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병풍에 별을 통째 옮겨 담은 화백
조선 문종 때 묵화를 잘 치는 화백이 있었지.
그의 이름은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설로 전해졌네.
그가 꽃을 치면 나비나 벌이 붙고, 대나무를 치면 부채 필요 없이 여름을 난다고 전해졌어.
하지만 화백의 재능에 비해 그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어.
그가 명성을 얻지 못한 이유는 그의 기행 때문이었을 거야.
당장 저녁거리가 없어도 그는 함부로 그림을 그려 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그림을 받아 가려면 그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가능했거든.
즉, 그림을 이해할 줄 알고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거나 애착을 갖는 사람이 아니면 어떤 경우라도 그림을 내주지 않았어.
또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거나 인성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후한 값을 쳐주어도 의뢰를 받지 않았고.
변변한 화방이 없는 그는 손수 만든 대나무 먹과 붓을 사용해 그렸지만, 그의 그림을 보면 세상 어떤 지필묵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개와 경지가 있었지.
한편, 성 외곽에서 도성 안으로 이사 온 사람이 있었는데.
장터를 떠돌던 장돌뱅이 신세에서 무역으로 거상이 된 사람이었지.
거상은 돈으로 면천한 양반이 되었어.
그러나 거상은 다른 면천 양반과 달랐다.
어느 정도 학문도 익혔고 행실도 지탄받을 짓은 하지 않았어.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고, 소작농에게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지.
어느날 거상은 가보로 소장해도 좋을 만한 12폭 병풍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더군.
향나무를 다듬고 조각해 수년에 걸쳐 만든 병풍은 붉은 금과 영사를 섞은 낙관으로 봉인된 표구장의 인생 작품이었네.
거상이 병풍을 펼쳐보고 표구장에게 물었어.
“참 진귀한 물건은 맞는데. 어찌 그림은 없소?”
표구장이 대답했어.
“이 병풍을 만든 의도는 그림이 없어도 조선 제일의 명품이라 자부하기 때문이나, 만약 이 병풍에 그림을 그릴 위인을 만나면 천하제일의 보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여 그런 화백을 기다릴 수 없어 이 물건을 처분하려는 것입니다.”
거상이 또 물었어.
“대개 그림을 받고 표구를 하는데, 이 병풍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인데 누가 감히 이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겠소?”
표구장이 대답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병풍에 그림을 그리려면 재필없이 일 획에 그려야 할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지요. 허지만 평생 표구를 하면서 그런 화백이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는 예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병풍을 만들었지요.”
거상은 두말없이 병풍을 한푼 깎지 않고 사들였네.
거상이 되고 신분도 면천했으나 가문에 어울릴 가보가 없던 차여서 거상은 이 병풍으로 집안의 가보를 만들 결심을 했어.
그때부터 거상은 병풍에 그림 그릴 화백을 찾기 시작했지.
거상의 소문은 화백의 귀에도 들어갔다.
병풍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그림 그릴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에 화백은 마음이 이끌린게지.
이 정도의 배포면 범상치 않은 인품을 가진 거상이라 여겼어.
며칠 후 화백은 거상을 찾아갔지.
화백이 대청에 펼친 병풍을 보고 대뜸 말했다.
“이 병풍은 혼으로 만든 작품이라 그림도 반드시 혼을 불어넣어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병풍에 그림 그릴 사람은 조선천지에서 나 아니면 없을 것입니다.”
거상이 물었다.
“그걸 어찌 증명할 수 있소?”
화백은 가져온 지필묵으로 그 자리에서 어렵다는 백일홍을 쳤지.
막 그림을 그리고 났을 때 한 마리 나비가 날아와 앉았어.
화백의 그림 솜씨에 탄복한 거상이 말했네.
“수많은 화백이 다녀갔지만 모두 혀를 내두르고 돌아갔소. 표구장의 말에 의하면 그림에 실패했을 경우 이 병풍은 다시 만들 수 없다하오. 만약 실패하면 어찌하시려오?”
화백이 조금도 주저 없이 말했다.
“내 목을 내놓겠소.”
거상은 꼼꼼히 화백을 살펴본 후 결단을 내렸다.
“좋소. 성공하면 내 그대를 귀히 대접할 것이나, 만약 실패하면 약조대로 그대의 목숨을 거둘 것이니 여기 서명하시오.”
서명 전 화백도 조건을 붙였지.
“나는 비록 그림이나 그리는 환쟁이지만 말을 뒤집는 소인배는 아니오. 허나 대감도 한가지 약조는 해 주셔야겠습니다.”
거상이 말했어.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이 병풍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한 달이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할 테니 한 달 동안 내가 기거할 거처를 마련해 주시고, 한 달 안에는 어느 사람도 내 거처에 얼씬 못하게 해 주시오.”
두 사람은 계약서에 서명했고, 그리고 그날부터 화백은 거상의 사랑채에 틀어박혔지.
칠첩반상을 사랑채에 들이는 외에 누구도 사랑채의 화백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름이 지났을 때였네.
사랑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화백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거상이 종들에게 물었어.
“어찌하고 있느냐?”
“참 희한한 사람입니다. 그림 그릴 사람이 붓 한 자루도 없고, 밤낮으로 대나무 재로 먹만 만들고 있습니다요.”
또 다른 종이 말했다.
“낮에는 처자빠져 자고, 밤에는 정원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혹시 미친놈 아닐까 싶은 걱정입니다.”
또 다른 종이 말했다.
“비 오는 날은 하늘도 안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거상이 말했다.
“그럴 테지. 계속 지켜보거라.”
그럭저럭 한 달째 되는 날 아침이었어.
화백이 거상을 찾았다.
“오늘 밤 그림을 그릴 터이니 준비해 주시오.”
화백은 거상의 병풍을 사랑채 마당에 펼쳐 놓게 하고 그동안 손수 만든 대나무 먹을 내놓으며, 종들에게 큰 대야에 먹을 갈도록 지시한 후, 화백이 한 가지 더 추가지시 했어.
마당에 처박혀 있던 대나무 빗자루를 가리켰다.
“저 빗자루를 정성껏 씻어 병풍 옆에 세워 두시오.”
거상과 종들은 빗자루를 씻으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혹시 잡귀 물리치는 의식일지 몰라 묵인했지.
그리고 화백은 하루 종일 염불하거나 잠만 잤어.
밤이 이슥해지자, 종 들이 화백에게 보고했네.
“화백님, 먹물 다 준비됐습니다.”
화백은 부스스 일어나 향을 들고 사랑채 마당에 나가 두 손으로 합장하며 붉은 향을 태웠어.
그리고 잠시 뒤 화백의 그림 그리는 장면을 지켜보려던 거상과 종들은 기절초풍했지.
화백이 피우던 향을 내던지고 쏜살같이 달려가 병풍 옆에 세워 두었던 대나무 빗자루를 들어 대야에 담긴 먹물을 찍더니 사정없이 병풍을 단번에 그어 버렸거든.
병풍은 순식간에 먹물투성이가 되었지.
미처 손쓸 시간도 없었어.
거상의 집안은 난리가 났지.
화백은 덕석에 돌돌 말려 거상의 앞에 내팽개쳐졌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거상은 계약서를 흔들며 소리쳤다.
“내, 하자는 대로 다 해 주었거늘 어찌 이런 행패를 부린단 말이더냐?”
화백이 비웃었어.
“내가 사람을 잘 못 보았소. 그대가 비록 장사꾼이지만 안목이 높은 대인으로 봤는데 어처구니없구려. 그대 같은 소인배에게 죽을 이유는 없으나 약조했으니 내 목을 치시오.”
그러나 거상은 약조대로 화백의 목을 치지는 않았다.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 후, 화백의 초가를 불태우고 마을에서 내쫓았다.
3년이 지났다.
학문을 더 익히고 국고를 채운 공으로 거상은 문종의 신료로 등용됐다.
어느날 시정을 시찰하던 문종이 때마침 급변한 폭한의 날씨로 거상의 집에서 피한하게 됐다.
임금의 등장에 거상은 안절부절못하고 난리가 났어.
거상은 잽싸게 안채를 비웠으나, 민폐가 싫었던 문종은 사랑채를 고집했네.
거상은 외풍을 가리기 위해 3년 전에 처박아 두었던 병풍을 꺼내 윗목에 거꾸로 쳤지.
다행히 한 점의 바람도 새어들지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잠을 청했으나 갑자기 방안이 훤해져 문종은 감았던 눈을 떴다.
병풍 뒤에서 훤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문종은 일어나 병풍 뒤로 돌아갔다.
먹물투성이여야 할 병풍을 쳐다본 문종은 두 눈을 의심했다.
화백이 대나무 빗자루로 먹물 뿌렸던 12폭 병풍에서 별들이 빤짝이고 있었다.
병풍 속에서 유성도 지나갔어.
숨이 막힐 듯 감탄한 문종은 살며시 봉창을 열고 밤하늘을 쳐다봤지.
밤하늘의 별들이 12폭 병풍 크기만큼 잘려 나가 있었어.
문종은 아무도 모르게 병풍을 닫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봤어.
방금 잘려 나갔던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문종은 다음날 거상의 진상품을 모두 거절하고 굳이 병풍을 가져갔지.
거상은 새파랗게 질렸어.
병풍으로 임금을 농락한 죄로 이제 죽은 목숨이라 여긴 거상은 석고대죄했다.
그러나 문종은 거상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제상의 자리를 하사했어.
거상은 능멸 죄를 사하고 오히려 더 높은 관직을 내린 문종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했으나 더 크게 관직을 내린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네.
문종도 끝까지 병풍의 비밀을 숨긴 체, 암행어사에게 명을 내려 화백의 소재를 수소문했지.
그러나 조선천지를 다 뒤졌지만, 화백의 행방은 알 수 없었어.
거상도 죽을 때까지 병풍의 가치와 문종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 하시기 바라며 항상 건필 하세요
고맙습니다 젠틀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