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장수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은
백기는 이름이 공손기이며
범저에 의해서 물러나
최후를 맞는 용맹한 장수이며,
왕전은 진시황 때에
조금은 현명한 장수라고 생각된다.
백기는 앞의 열전에서도
내용이 조금 나오지만
무려 70여성을 함락하였고,
사기에 기술된 숫자만으로도
85만명의 목을 베어낸
전과를 갖고 있다.
당시 전투가
손자의 병법전까지는
전차중심의 전투라고 생각하면
놀라움과 조금은
잔인함이라고도 생각된다.
항우도 20만을 생매장하고
뒤가 좋지 않았으나,
백기는 무려 40만이나
생매장하고,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하늘의 도가 없다면 몰라도
끝이 좋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전투에 뛰어나고
형세판단이 좋지만
무지한 왕이 전쟁을 독려하니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처음에 자신의 결백을 말하다
결국 자신이 많은 목숨을 거둔것을
반성하는 것으로 이름이 남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왕전, 아들 왕분, 손자 왕이까지
삼대가 장군이다.
진시황에게 형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60만이 필요함을 말하다,
젊은 패기의 이신이
20만이면 충분하다는 계략이
채택되면 물러난다.
하지만 결국 이신이 패하고,
진시황이 말을 달려 왕전에게 간다.
진시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은 것은 알지만
처음으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절대군주가
한낱 장수에게
그의 계략이 옳았음을 말하고
나의 잘못을 즉시 인정한다는 것은
배울점이라고 본다.
한나라 유방도
스스로의 잘못을 항상 되짚고
반성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60만 장병을 얻어 다시 전투에 나감에
진시황의 의심이 많은 성품을 아는 그는,
계속해서 재물을 요청한다.
진나라의 상당전력을 갖고 출정하매,
스스로가 전복이나 혁명을 꿈꾸지 않고
재물과 같은 소소한 꿈을
갖고 있음을 시위한다.
또한 병사를 놀리고 쉬게하고
잘 대우한다.
병사들이 돌던지기와
멀리뛰기를 한다는 것은
체력을 비축하여 충분히
건실해 졌다는 말이니
싸울 때가 되었다는 그를 보면
많은 사람을 다루는 것의
때와 장소, 행동의 분별을
판단하는 깊은 생각은 참 대단하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왕이가
다시 장군이 되었을 때
어떤이가 장수가 삼대에 이르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말한 것은
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그렇게 이기는 것이 최상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많은 국자재산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말이다.
더욱 걸작은
태사공의 평가라고 생각한다.
“자(尺)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에도 긴데가 있다”라는
인용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의 일장일단의 존재와
쓰임과 상황의 일치에
대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읽게 되는 원문을 보니
또 보이는게 조금씩은 달라진다.
南拔鄢郢(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北摧長平(북최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遂圍邯鄲(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일은
武安爲率(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졌다.
破荊滅趙(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음은
王翦之計(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作 白起王翦列傳 第十三
(작 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십삼을 지었다.
백기 개관
백기(중 : 白起, 병음: Bai Qi 바이치, ?
~ 기원전 257년 11월)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생사 : ? ~ 기원전 257년
.출생 : 지미현(郿县)
.사망 : 지두우(杜邮)
.별명 : 무안군
.복무 : 秦(진나라)
.복무 기간 : 기원전 294년 ~ 기원전 257년
.최종 계급 : 상장군(上将军)
.주요 참전 : 이궐 전투, 장평 대전
왕전(王翦)과 더불어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진 소양왕(昭襄王) 때에
조나라(趙), 위나라(魏), 한나라(韓),
초나라(楚) 등을
공격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진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전국책에서는 그의 이름을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하였다.
무안군(武安君)의 칭호를 받았다.
생애
출생
백기는 미읍(郿邑) 출신으로
용병(用兵)에 능하였다.
그의 출신은 불확실하나,
신당서 재상세계표에서는
진 목공(穆公) 시대에 장령을 지낸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한편 당나라(唐) 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고공현령백부군사장
(故鞏縣令白府君事狀)에서는
백기의 조상이
초나라(楚)의 공족인
백공 승(白公勝)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백씨(白氏)가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백공 승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하자
그 아들이 진나라로 망명하여
대대로 그곳에서
장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나라 정벌과 이궐전투
기원전 294년(소양왕 13),
백기는 좌서장(左庶長)에 임명되어
한나라(韓)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기원전 293년(소양왕 14),
백기는 소양왕의 외삼촌인
위염(魏冉)의 추천으로
상수(向壽)를 대신해서
한나라(韓)와 위나라(魏)를 공격하여
이궐(伊闕)에서 승리하였으며,
24만 명을 잡아 죽이고
위나라의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포로로 잡았으며
5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 일로 인하여 백기는
국위(國尉)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安邑) 동쪽을 취해
간하(乾河)에 이르렀다.
.위나라 정벌
기원전 292년(소양왕 15),
백기는 대량조(大良造)에 임명되었으며,
위나라를 공격해
크고 작은 61개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91년(소양왕 16),
백기는 객경(客卿) 사마착(司馬錯)과 함께
위나라의 원성(垣城)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묘사된
해당 시기의 백기의 행보는
다른 기록과는 모순되는 점이 존재한다.
사기 진본기에서는
기원전 292년(소양왕 15)에
백기가 위나라의 원(垣)을 빼앗았다가
다시 이를 돌려주었다고 하였고,
기원전 289년(소왕 7)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61개 성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초나라 정벌과 영성점령
기원전 286년(소양왕 21),
백기는 조나라(趙)를 공격하여
대(代)의 광랑성(光狼城)을 빼앗았다.
기원전 279년(소양왕 28),
백기는 초나라(楚)를 공격하여
언(鄢)과 등(鄧)의 5개 성을 빼앗았으며,
죄인들을 사면시켜 이주시켰다.
기원전 278년(소양왕 29),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영(郢)을 빼앗았으며,
이릉(夷陵)을 불태웠고
마침내 동쪽으로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이에 초 경양왕(頃襄王)은
영을 버리고 달아나
동쪽의 진(陳)으로 수도를 옮겼다.
진나라는 점령한 영을
남군(南郡)으로 삼았으며,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의 작위를 받았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는
백기가 초나라의 영을 점령한 후에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나,
사기 진본기에서는
촉군수 약(若)이
무군(巫郡)과 강남(江南)을 점령하고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삼진(三晉)과의 전쟁
기원전 276년(소양왕 31),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2개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73년(소양왕 34),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華陽)을 빼앗아
그 장수인 망묘(芒卯)를 달아나게 하였으며,
삼진(三晉), 즉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의
장수들을 포로로 잡고
13만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병졸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기원전 264년(소양왕 43),
백기가 한나라의 형성(陘城)을 공격해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의 목을 베었다.
기원전 263년(소양왕 44),
백기가 한나라의
남양(南陽) 태행산(太行山)을 공격하여
그 길을 끊었다.
.조나라 정벌과 장평대전
기원전 262년(효성왕 4),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한나라의 상당(上黨)이
결국 조나라에
투항할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후 기원전 260년(효성왕 7),
4월에 진나라의 왕흘(王齕)이
상당을 빼앗자
그 인민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조나라의 명장 염파(廉頗)가
장평(長平)에 파견되어
진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공세를 펼쳐서
6월에는 조나라의 군영을 함락시켜서
두 개의 보루를 빼앗고
네 명의 교위를 사로잡았다.
또한 7월에는 진나라가
조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교위 둘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염파는 흔들리지 않고
함부로 나서서 싸우는 것을 피하면서
보루를 쌓고 방어를 강화하는 등의
장기전으로 대응하였다.
그러자 진나라 측에서는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말을 믿은 조 효성왕은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대신 장수로 파견하였다.
한편 진나라 측에서는
조나라 측의 장수가
조괄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백기를 보내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고,
왕흘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군중에 무안군이
상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목을 자르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전장에 도착한 조괄은
곧바로 출병하여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자 백기는 기병을 풀어서
패하여 달아나는 척 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측의
보루까지 추격하였으나
보루가 견고하여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진나라 측은
기병 2만 5천으로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었고,
또한 기병 5천으로
조나라의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의 군대는 둘로 나누어지고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진 조나라 측은
보루를 쌓고 수비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렸다.
조나라의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진 소양왕은 몸소 하내까지 와서
백성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는 한편
15세 이상을 모두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병과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결국 9월이 되자
46일 동안 포위당한 조나라의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어 몰래 서로를 죽여서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탈출하려고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4,5차례 공격했지만 탈출하지 못했다.
조괄은 정예 부대를 내세워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의 군사가
조괄을 활로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결국 진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 싸움을 장평대전이라 한다.
.포로학살
장평대전에서 패하여
백기에게 항복한 조나라 군사는
40만 명이었다.
백기는 이 군사들을 살려두면
훗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이들을 거짓말로 속여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으며,
나이가 어린 240명만을 남겨서
조나라로 보냈다.
이로 인하여 장평대전에서 죽은
조나라 군사가 45만 명에 달하였으며,
이에 조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1995년,
중국 산서성 고평시(高平市)
영록촌(永祿村)에서
장평대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인골(人骨)이
집단으로 파묻힌 구덩이
10여 곳이 발견되었고,
각 구덩이마다 20세~45세 사이의 남성
130여 명이 매장되어 있었다.
발견된 유골 가운데에는
대퇴골에 화살이 깊게 박힌 것,
두개골이 둔기 등에 맞아서 함몰된 것,
참수된 것,
칼자국이 남아있는 것 등이
확인되었다.
.질병과 실각
기원전 259년(소양왕 48),
진나라가 계속해서
조나라를 공격하여
피뢰(皮牢), 태원(太原), 상당 등을 빼앗자,
한나라와 조나라에서는 두려워하여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는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范睢)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범수를 만난 소대는
진나라가 이대로 조나라를 멸망시키면
백기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라
범수의 입지를 위협하게 될 것이므로
조나라로부터 땅을 받고 화친하여
백기가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을 들은 범수는
소양왕에게 건의하여
진나라 군대가 지쳤으니
조나라와 한나라로부터 땅을 받고
군대를 쉬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소양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정월에 백기와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 사정을 알게 된 백기는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해 9월에 진나라가
다시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으로 하여금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백기는 병을 앓고 있어서
종군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58년(소양왕 49)
정월까지도 왕릉이
한단을 빼앗지 못하자
진나라에서 군사를 증원하여
왕릉을 도왔다.
그러나 왕릉은 교위 5명을 잃었을 뿐
이기지 못했다.
이때에 백기의 병이 낫자
소양왕이 왕릉 대신에
백기를 장수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백기는 오랜 전쟁으로
진나라 또한 피해가 막심할뿐더러,
지금 조나라와 다른 제후들이
안팎에서 호응하여 공격해온다면
진나라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라 주장하며
공격을 반대하였다.
소양왕은 백기가 말을 듣지 않자
범수를 보내 출전을 부탁하였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결국 진나라는 왕릉 대신에
왕흘(王齕)을 장수로 삼아
8~9개월에 걸쳐
한단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이기지 못하였다.
그 동안에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과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등이
수십 만 병력을 이끌고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백기가 “진나라 왕께서
신의 계책을 듣지 않으시다가
지금 어찌 되었는가?”라 말했다.
소양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화가 나서
백기를 강제로 장수로 삼아
전장으로 보내려 하였으나
무안군은 끝까지 병을 핑계 삼으며
가지 않았다.
범수가 또다시 백기에게
출전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때에도 백기는 가지 않았다.
소양왕은 백기를 파면하여
사오(士伍, 병졸)로 강등시키고는
음밀(陰密)로 유배보냈으나
이때에 백기는 병이 들어서 가지 못했다.
.죽음
기원전 257년(소양왕 50) 10월,
소양왕이 백기를 재촉하자,
결국 백기는 진나라 수도인
함양(咸陽)을 떠나
서문(西門) 10리 밖의
두우(杜郵)에 이르렀다.
이때 “백기가 유배를 가면서도
오히려 원망을 품고
복종치 아니하며 불손한 말을 한다”는
말을 들은 소양왕은
11월에 백기에게 검을 보내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백기는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 하였다.
백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 때에
조나라 병졸로서
항복한 자들 수십 만명을
내가 속여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을만하다.”라
하고는 자살하였다.
백기가 죄없이 죽었기에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평가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나라의 대표적인
명장들인 백기, 왕전 등의
열전을 함께 묶어서 구성하였다.
이들의 열전은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에 수록되었다.
여기서 사마천은
“백기는 적을 잘 헤아려
변화에 맞추어 무궁하고
기발한 계책을 내었으니
그 명성이 천하를 떨게 했다.
그러나 응후의 근심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라 하였다.
또한 이 점을 꼬집어서
왕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각자 단점이 있었다.”라
평하였다.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에서
소대는 백기가 쌓은 공적에 대하여
“무안군(武安君, 백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는데,
남쪽으로 언(鄢), 영(郢), 한중(漢中)을
평정하였고,
북쪽으로는 조괄(趙括)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망(太公望)의
공적이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라
말하였다.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
하였는데,
이는 곧 전국시대에
백기, 왕전, 염파, 이목 등이
군사를 가장 잘 부렸다는 뜻이다.
* 백기열전
1. 戰必勝攻必取,戰神白起
–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한 전신 백기.
백기(白起)는 미(郿) 출신이다.
용병에 능해 진소왕(秦昭王 )을 모셨다.
진소왕 13년 기원전 294년,
진나라의 좌서장(左庶長)이 된 백기는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그해에 양후가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임비(任鄙)를 천거하여
한중의 태수로 삼았다.
그 다음 해, 좌경(左更)으로
작위가 오른 백기는
이궐(伊厥)에서
한(韓)과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격파하여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었다.
다시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고
5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그 공으로 작위가
국위(國尉)로 올랐다.
계속해서 하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安邑) 이동의
한나라 땅으로 진출하여
건하(乾河)에 이르렀다.
다음 해, 다시 대양조(大良造)로
오른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 성을 함락시켰다.
다음 해 객경 사마조(司馬錯)와 함께
위나라의 원성(垣城)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다시 5년 후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성(光狼城)을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7년 되는 해에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 영(郢)과 등(鄧)을 함락시키고
초나라 역대왕들의 분묘가 있는
이릉(夷陵)을 불태웠다.
그 다음 해 다시
초나라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초왕은 영(郢)을 버리고 도망쳐
동쪽의 진(陳)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나라는 이로써 초나라의 도읍지였던
영(郢)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진나라는 그 공로로 백기를 무안군에 봉했다.
초나라의 도성 영을 점령하고
무군(巫郡)과 검중군(黔中郡)을
평정했음으로 무안군이라는
봉호를 내린 것이다.
진소왕 34년 기원전 273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華陽)을 함락시키자
위장 망묘(芒卯)는 패주했다.
백기는 계속해서
세 명의 위나라 장수를 사로잡고
병졸 13만 명의 목을 벴다.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군사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소왕 43년 기원전 264년,
백기라 한나라의 형성(陘城)을 공격하여
그 주위의 성 5개를 함락시키고
한나라 군사 5만 명의 목을 벴다.
진소왕 44년 기원전 263년,
백기가 남양(南陽)으로 나아가
태항산으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2. 長平大戰 坑殺降卒(장평대전 갱살항졸)
장평대전에서 항복한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다.
진소왕 45년 기원전 262년,
한나라의 야왕성(野王城)을 공격하자
야왕의 수장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한나라 본국과
상당군이 통하는 길이 끊겼다.
상당의 태수 풍정(馮亭)이
그 백성들과 계책을 의논하며 말했다.
신정(新鄭)으로 통하는 길이 끊겼으니
한나라는 틀림없이
우리를 그들의 백성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진나라 군사가 며칠이면
이곳으로 진군해 오면
그 때 한나라는
구원군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 상당의 땅을
조나라에 바쳐야겠다.
조나라가
만약 이곳 상당의 땅을 받아들인다면
진노한 진나라는
틀림없이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는 조나라는
필시 한나라와 친선을 맺어
같이 대항하려고 할 것이다.
한과 조 두 나라가 한 마음이 되어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진나라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풍정은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상당군의 사정을 알리고
그땅을 들어 바치겠다고 했다.
조효성왕이 평양군(平陽君)과
평원군(平原君) 등을 불러
계책을 의논했다.
평양군이 먼저 말했다.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당군의 땅을 받게 되면
얻는 이익보다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았음에도
한 개의 군에 해당하는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조나라는
한나라의 상당군 땅을 접수하고
풍정을 화양군(華陽君)에 봉하고
상당군을 계속 다스리도록 했다.
진소왕 46년 기원전 261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구지(緱氏)와
인(藺)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진소왕 47년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王齕)을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을 점령하도록 했다.
상당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가 군사를 장평(長平)으로 진군시켜
상당의 백성들을 진무했다. \
4월 왕흘이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장평으로 보냈다.
조군의 공격을 받은
진군의 척후병들이 반격하여
조군의 비장 가(茄)를 참했다.
6월 진군이 조나라의 진채를 공격하여
두 곳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도위 4명을 죽였다.
7월 조군이 높은 루벽을 쌓아 굳게 지켰다.
진나라가 다시 조군의 루벽을 공격하여
도위 2명을 죽이고
그들이 지키던 루벽의 서쪽 진지를 점령했다.
염파가 여전히 루벽에 의지해서
굳게 지키자
진나라가 수차에 걸쳐 도전했으나
조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조왕이 듣고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진군과 싸움을 피한 염파를 비난했다.
그러자 진나라 상국 응후(應侯) 범수(范睢)는
사람을 조나라에 보내
천금의 돈으로 반간계를 펼쳤다.
그 사람이 말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일은
오로지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 장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조군의 대장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염파는 싸우기 쉬운 상대라
조만간에 그는 싸움에 지고
우리 진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그 때 진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에 걸쳐 지고
많은 군사를 잃었을뿐만 아니라
반격을 하지 않고
루벽에만 굳게 의지한 채
싸움에 응하지 않은
염파의 작전에 분노한 조효성왕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현혹되어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진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마복군의 아들이
조군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비밀리에
무안군 백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왕흘을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은 후에
만일 군중에 무안군이
대장이 된 사실을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형에 처하겠다는 군령을 내렸다.
조괄이 조나라 군영에 당도하자
그 즉시 군사를 이끌고
보루를 나가 진나라 진영을 공격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거짓으로
싸움에 패하는 척하며 달아나면서
별도의 기병(奇兵) 두 부대를 매복시켜
조나라 영채를 기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조군은 승세를 타고
진군을 추격하여
진군이 건설한 루벽에 당도했다.
그러나 진군의 루벽도
역시 견고해서 결코 돌파할 수 없었다.
그때 진나라가 매복시킨
2만 5천에 달하는 2대의 기병이 일어나
조나라 군사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시 5천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조군과 영채 사이의 통로를 봉쇄하여
양도를 끊었다.
이로써 조나라 군대는
2대로 분리되어
양도가 끊기게 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한 진군의 경기병이
조나라 진지를 공격했다.
조군은 싸움에 패하고
루벽을 쌓아 굳게 지키며
본영으로부터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군의 양도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진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내(河內)의 백성들에게
각기 일급의 작위를 올린 후에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가 조군에게 보내는
식량의 보급을 끊었다.
9월 조나라 군사들이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한지가
이미 46일이 지나자
군영 내의 병사들은
서로 죽여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윽고 진나라 루벽을 공격하여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군을 모두 4대로 나주어
4-5 차례나 반복해서 시도했으나
결코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군 대장 조괄이
다시 정예병을 차출하여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했다.
진군이 선두의 조괄을
활을 쏘아 사살하자
조군은 싸움에서 패하고
40만에 달하는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무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나라 항졸들의 처리에 대해
무안군은 생각했다.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군을 함락시켰지만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싫어하여
조나라에 투항했다.
그들을 살려 돌려보내주게 되면
다시 조나라의 군사가 될 것이니
모두 죽이지 않는다면
후에 군중에 변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백기는
조나라의 항졸들을 생환시켜준다고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단지 나이 어린 240명만을 살려서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백기는 전후로 항복한
조나라의 45만에 달하는 군사들을
모두 살해했다.
소식을 듣게 된 조나라의 상하는
모두 경악했다.
3. 范睢循私 白起積怨(범수순사 백기적원)
– 범수가 사심을 품고
조나라와 강화를 맺자 원한을 품은 백기.
진소왕 48년 10월
상당군을 평정한 진나라가
진군을 2대로 나누어
조나라로 진군시켰다.
왕흘의 군사는 피뢰(皮牢)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사마경(司馬梗)의 부대는
태원(太原)을 점령했다.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한과 조 두 나라는
소대(蘇代)에게 후한 폐물을 주어
진나라 상국 범수에게
유세하도록 시켰다.
범수를 찾아간 소대가 말했다.
무안군이 조나라의 대장으로 임명된
마복군의 아들을
싸움에서 죽인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다른 왕들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될 것이고
무안군은 삼공(三公)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70여 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남쪽으로는 또한 언(鄢), 영(郢) 및
한중(漢中)의 땅을 평정했으며
북쪽으로는 조괄이 이끌던
조나라 군사 45만 명을 몰살시켰습니다.
비록 주나라를 창업하여
삼공에 임명된 주공(周公), 소공(召公)
및 여망(呂望)도 미치지 못할 공업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자가 되고
무안군은 삼공에 임명될 것인데
대감께서는 능히 그 보다 낮은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감께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으신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옛날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형구(邢丘)를 공격하여
상당을 위태롭게 했을 때
상당의 백성들은 모두 진나라에 반하여
조나라로 귀의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진나라를 싫어하게 된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의 땅은 연나라가,
동쪽의 땅은 제나라가,
남쪽의 땅은 한과 위 두 나라가
차지하게 되니
대감께서 얻을 수 있는
백성의 수효는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나라로부터 그들의 땅을 할양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응후 범수가 그 말으 듣고
진소왕을 접견하고 말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병역으로
우리 진나라 군사들이 지쳐 있음으로
차라리 한과 조 두 나라에게
땅을 요청하고
강화를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소왕이 번수의 말을 쫓아
한나라에게는 원옹(垣雍)의 땅을,
조나라부터는 6개의 성을 할양받고
강화를 맺었다.
다음 해 정월,
진나라는 군사를 철수시켜
해산시켰다.
백기가 조나라를 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강화를 맺은 것은
범수의 계략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기는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4. 僞稱重病 拒不受命(위칭중병 거불수명)
– 중병을 핑계로 왕의 명을 받들지 않다.
그해 9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무안군 백기는
몸에 병이 들었음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진소왕 49년 기원전 258년 정월
왕릉이 한단성을 공격했으나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진나라가 지원군을 더 보내
왕릉을 돕도록 했으나
왕릉은 오히려 군사를 잃고
교위(校尉) 5명을 잃었다.
그때 무안군이 병이 완쾌되었음으로
진소왕은 그를 왕릉
대신 조나라 정벌군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다.
무안군이 진소왕에게 말했다.
한단성은 원래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진나라에 오랫동안 원한을 품어온
제후들이 한단성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가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진나라의 군사들도
절반에 이르도록 그 군사를 잃어
지금 진나라 국내도
텅텅 빈 상태입니다.
진나라는 하천과 산으로 끊긴
먼 길을 행군하여
다른 나라의 국도를 빼앗으려고
한 반면에
조나라는 안에서 내응하고
제후들은 밖에서
우리 진군을 공격하니
진나라 군사는
필시 싸움에서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러나 진왕이 듣지 않고
왕명으로 백기의 출전을 명했으나
백기는 받들지 않았다.
다시 진왕은 상국의 신분인
응후 범수를 자사로 보내
출전을 종용하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사양하며
결코 명을 받들지 않고 이내 칭병했다.
진소왕은 할 수 없이
왕릉을 파면하고
왕흘(王齕)을 대장으로 삼았다.
왕흘은 8-9월에 걸쳐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했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위나라 공자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가
수십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진나라는 많은 군사를 잃었다.
무안군이 듣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진소왕이 듣고
대노하여 강제로 무안군으로 하여금
왕명을 받들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계속 자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응후 범수가 몸소 찾아가 청했지만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소왕은
무안군의 작호를 면하여
사졸의 대오에 넣은 후에
음밀(陰密)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살도록 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난 무안군은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기를 3개월이 지났을 때
제후들의 군사들이
진군을 매우 세차게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은
여러 차례 퇴각을 거듭하며
사자를 매일 보내왔다.
5. 杜郵爲戮(두우위륙)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되다.
진왕이 다시 사람을 보내
백기를 음밀로 떠나라고 재촉하자
벽기는 결국 함양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무안군이 아픈 몸임에도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함양의 서문을 나와
10리 되는 두우(杜郵)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진소왕은 응후 범수와 신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유배지로 가는 백기가
앙앙불락하면서
많은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진소왕이 듣고
사자에게 검을 주어 보내
백기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무안군이 그 검을 받아들고
한탄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죽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했다.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몸이다.
장평에서의 싸움에서
조나라의 항졸 40여 만 명을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으니
그 죄값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을 마친 무안군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때가 진소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의 일이었다.
백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불쌍하게 여긴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왕전(王翦)
왕전 개관
왕전(王翦, ? ~ ?)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백기(白起)와 더불어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진 시황제(始皇帝) 때에
조나라(趙), 연나라(燕), 초나라(楚) 등의
나라들을 공격해서
차례로 멸망시키며
진나라의 중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
.출신
왕전은 빈양(頻陽) 동향(東鄕)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했으며
진 시황제를 섬겼다.
.조나라 정복
기원전 236년(진시황 11),
왕전은 환기(桓齮), 양단화(楊端和) 등과 함께
조나라(趙)의 업(鄴, 지금의 허난 성)을
공격하여 9성을 빼앗았다.
이때에 왕전은 연여(閼與), 요양(橑楊)을
공격하였으며,
모든 군대를 통합하였다.
왕전은 18일 동안
군대를 통솔하며
군중에서 공로가
두식(斗食) 이하인 자들을
돌려보냄으로써
군사들의 수를 1/5로 줄이고
정예병만을 남겼다.
이후 왕전이
업과 안양(安陽)을 빼앗은 후
환기에게 군대의 통솔권을 넘겼다.
기원전 229년(진시황 18),
진나라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때에 왕전은 양단화, 강외(羌瘣) 등과 함께
출전하여
상지(上地)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의 정형(井陘, 지금의 허베이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왕전은 1년 남짓 동안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에 왕전은
조나라의 명장인 이목(李牧),
사마상(司馬尙) 등과 대치하였다.
그러자 왕전은
조나라 왕의 총애를 받던
곽개(郭開)에게 뇌물을 주어서
이목과 사마상이
진나라에 붙으려 한다는
거짓 보고를 하게 하였다.
이를 믿은 조나라 왕은
이목을 죽이고
사마상을 해임하고 말았다.
기원전 228년(진시황 19),
왕전은 강외와
조나라의 동양(東陽)을
모두 평정하여 빼앗았으며
조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목왕(幽繆王)을 사로잡았다.
그 후에 왕전은
연나라(燕)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산(中山. 지금의 산시 성)에
주둔하였다.
한편 조나라의 공자 가(嘉)가
종족들을 거느리고
대(代)로 달아나서
스스로 왕이 되고는
연나라와 연합하여
상곡(上谷)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연나라 정복
기원전 227년(진시황 20),
연태자 단(丹)이
자객 형가(荊軻)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왕전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신승(辛勝)과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대왕 가와 연합하여
진나라 군대와 맞섰다.
그러자 왕전은 역수(易水) 서쪽에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기원전 226년(진시황 21),
왕전은 병력을 증원받은 후
연태자 단의 군대를 격파하고
연나라의 도읍인 계성(薊城)을 점령하였다.
연나라의 마지막 왕인
연왕 희(喜)는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다.
사기 연소공세가에 의하면,
연태자 단은 이후
요동에서 아버지인
연왕 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그 머리가 진나라에 바쳐졌다.
그 외의 다른 기록에서는
계성 점령 당시에
왕전에게 목이 베였다고도 하고,
혹은 연수(衍水)에서
진나라의 장수 이신(李信)에게 패하여
붙잡혔다고도 한다.
이후 기원전 222년(진시황 25)에
연왕 희가
왕전의 아들인 왕분(王賁)에게
사로잡히면서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실각과 귀환
이후 진 시황제는
젊고 용감한 장수인 이신(李信)에게
초나라(楚) 정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군사가 필요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신은
“20만 명을 넘지 않아도 됩니다.”라
답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60만 명이 아니면 안됩니다.”라
하였다.
진 시황제는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고는
이신과 몽염(蒙恬) 등으로 하여금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왕전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이와 병을 핑계로
고향인 빈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신과 몽염은
각기 평여(平與)와 침(寢)을 공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신은 언영(鄢郢)을 격파한 후
성보(城父)에 몽염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사흘 밤낮으로 추격해온
초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진 시황제는
몸소 빈양으로 찾아가
왕전에게 사과하며
초나라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왕전은
6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여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
왕전이 출전하자
진 시황제가 몸소 파상(灞上)까지 와서
그를 전송했다.
그런데 왕전은 떠나기 전에
진 시황제에게
자손들을 위하여
많은 전택(田宅)과 원지(園池)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고,
함곡관에 이르러서도
5번이나 사자를 보내
좋은 땅을 청하였다.
이때 누군가 왕전에게
“장군의 요구가 지나칩니다.”라 하자,
왕전은 “진왕께서는
거칠고 사람을 믿지 않으신다.
지금 진나라 군대를
모두 내게 맡겼는데,
내가 자손의 생업을 위해
전택을 요구하여
뜻을 보여주지 않으면
진왕께서 나를
의심하시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초나라 정복
기원전 224년(진시황 23),
왕전은 몽무(蒙武)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에 왕전은 일부러
보루를 쌓고 군사들을 쉬게하며
초나라 군대가 수차례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다.
이에 초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왕전이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마침내 기(蘄)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그 장군 항연(項燕)을 죽였다.
기원전 223년(진시황 24),
왕전은 몽무와 함께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으며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에 이르는
땅을 빼앗았다.
기원전 222년(진시황 25),
왕전은 초나라의 강남(江南)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월군(越君)을 항복시키고
회계군(會稽郡)을 두었다.
.죽음과 사후
이후 왕전의 행적은
더이상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진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이르러
왕전과 그 아들인 왕분은
이미 모두 죽어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의 모순
한편 왕전이
초나라를 평정하는 과정에 대해서
사기 진시황본기에서는
왕전이 기원전 224년에
초왕 부추를 사로잡았고,
이듬해인 기원전 223년에
왕전이 초나라 왕으로 추대된
창평군(昌平君)을 격파하여 죽였으며
항연은 자결했다고 하였다.
이는 사기 육국연표, 초세가,
백기왕전열전, 몽염열전 등에
기록된
초나라의 멸망과정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앞뒤의 과정이 뒤바뀐 것이다.
그런데 1975년,
호북성 운몽현의 진나라 시대
관료의 무덤에서 발굴된
운몽수호지진간(雲夢睡虎地秦簡)의
연기(年記)에서는
진나라가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공격하였고,
기원전 224년에
초왕 부추를 사로잡았던 것을
추측케하는 기록이 있어서
사기 진시황본기의 서술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되었다.
후손
왕전에게는 아들인 왕분(王賁)과
손자인 왕리(王離)가 있었다.
왕분은 통무후(通武侯)의 작위를 받았고,
왕리는 무성후(武城侯)의 작위를 받았다.
후대의 기록인 신당서에 따르면,
왕전의 손자인 왕리는
왕원(王元). 왕위(王威) 등의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후 진나라가 멸망할 때에
왕원이 전란을 피해서
낭야(琅邪)로 이주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한나라(漢)의 왕길(王吉), 왕준(王駿),
왕숭(王崇),
조위(曹魏)의 왕웅(王雄),
진(晋)의 왕양(王祥), 왕도(王導)
왕돈(王敦),왕희지(王羲之)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문벌로서 이름을 떨쳤던
낭야 왕씨(瑯邪王氏) 집안도
왕전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즉 낭야 왕씨는
왕리의 먼 후손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한서 왕길전에는
왕리와 왕길 사이에 대한
관련을 적고 있지 않아서
신당서의 계도에 대해
신뢰성이 의심받고 있다.
* 왕전 열전
1. 滅趙逐燕(멸조평연)
조나라를 멸하고
연나라를 요동으로 쫓아내다.
왕전은 빈양(頻陽) 동향(東鄕)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병사의 일을 좋아한 왕전은
진시황을 모셨다.
시황 11년 기원전 236년
왕전은 진군의 장수가 되어
조나라의 연여(閼與)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주위의 성 9개를 점령했다.
진시황 18년 기원전 229년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1년여 만에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고
조왕의 항복을 받았다.
조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한
왕전은 그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28년,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에 진시황이 왕전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했다.
연왕 희(喜)는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을 평정하고 귀환했다.
진시황은 왕전의 아들 왕분을
장군으로 삼아
형(荊)을 정벌하게 했다.
왕분은 형의 군사를 격파하고
귀환 중에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의 항복을 받고
위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했다.
2. 왕전논병(王翦論兵)
왕전이 병사의 일을 논하다.
진시황은 삼진을 멸하고
연왕을 요동으로 몰아냈으며
또한 수차에 걸쳐
초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진나라 장수 이신(李信)은
젊고 용기가 있었다.
일찍기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의 태자 단(丹)을
연수(衍水)의 강안까지 추격하여
연군을 격파하고
단의 목을 취한 바가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이신을 용감하고
현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이신에게 물었다.
내가 초나라를 공략하여
취하고자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얼마의 병력이면 가능하겠는가?」
이신이 대답했다.
20만의 병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시황이 다시 왕전에게 묻자
왕전이 대답했다.
60만의 병력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시황이 왕전을 보고 말했다.
왕장군은 이제 늙었구려!
어찌 이리 겁이 많아졌소?
진시황은 이신을 대장으로 삼아
20만의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왕전은 자기의 말이 쓰이지 않게 되자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현직에서 물러나
고향 빈양으로 들어가 노년을 보냈다.
진나라의 대장군이 된 이신은
평여(平與)를,
부장(副將) 몽염(蒙恬)은 침(寢)을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이겼다.
이신이 남진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진로를 서쪽으로 돌려
초나라의 수도를 향해 진군하여
몽염의 군사들과
성보(城父)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초군이 이신의 뒤를 추격하여
3일 밤낮을 싸워
진군을 깨뜨리고
진군의 양쪽 성루를 점령하고
도위 7명을 살해했다.
진군은 결국 패주했다.
진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진시황이 대노하여
그 즉시 수레를 몰아
빈양으로 달려가 왕전에게 사죄했다.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이신이 과연 우리 진군을 욕보였소.
오늘 들으니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진하고 있다고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과인을
외면하지 말기 바라오.
왕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이미 몸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현능한 장군을
택하여 중임을 맡기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사죄하며 말했다.
내가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장군은 더 이상 사양하는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왕전이 진시황을 향해 말했다.
대왕께서 반드시 신을 쓰려고 하신다면
60만 명의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의 말대로 따를 뿐이오.
3. 구전문사(求田問舍)
전답을 구하여 진왕을 안심시키고
60만 대군을 휘몰아 초나라를 정벌하다.
그래서 왕전은 60만 명의 군사를 얻어
초나라 원정길에 올랐다.
진시황이 왕전을 파상(灞上)까지 나와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이 출전하면서
진시황에게 좋은 전답과 저택,
저수지가 딸린 윈림을
매우 심할 정도로 크게 청했다.
시황이 듣고 약속했다.
장군이 원정을 나가면서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는 것이오?
대왕을 위해 장수가 되어
전장에서 공을 이루었음에도
후로 봉함을 받지 못하게 되면
신은 단지 시골에서 사는
이름 없는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은 지금
대왕의 신임을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호수가 딸린 원림을 청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해서입니다.
진시황이 듣고 크게 웃었다.
왕전이 행군을 시작하여
무관(武關)에 이르렀을 때
다시 사자를 진시황에게 보내
약속을 지킬 것을 청하기를
다섯 번이나 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장군께서 청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시지 않으십니까?」
왕전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무릇 진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무장한
모든 군사들을 털어
모두 나에게 맡겼다.
내가 많은 전답과
저택을 스스로 청해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진왕이 어찌 나를 의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4. 이일대로(以逸待勞)
초나라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무너뜨리다.
이신을 대신한 왕전이
과연 초나라 영내로 진군했다.
왕전이 더 많은 군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는
국내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나라 군사를 막으려고 했다.
이윽고 왕전이 초나라 진영에 이르렀으나
보루를 높이 쌓게 하고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출병하여
계속해서 도전했으나
왕전은 결코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았다.
왕전은 매일 군사들을
휴식과 목욕을 시키며
좋은 음식을 선무하고
사졸들과 더불어 숙식을 같이 하며
친해졌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왕전이 사람을 시켜
군중에서 사졸들이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 사람이 와서 고했다.
투석놀이와 높이뛰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왕전이 듣고 말했다.
이제 사졸들을 부릴 수 있겠다.
초나라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도전을 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이 응전을 하지 않았음으로
이내 군사를 물리쳐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에 왕전이 군사를 일제히 일으켜
그 뒤를 추격하여
장사들로 편성된
별동대를 시켜 공격했다.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한
왕전의 진나라 군사들은
기남(蘄南)에 이르러
대장 항연을 살해하고
형군을 패주시켰다.
승세를 탄 진군은
초나라의 성읍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일 년여 만에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모든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왕전은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월(百越) 지방의 군장들이
지배하고 있던 땅을 점령했다.
한편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은
장군 이신과 함께
연과 제를 파하고
그 땅을 평정했다.
마침내 진시황 26년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천하를 모두 겸병했다.
겸병 전쟁을 수행 중
왕씨와 몽씨가
많은 공을 세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 때는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은 죽고 없었으고
몽씨 또한 멸족되었으나
진승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진나라는 왕전의 손자
왕리(王離)를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왕리는 거록성의 조왕과 장이를
포위하고 세차게 공격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 집안 출신이다.
지금 강한 진나라 군사들의
장수가 되어 새로 생긴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필시 왕리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의 객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아무리 명장 집안이라 할지라도
삼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움을 하면서
많은 상대방 군사들을 죽여
그 후대들은
상서롭지 못한 업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리는 왕전으로부터
3대에 이르는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항우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군을 공격할 때
왕리는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왕리가 이끌던 진군도
따라서 제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6. 偸合取容 以至圽身(투합취용 이지몰신)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헛되이 죽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한 척의 긴 것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촌의 짧은 것도
길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백기는 적군을 대할 때는
마치 귀신과 같아
그 변화는 능수능란하고
기묘한 전략은 무궁무진해서
그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지혜도
응후의 화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육국을 멸해 숙장으로사
진시황에 의해 스승으로 존대받았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좌하여
덕을 쌓아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몸은 헛되이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손자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사리가 마땅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그 두 사람은 각기 부족한 점이 있었다.
사자성어
1) 전필승공필취, 전신백기
(戰必勝攻必取, 戰神白起)
.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라.
싸우면 반드시 이겨 공을 승공필취
(戰必勝攻必取,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음)’의
줄임말이다.
2) 장평대전 갱살항졸
(長平大戰 坑殺降卒)
.장평대전에서 항복한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다.
진소왕 45년 BC 262년,
한나라의 야왕성(野王城)을 공격하자
야왕의 수장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한나라 본국과
상당군이 통하는 길이 끊겼다.
상당의 태수 풍정(馮亭)이
그 백성들과 계책을 의논하며 말했다.
3) 위칭중병 거불수명(僞稱重病 拒不受命)
.중병을 핑계로 왕의 명을 받들지 않다.
그해 9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무안군 백기는
몸에 병이 들었음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진소왕 49년 기원전 258년 정월
왕릉이 한단성을 공격했으나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진나라가 지원군을 더 보내
왕릉을 돕도록 했으나
왕릉은 오히려 군사를 잃고
교위(校尉) 5명을 잃었다.
그때 무안군이 병이 완쾌되었음으로
진소왕은 그를 왕릉 대신
조나라 정벌군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다.
무안군이 진소왕에게 말했다.
한단성은 원래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진나라에 오랫동안 원한을 품어온
제후들이 한단성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가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진나라의 군사들도 절반에 이르도록
그 군사를 잃어
지금 진나라 국내도 텅텅 빈 상태입니다.
진나라는 하천과 산으로 끊긴
먼 길을 행군하여
다른 나라의 국도를 빼앗으려고 한 반면에
조나라는 안에서 내응하고
제후들은 밖에서 우리 진군을 공격하니
진나라 군사는
필시 싸움에서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러나 진왕이 듣지 않고
왕명으로 백기의 출전을 명했으나
백기는 받들지 않았다.
다시 진왕은 상국의 신분인
응후 범수를 자사로 보내
출전을 종용하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사양하며
결코 명을 받들지 않고 이내 칭병했다.
진소왕은 할 수 없이
왕릉을 파면하고
왕흘(王齕)을 대장으로 삼았다.
왕흘은 8-9월에 걸쳐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했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위나라 공자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가
수십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진나라는 많은 군사를 잃었다.
무안군이 듣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진소왕이 듣고 대노하여
강제로 무안군으로 하여금
왕명을 받들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계속 자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응후 범수가 몸소 찾아가 청했지만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소왕은
무안군의 작호를 면하여
사졸의 대오에 넣은 후에
음밀(陰密)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살도록 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난 무안군은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기를 3개월이 지났을 때
제후들의 군사들이
진군을 매우 세차게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은
여러 차례 퇴각을 거듭하며
사자를 매일 보내왔다.
4) 두우위륙(杜郵爲戮)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되다.
진왕이 다시 사람을 보내
백기를 음밀로 떠나라고 재촉하자
벽기는 결국 함양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무안군이 아픈 몸임에도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함양의 서문을 나와
10리 되는 두우(杜郵)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진소왕은 응후 범수와
신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유배지로 가는 백기가
앙앙불락하면서
많은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진소왕이 듣고
사자에게 검을 주어 보내
백기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무안군이 그 검을 받아들고
한탄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죽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했다.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몸이다.
장평에서의 싸움에서
조나라의 항졸 40여 만 명을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으니
그 죄값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을 마친 무안군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때가 진소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의 일이었다.
백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불쌍하게 여긴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5) 투합취용 이지몰신(偸合取容 以至圽身)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헛되이 죽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한 척의 긴 것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촌의 짧은 것도 길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백기는 적군을 대할 때는
마치 귀신과 같아 그 변화는 능수능란하고
기묘한 전략은 무궁무진해서 그
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지혜도
응후의 화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육국을 멸해 숙장으로서
진시황에 의해 스승으로 존대받았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좌하여
덕을 쌓아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몸은 헛되이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손자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사리가 마땅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그 두 사람은 각기 부족한 점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