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젠테이션으로, 그림으로 공부할 예정이라서 --
길더라도, 한 번 읽고 오시면 도움이 됩니다.ㅣ
*르네상스 미술
1300년대부터 상인, 금융인 등이 부를 축적하여 1400년 대에 이르면 네델란드, 프랑스, 이태리 등지에서 부유한 중산층 계층이 된다. 이들은 개인이 노력하여 부를 쌓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학문과 예술에서 후원자가 됨으로, 화가들은 르네상스로 알려진 새로운 미술 사조를 개척하였다..
*르네상스 회화
1. 벽화(프레스코 화 fresco painting)
2. 패널화(panel paintihg)
주로 템페라(tempera) 기법으로 그렸다.
3.유화 (oil painting)
1) 프레스코 화
'a fresco' (방금 회(灰)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 이다. 석회·석고 등으로 만든 석회벽의 건조가 채 되지 않은 덜 마른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그리는 기법이다.
빠른 붓질로 쓱쓱 그려야 함으로, 그리기 전에 스케치 등 완벽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림물감은 벽에 흡수되어, 벽이 마를 때 표면에 고착하므로 빛깔은 변색되지 않고 내구력이 있다. 다만 말라감에 따라 광택을 잃고 발색이 둔화되는데 거기에 프레스코 특유의 차분한 색조(色調)를 볼 수 있다(색이 강렬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르네상스 이후 벽면이나 천장화에 많이 쓰인다.
15세기-16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달하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나 벽화, 라파엘로의 바티칸궁의 벽화 등이 프레스코 기법에 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마른 석고 위에 아교를 섞은 물감을 사용한다.
2) 패널화
(1) 주로 나무 판자에 그렸다.
(2) 밑 그림을 그리고 위에 그렸따.
일반적으로 금빛을 칠하고, 그 위에 그리는 것이 중세 이래로 전통이다.
(3) 색은 선명하다. 덧칠은 안 된다.
(4) 화면은 매끄럽지만, 유화만큼 자연스럽지 않다.
(5) 설치는 설교단, 십자 책형상,
중세 교회는 성가대와 회당 사이를 천막으로 가렸다. 그 천막 역할을 했다.
3) 유화(油畫, oil painting)
기름으로 갠 물감(안료)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이다.
15세기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의 화가 반 아이크(Van Eyck) 형제가 유화 물감을 기술적으로 개량하여 예술적 수준을 높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 뒤로 유럽 각지에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그전까지 성행했던 템페라(tempera) 기법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다.
유화 물감의 재료의 성분과 기법이 발전하면서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파 화가들에게서 물감의 두꺼운 질감과 필치의 표현 효과 등 근대 유화와 연결되는 수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로 유럽의 유화 기법은 다채롭게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화는 서양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기법이 되었다.
16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유화는 비로소 서양미술의 중요그림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재료
반 에이크 시대는 그림물감이 되는 안료(顔料)의 종류는 7,8색에 지나지 않는다. 안료가 인공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704년에 독일인 디스바하의 파랑부터이다.
(*물감의 종류는 용액인 다양한 오일과. 물감 자체 등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유화 물감은 오일 매체를 이용하여 사용함으로, 매체의 툭성도 중요하다.
건조제는 유화의 그림물감에 그 안료의 기름과의 건조성의 지속(遲速)에 맞추어서 이미 배합되어 있다.
4) 그 외의 물감
(1) 수채화
물감을 물에 풀어서 사용하며, 그 물감으르 그림 그림이다. 종이가 물에 젖으므로 그리기 어렵다고 한다. 투명한 색상으로 아래 색이 비치고, 덧칠을 자꾸 하면 화지가 물에 젖는다.
요즘에 불투명성 수채 물감도 나온다.
(2) 아크릴 화
아크릴 물감도 수용성이다.(수채화로 분류한다.) 건조된 후에는 다시 녹지 않아 수채화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빠르게 건조한다.
처음에 벽화용 물감으로 개발하며서 탄생했다.
지오토(1267-1337)
단테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화가이다. 성당 벽화를 프레스코 화로 그렸다. 단축법,
투시법, 명암법을 이용해서 평면에 입체감으로 표현했다. 인물에 감정을 나타내게 했다.
배경에 처음으로 풍경을 그려넣었다. 아시시의 프란세스코를 벽화로 그렸다.
에네나 성당의 ’애도‘가 대표적인다. 건축가이기도 하다.
지오토 디 본도네
지오토는 르내상스를 연 화가로, 현대회화의 시작점이다.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년 ~ 1337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이다. 피렌체 근교의 끌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탄생했으며 피렌체에서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치마부에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마침내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명성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 후대에도 친송을 받았는데 동시대의 사람인 단테(1265-1321)는 '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지오토의 시대다'라고 극찬했고[1],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는 지오토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2]
프란체스코 성당의 벽화 <성프란체스코전>에 참여해 28점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후 1303~1305년까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장식을 맡는다. 3개의 층으로 나뉜 38개의 구획들은 성가족과 예수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그 중 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1305년, 프레스코)과 벽면 패널 중 하나인 <애도(Lamentation)>(1304년, 프레스코)는 조토의 정수를 나타내는 그림을 평가받는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지오토를 모방햇‘다고 한다.
후기의 대작으로서 피렌체의 온니산티 성당의 <장엄한 성모>(1331년, 템페라),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예수의 십자가> 등이 있으며 1334년에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주임 건축가로 임명되어 종탑 건조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 사망하였다.
지오토는 피렌체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치미부에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데리고 가서 그리을 가르쳤다.
유명화가로 명성을 날리면서 많은 주문을 받았고, 무리헤게 주문을 모두 수용했다. 왜냐면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을 무척 밝혔고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많이 모았다. 그림 주문을 많이 받은 것도 사채의 종자돈이었기 때문이다.
스트로베니 성당은 지요토가 맡기로는 규모가 작은 성당이었으나. 그림 값을 엄청 많이 준다고 하여 맡았다고 한다. 지오토와 같은 시대의 시인인 단테는 사채업자 스토로베니를 지옥에 가두었다. 이 성당에 지오토가 그린 예수의 생애는 지오토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림의 가운데에 예수상을 그렷다; 이 도상은 로마네스크 성당의 팀파늄게 그린, 예수를 가운데에 좌, 우에 천당과 지옥을 표현한 양식과 같다.
르네상스가 시작할 때의 마에스타 성(사람들에 둘러사인 성모자상)에는 치마부에, 두치오, 지오토,의 그림이 유명하다
서유럽은 로마네스크 – 고딕 – 르네상스로 발전한다.
동유럽은 비잔틴 제국의 비잔틴 양식(아이콘으로 그렸다.)에서 13세기가 되면 새로운 미술 양식으로 나아간다. 당시의 비잔틴 양식은 화려한 교회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인간 중심 미술로 교체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표정을 담아냈다. 성경의 내용 전달에서, 인간의 감정 표현으로 나아갔다.
고대미술이 중요 인물을 더 크게 그렸으나, 이제는 사람의 크기가 같아졌다.
원근법을 이용(아직은 초기 단계)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술사적 의의를 말하면
1.성경의 의미를 담는 도상에서, 이제는 종교성에 인간성을 함께 표현했다.
작품 ’애도‘에 등장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표현했다.
2. 화면에 배치의 구도를 잡았다.
<애도(Lamentation)>, c. 1305
조토는 비잔틴 전통에서 탈피하여 르네상스를 이끈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라 평가받는다[3].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조토는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을 이용해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한 인물이다.
배경에 구체적인 풍경과 건물들을 그려넣으며 회화에 배경이란 요소를 최초로 도입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성뿐만 아니라 조토는 인물의 감정과 역동적인 동작의 표현을 보여줬다. 이는 이전까지 단순히 사실 기록을 위한 도구였던 회화를 작가의 감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4] 아레나 예배당의 벽화 <애도(lamentaion)>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역동적인 성 요한의 팔 동작과 전면에 뒤돌아보고 있는 인물들, 배경의 산과 나무들과 각기 다른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 할 수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크 성당의(성 프란체스크가 매장된 성당이다.) 벽화에 성인 프란체스크의 생애를 그렸다.
**성 프란시스코(1181-1226)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교회 수사이자 저명한 설교가이다.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이다.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대 상인이다.
로마로 순례를 떠난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껴 이후로 평생 가난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시시로 돌아간 그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추종자가 많이 생겨서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여자 수도회인 클라라회와 제3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교황 그레고리 9세가 성인으로 추존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2]
프란치스코는 낡고 헤어진 옷에 지팡이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추종자에게 ‘생활 양식’(Forma Vitae) 또는 ‘원회칙’(Regula Primitiva)이라는 제목의 짧고 단순한 회칙을 만들었다. 이 회칙은 철저히 복음에 기초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시시 성당의 프란체스크 일생을 알리는 벽화는 그의 고난에 찬 생애를 보여준다. 이집트에 전파하러 가서 고생하는 내용도 담았다. 프란체스크 수도회는 규모가 커지면서 순교자도 많이 나왔다. 1226년에 죽었다.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던 동료 수도자들은 가난을 매우 사랑하였다. 가난은 그의 본질적 행로였으며, 생전에 마지막으로 저술한 책에서도 자신이 세운 프란치스코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절대적으로 가난한 삶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집트 방문과 이슬람교도와의 친선 관계 도모는 그가 선종한 후에도 그 영향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십자군이 세운 나라들이 차례대로 몰락하여 성지가 이슬람교 세력권에 넘어간 이후에도 그리스도교 성지의 관리인 자격으로 계속 체류하는 것을 허락받은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유일하였다.
10월 4일을 성 프란시스크 축일로 지정하여 오늘도 그를 성인으로 기리고 있다.
** 프란시스코 성인 이야기에 ‘요아킴’이 나온다.
요아킴이 누구일까. 예수의 족보를 보자.
신약에는 나오지 않지만 외경 ‘야고보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외할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외할머니는 안나 이다. 안나의 남편이 요아킴이다. 요아킴과 안나 사이에서 마리아가 태어났다.
그러나 예수의 족보를 다루는 마태와 누가에는 마리아의 족보는 없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족보를 다루는 두 복음서도 내용은 다르다.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를 다루면서 마리아의 아버지는 엘리 라고 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아버지는 요아킴과 엘리, 두 사람으로 나온다.
요아킴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고 한다.(안나가 다윗의 후손인 요아킴을 만나서 마리아를 낳는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 성인전에 나온다.)
엘리는 다윗의 아들, 나한의 후손이다.
7세기 경에 전승되는 말로는(전설) 요아킴과 앨리는 종형제라고 한다.
2. 마사치오(1401 – 1428)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 조반니 발다르노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재혼했다.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무튼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너무 일찍 죽은 탓도 있겠지만 생존 당시에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후대의 이태리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Cappella Brancacci)에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원근법과 명암법
마사초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조토의 작품을 모사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어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다. 1423년에는 그들의 격려로 마솔리노와 함께 로마로의 여행을 가서 고대 로마, 그리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지오토는 명암법을, 마사치오는 원근법을 만들어 낸 화가로 기록하여 르네상스 미술, 더 나아가서 서양회화의 효시로 삼는다.
3) 프라 안젤리코(1390-1455)
프라 안젤리코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다. 원래 이름은 귀도 디 피에로(Guido di Piero)이다. 바사리(Vasari)의 기록에 따르면 '이 헌신적인 수도사는 기도치 않으면 붓을 들지 않았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그릴 때면 언제나 볼에 눈물이 흘렀다'고 하는데, '천사와 같은 수도사(Fra Angelico)'이라는 말은 당시 수도사들의 그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고 오늘날도 그렇게 불린다. 그가 수도사로서 살기 전 평신도 화가로 활동했음이 밝혀졌다. 1418/20년 Firenze 근교 Fiesole의 San Domenico 수도원의 성직자가 되었고 후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프레스코화에 뛰어났으며 피렌체파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작품으로 <수태 고지>, <성모의 대관>,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화가의 이름 앞에 ‘프라’가 붙으면, 성직자를 의미한다.)
제단화(1440)
4) 기르란다이오(1449 – 1495)
피렌체 화가로,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자세와 표정)를 한 초상화를 그렸다.
손녀와 함께 있는 남자(1480-90)
5) 보티첼리(1445-1510)
산드로 보티첼리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이다.
그의 후기 작품은 고딕 양식을 재수용하면서 감정적으로 강한 표현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그의 회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재수용했다.
1464년 프라 필리포 리피의 제자로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제자로 들어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렸다. 1470년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세웠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고용되어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1482년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교회 장식화를 많이 그렸으나 ‘비너스 탄생’은 종교적 주제로 고대 신화에서 가져와서 그렸다. 이 작품은 ‘보는 즐거움을 주는 예술작품’이라고 말한다.(종교적 목적에서 살짝 벗어났다.)
1490년 대 후반에 메디치가가 쫒겨나고, 카톨릭도 자체 정화운동을 하면서 1501년부터 그림은 다시 어두워지고, 엄숙해지면서 종교적 많이 띤다.
그가 죽고나서 인기가 거의 없었다. 19세기에 ‘비너스 탄생’이 관심을 끌면서 그의 인기가 다시 살아나서, 오늘의 보티첼 리가 되었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적 수법에서 벗어나, 상징과 장식을 강조하여 시적 세계를 이룩한 그의 대표작이다. 그 외에 ‘봄’도 유명하다.
초상화도 잘 그렸다.
7) 레오나르드 다 빈치(1452-1519)
다 빈치는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대표작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꼽는다.
시골마을에서 어머니는 시골처녀였고, 아버지는 피렌체의 공증인이나, 정식 부인이 아닌 몸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나중에 어머니는 도자기공에게 시집갔다. 시골의 생가는 지금도 있다고 하며---
아버지는 16세 처녀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얻지 못하고,생모마저 시집을 가자. 할아버지가 데려가서 총각 숙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몇 번의 재혼으로 12명의 자식을 둔다. 1504년 아버지가 죽자 이복형제는 저거끼리 숙덕숙덕해서 다 빈치에게는 유산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숙부가 죽자 그의 상속재산도 모두 가져가서 민사소송을 한 기록이 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생아였고, 사회가 사생아를 허용하는 만큼의 권리를 가지므로 유복한 유년시절은 아니었다.(아버지가 하위 귀족이어서 그 정도의 끗발은 있었지만)
따라서 정식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읽기와 쓰기도 배우지 못했다. 모국어인 이탈리아 어(속어라고 했다.)는 조금 배웠다.(고급지식을 얻으려면 라틴어-그리스어를 공부해야 했다.) 40대가 되어서야 라틴어를 배웠다고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동성애자였다는 말도 있다.
말년에는 프랑스 프랑소아 1세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살았다. 이때 남자 제자가 따라갔다.
67세에 죽으면서 포도밭 등의 재산을 그의 제자에게(프란세스코 멜지) 상속했다. 그 외에 모나리자 등의 그림, 그의 메모, 기록지 등을 모두 제자에게 상속했다. 멜지가 죽으면서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의해 생 플로랑텐 성당에 묻혔으나, 1802년에 성당을 헐면서, 성당에 묻힌 모든 유해도 없애버렸다. 그래서 오늘 그의 무덤은 없다.
그의 미술 수업을 보면
14세 때 그의 가족이 피렌체로 이사오면서 그도 피렌체로 나와서 베로키오 공방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베로키오 공방은 아주 유명한 공방이었다. 베로키오는 다 빈치의 재능을 충분히 인정해주었다.
공방에서 공부할 때 동성애자로 고발당했다. 아버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구제해주었다고 한다.
1. 제1 피렌체 시대
1472년에 공방 수업을 끝내고, 길드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1466-1482)
석죽의 성모, 수태고지, 베노바가의 성모는 이때 그렸다.
2. 제1 밀라노 시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화.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3. 제2 피렌체 시대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4. 제2 밀라노 시대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모나리자 (1503~1517)
*모나리자에 관한 연구는 무지 많다. 그러나 명확히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그림의 특징 -- 눈썹이 없다. 그래서 미완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스푸마트 기법을 사용했다.
3년간의 로마 체류를 하고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 해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 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1479~1516)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23]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후원자 물색
1515년 1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그해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후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후 7년 넘게 지속되어온 캉브레 동맹전쟁(1508~1516)을 종식 시키기 위해서 교황을 만나려고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다. 같은해 12월 19일, 종전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다.[20][24][25]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곳에서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5. 앙부아즈 시대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에 머문 시기이다.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 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26][27][28]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는데 프랑스에서 <성 안나와 성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때 이미 중풍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나[27][29]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30][31]
프랑수아 1세는 가끔 찾아왔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로모랑탱(Romorantin)에 큰 성을 건축한후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으며 수학 실험과 해부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모나리자에 관한 연구는 무지 많다. 그러나 명확히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그림의 특징 -- 눈썹이 없다. 그래서 미완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스푸마트 기법을 사용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또는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 작품이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De architectura)' 3장 신전 건축 편에서 ‘인체의 건축에 적용되는 비례의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원문을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 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측정한 결과를 글로 적어두었다.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을 데려다 실측하여 기록하였다.
〈최후의 만찬〉(1495 ~ 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밀라노의 스포로차 공의 주문으로, 수도원의 식당에 걸기 위해서 그렸다.
물감과 배지의 탓으로 훼손이 잘 와서 자주 수리한다.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1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동성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그 밖의 업적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1]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8) 미켈란젤로(1475-1564)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피렌체, 로마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3년 간의 도제수업이 끝나고, 로렌초 메디치의 미술학교로 진학한다. 이때는 메디치 가의 사저에서 먹고, 자고 했다.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도나텔로 작품을 배웠다.[2]
1494년에 프랑스가 침입할 기미가 보이자 피렌체를 떠나 피난길에 오른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로마를 거쳐 1501년에 피렌체로 돌아온다.
이후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동생들이 하나, 하나 먼저 떠났다.
1564년에 죽었다.
주요 작품
1)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그의 수많은 피에타 상 중 최초의 작품이었다.
2) 다비드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즉 소년 다윗 조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3)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예배당에 안치할 조각상을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다. 1529년 칼5세가 피렌체 점령 당하였다.
4) 시스티나 성당 대벽화
사랑하는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나 로마에 정착했다.
교황 바오르 3세 위촉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천정벽화를 그리다.
이후 많은 벽화, 특히 많은 조각작품을 제작한다
1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564년 89세를 일기로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5) 모세
율리오 2세의 영묘와 <모세> 1505~1545
완공하는 데 무려 40년이나 걸렸다.
6)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 벽화,(천지창조) 1508~1512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1508~1512).
작품은 500평방미터의 천장 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해야 했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으나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다.
7)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 1535~1541
1535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여러 동생들이 먼저 떠나갔다.
1564년에 죽다.
9) 라파엘로
라파엘로(1483-1520)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우르비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화가이며 궁정시인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司祭)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페루지노(Pietro Peruggino)의 그림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피렌체에서 몇 년간 그림을 그린 라파엘로는 1508년 로마로 건너갔으며 1509년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내부에 있는 스탄체(Stanze) 서명실(署名室)의 벽화를 그렸다. 이곳에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三德像)》 등을 그렸다.
아테나 학당은 유명한 철학자를 모두 모았다. 얼굴에 레오나르드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그려넣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유명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파르네시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벽화를 의뢰받은 것도 이 무렵이며 이때 제작된 그림이 그의 대표작인 《갈라테아의 승리》이다. 당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37세로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그의 그림은 위에 열거한 작품들 이외에도 초상화와 성모상이 유명하다.
성모상은 인쇄되어서, 카톨릭 신자의 거의 대부분이 성모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