촬영지인 스페인의 황야로 부르게 됩니다.
일본인 명감독인 아키라 구로자와(1910-1998)가 1961년에 발표한 <요짐보>를 시나리오의 주축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가 발표되자 그동안 고정 관념 속에 있던 미국 영화계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웨스턴이냐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혹평을 하였으며 마카로니 웨스턴(또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폄하를 하였고 형편없는 변방의 감독이 만든 싸구려 창녀같은 영화라고도 하였는데, 그들이 그렇게 혹평하던 세르지오 레오네가 20년 후인,1984년에 모든 평론가들이 명작으로 손꼽는데 주저 하지 않았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만든 장본인이 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새로운 스타일의 마카로니 웨스턴이야말로 일반 관객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 존 웨인등이 보여주었던 정통 서부극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
누더기 같은 멕시칸 판쵸를 걸치고,입에는 시가 꽁초를 물고 주름이 깊게 패일 정도로 찡그린 그의 인상은 오히려 카리스마가 넘치는 색다른 매력으로 닥아왔으며,양다리를 걸치며 기회주의자 같은 행동으로 인하여,갱들에게 죽을 정도로 흠씬 얻어 터지고 린치를 당하는 이 주인공의 모습은 과거의 서부극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죠.
물론,이 무법자 시리즈를 통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을 하게 됩니다(이 작품에서의 그의 출연료는 단돈 만오천불 이었으나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서는 이십 오만불을 받게 되고 옵션 등으로 받은 돈을 합쳐 그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는데 Seed Money로 활용하고 이후 1971년에 자신의 첫 감독 작품인 <Play misty for me>를 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한편 대사를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대사보다는 인상만 쓰는 얼굴 표정과 눈동자, 그리고 총 등을 극도로 클로즈 업하는 등(그 큰 스크린에 얼굴이 반만 나오기도 합니다) 독특한 레오네의 촬영기법도 새로운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재삼 재사 언급하지 않을 수 가 없는 파격적인 방식의 주제곡과 영화 음악이야 말로 이 마카로니 웨스턴의 매력을 한층 가중 시켰죠.
[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등장 ]
나이는 한 살 차이가 나지만 세르지오 레오네와는 학교 동창으로서 로마의 음악학교에서 트럼펫을 전공하던 엔니오 모리코네는 친구의 덕분으로 본격적인 영화음악을 만들게 됩니다( 현재까지 500편이상의 영화음악을 만든 그 이지만 이 영화가 바로 그의 데뷔 후 첫 성공작입니다.)
이후 모리코네가 만든 음악들로 해서 레오네의 영화들도 더욱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인데 할리우드의 귀재 쿠엔틴 타란티노도 20세기의 영화계에서 가장 위대한 명콤비가 바로 이 두 사람이라고 평한 적도 있습니다.
모리코네 역시 상당히 개혁적인 사람으로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영화 촬영 전에 주제곡을 미리 만드는 등(음악을 틀고 촬영을 함)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이르는데 그동안 오랫동안 관현악적인 영화음악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소리들, 예를 들어, 채찍 소리라던가 종소리, 휘파람 그리고 하모니카와 전자기타 등을 이용하여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음악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후 이런 자기의 스타일을 “음악적이지 않은 영화 음악”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 에서는 영화보다도 휘파람 멜로디의 이 주제곡이 더욱 유명하게 됩니다.
1964년의 이 영화 성공으로 레오네는 계속해서 같은 스타일의 마카로니 웨스턴을 더 만들게 되고 또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데 1965년에는 우리에게 <(속)황야의 무법자>, 1966년에는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계속 발표하며 (스페인에서 만드는 삼부작은 일단 마감) 이후의 약 10년간의 마카로니 웨스턴 전성 시대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의 성공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후에 알게 되고 꿈의 프로젝트라는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를 끝으로 참으로 아깝게 심장병으로 1989년에 타계를 합니다.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대작 영화 제작의 꿈을 이루지 못한체....<Once Upon A Time In Russia>
이 영화들을 보고나면 명작 이라든가 또는 고급 영화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편없는 저예산으로,오락영화로서의 이만한 성공을 가져올만한 사람도 레오네와 모리코네 콤비가 아니였다면 불가능 하였을 것 같습니다.
[ 명배우,명감독이자 음악인으로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야기]
현재 미국 영화계를 통틀어 단지 산업적인 기준만이 아니라 그 영향력과 정신적인 면 그리고 상징성 등을 종합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는다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일 것입니다. 전형적인 늦깎이였던 그는 카우보이였고 무법자였으며 거친 형사였죠.
그는 단순히 영화 주인공이 아닌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지금은 자신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다시 바라봅니다. 70세를 넘어 80세를 넘어 들어서도(그는 1930년 생입니다) 청년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처음부터 대단한 걸작을 발표한 천재감독으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연출을 시작한 1971년 이후로는 거의 매년 한편씩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라는 것에 대해 탐구해 왔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그는 그 많은 영화들에 출연하고 연출하면서 수많은 시행 착오를 겪고 경험을 하고 평가를 받으면서 배우에서 감독으로 단련을 해온 것이죠. 한작품 한작품 영화 미학을 터득해 나가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과 이미지를 결합하여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다져 나갔던 것입니다.
타고 난 재능과 요령으로 지름길을 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한계단 한계단을 밟으며 명예의 전당으로 오르고 있는 셈입니다.
* <더티 하리>에서
그렇게 한계단 한계단 오르던 그는 나이 62세 영화인생 40년을 앞두고 <용서받지 못한 자 1992>라는 영화를 만듭니다. 16번째 장편 연출작이고 그해 전세계 비평가들로부터 최고의 영화로 극찬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물론 1993년 65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진정한 거장의 반열의 오릅니다.
그는 오랜기간 영화에 대해 사색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그의 전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80세를 넘어선 노령임에도 이 고독한 건맨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여기저기 자신의 명상과 철학의 흔적을 남기며 천천히 전진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 늦깎이 배우로서의 시작 >
성장 속도가 빠른 배우라면 이미 스타가 되어 있을 25세에 이스트우드는 배우를 시작합니다.
TV 연속극 <로하이드>(59~65)로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스타덤에 오른 계기는 <황야의 무법자>(64).34세 때 찍은 영화였습니다. 첫 연출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71)를 내놓았을 때는 41세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92)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을 땐 63세였죠.
* <더티 하리>에서
그는 65세의 나이에 로맨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95)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74세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04)에서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슬로 스타터(slow starter)인 셈입니다. 이스트우드처럼 꾸준히 자신의 비전을 넓혀갔던 배우나 감독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나열한 놀라운 연대기가 가능했던 건 무엇보다 그가 건강했기 때문인데, 2006년에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프란체스카 루스 이스트우드는 아들에게 건강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준 셈입니다. 이스트우드는 단 한 번도 조급한 적이 없었죠.
그리고 항상 뭔가를 배우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주급 75달러를 받았던 시절, 그는 실습생이었습니다. 그는 <괴물의 복수>(55) <타란툴라>(55) 같은 B급 SF 영화에, 자막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며 출연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긍정적으로 회고합니다. “배울 게 많은 시절이었다.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야 했고, 맘에 들지 않는 스토리라도 해야 했다. 많은 배우와 아이디어와 감독을 접했다. 그러면서 배웠다. 이 사람처럼 해야겠다 혹은 이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 두번째 부인 디나 이스트우드와 함께...둘은 최근에 이혼했습니다
<카우보이 시절>
하지만 그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쫓겨납니다. 이유는 황당했죠. 그의 목울대가 너무 크기에 배우로서 부담스럽다는 것. 해고당했을 때 그는 빈털터리였습니다. 하지만 배우 생활을 접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나이 때문은 아니었고. 그는 이미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를 필요로 한 장르가 바로 TV 서부극이었습니다.
<매버릭>(59, TV)에 잠깐 출연한 후 그는 친구 따라 CBS 방송사에 놀러갔다가 그곳 간부의 눈에 들어 <로하이드>라는 서부극에 일약 주연으로 기용됩니다. 그리고 무려 7년 동안 ‘라우디 예이츠’라는 캐릭터로 살아간다. 물론 제한된 캐릭터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한 어떤 기반이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와 찍었던 세 편의 마카로니 웨스턴 때문에 우린 그를 무법자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겐 동전의 양면처럼 카우보이의 이미지 또한 있습니다. <퍼펙트 월드>(93)나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같은 영화에서 그는 자신의 출발점을 다시 환기시킵니다.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사선에서>(93)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무법자나 형사가 되기 전,훨씬 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법을 고수하고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무법자 시절>
이스트우드가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보여준 무표정은, 사실 긴 시간이 응축된 마스크였습니다. 재즈 애호가였던 그는 레스터 영 같은 연주자를 보며 가슴이 고동쳐도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제임스 딘 같은 배우, 잭 케루악 같은 작가, 쳇 베이커 같은 뮤지션이 보여준, 새로운 방식의 섹시함 또한 이스트우드의 머릿속에 기억되었죠. 그리고 드디어 그것을 써먹을 시간이 왔습니다.
*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그는 이미지들을 기억해냈습니다. 사실 <황야의 무법자>에 내정된 배우는 제임스 코번이었지만, 가난했던 이탈리아 영화계는 1만5,000달러의 개런티를 지불하고 이스트우드를 대타로 기용했습니다. 레오네는 이스트우드의 나른하고 양미간을 찌프릴 때의 고양이 같은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역할을 만들어나가면서 이스트우드가 영감을 받은 캐릭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61)에 나오는 미후네 도시로였습니다. 이스트우드는 비정하고 잔인한 게리 쿠퍼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독이 원하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죠. 바로 신화적이며 전형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연기했고, 표현을 억제했습니다. 영국의 대배우이자 이스트우드와는 <독수리 요새>(69)에서 공연했던 리처드 버튼은 이스트우드의 연기 스타일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클린트는 스펜서 트레이시, 제임스 스튜어트, 로버트 미첨 같은 배우의 계보를 잇고 있다."라고...
그에겐 역동적인(?) 무기력함이 있습니다. 카메라 앞에선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그냥 서 있는 것 같지만,결국엔 모든 것을 해냅니다. 표현을 최소화하고 표정을 아끼는 배우.그런 면에서 이스트우드는 미국의 전통적인 남성상에 맞닿아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에서 찍었던 영화에 대해, 고향인 미국의 저널과 대중은 냉소적·폭력적이라고 비판했고,이스트우드를 냉혹한 살인자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새로운 액션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랜 토리노>에서
<더티 해리 시리즈의 막나가는 형사 시절>
마카로니 서부극의 영웅이었던 이스트우드는 서부극이 쇠퇴하자 돈 시겔의 <더티 해리>(1971)에서 강력 경찰로 이미지를 쇄신하게 됩니다. <더티 해리>는 그의 마초적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켰죠.
매그넘(대형 권총)으로 범죄자들을 무차별 사살하는 거친 형사 더티 해리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스트우드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후, <더티 해리>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어 1988년까지 5편의 시리즈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직접 감독으로 나서게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티 하리 시리즈의 돈 시겔 감독으로부터 감독이 되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이에 그는1971년 맬파소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차립니다.
맬파소 프로덕션을 통해 그는 1973년 사이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 데뷔해 이후부터는 감독과 배우로 활동합니다. 이후,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아나갑니다.
감독으로서 그는 돈 시겔이나 세르지오 레오네 등 함께 작업했던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두 감독의 방식은 이스트우드의 절제된 연기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건틀릿>(1977), <브롱코 빌리>(1980), <파이어 폭스>(1982), <페일 라이더>(1985) 등을 감독하였고,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버드>(1988),<추악한 사냥꾼>(1990) 등에 이르러서는 감독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절제된 스타일의 대표작은 93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입니다. 그의 감독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서부영화를 결산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 <그랜 토리노>에서
그는 영화를 떠나 잠시 외도를 하는데, 1986년부터 2년간 캘리포니아주 카멜시(市)의 시장 직을 역임합니다. 이후,<사선에서>(1993)에 배우로서 출연하였고,<퍼펙트 월드>(1993),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앱솔루트 파워>(1997),<미드나잇 가든>(1997)를 감독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특히,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선 잔잔하고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연출, 메릴 스트립과 직접 로맨스 그레이 커플을 연기하기도 하여 한국 팬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최근에 들어와 <밀리언달러 베이비>,<미스틱 리버>,<아버지의 깃발>,<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체인질링>,<그랜 토리노>,<인빅터스>,<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은 걸작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음악인으로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면 배우, 감독이면 감독, 게다가 자신이 만든 영화의 음악 작곡까지. 영화에 관한한 이만한 팔방미인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할리우드 최정상의 배우임과 동시에, 지난 40년간 모든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그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 영화계의 거장이자 우상으로 모든 부문에서 작품성, 흥행성을 인정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게다가 그는 아직도 열정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0대 때부터의 꿈이었다는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이스트우드는 그동안 틈틈히 자기가 만든 영화의 메인 타이틀도 작곡하는 솜씨를 보여주어 왔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메인 타이틀인 “Claudia's Theme"이 대표적인 곡인데 기타가 주 멜로디를 리드하고 잔잔하게 관현악과 합쳐져 가는 이 주제곡의 성공은 이스트우드로 하여금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까지 손을 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이 작품 이전에도 그는 이미 두 개의 영화음악을 만든 적이 있지만, 이 영화의 성공이후, 그는 오랫동안 그토록 사랑하는 재즈에 기반을 둔 창작 실력으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 만만치 않은 음악적인 재능도 과시를 하였고 최근에는 <아버지의 깃발>과 <그랜 토리노>에서도 메인 타이틀을 작곡함으로써 대단한 재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 최근 만들고 있는 FBI 전설적인 국장 후버의 일대기 <J. 에드가>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 영화의 한 장면, 이 장면이 끝난후 <(속)황야의 무법자>,<석양의 무법자>,<옛날 옛적 서부에서> 등 레오네 영화와 기타 유명한 서부영화의 충격적인 총격씬들을 맛보기로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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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위 동영상 음악이 끝나고 나면 황야의 무법자 영화를 보고 싶으면 선택해서 보시면 됩니다.
열번은본것같은데도 볼때마다 새롭습니다
쉐인도 억쑤로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