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을 마신다. 비가 내리는 여행길에서 진하게 스며드는 차향은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을 이완시켜 준다.
키가 큰 유칼립투스(Eucalypyus) 나무에서 채취한 차 잎이다. 우리나라 녹차 잎처럼 부드럽지 않고 억세다. 유칼립투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산야에 숲을 이루며 자생하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나무다. 화마에도 결코 전소하는 법이 없고 절체절명의 순간까지도 스스로 제 목숨을 지켜낸다.
숲의 지평선을 이루어 놓은 블루마운틴, 빽빽한 숲은 오랜 명상에 잠겨 있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득하여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산 능선 자락에는 몸통이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죽은 듯이 서 있다. 박식한 여행 길라잡이 설명에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나무가 지녔다는 알콜 성분 때문이다.
알콜, 즉 술의 성분은 나를 늘 긴장하게 만들었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댁 식구들의 대 잇는 술과의 갈등을 결혼 초기부터 겪으며 살아왔다. 치유할 수 없는 억눌린 가슴에 '술'이라는 말조차도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술꾼들은 술만 찾고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 나는 차만 눈에 띄는 걸까. 여행 상품을 팔고 있는 가게 한쪽에 훤칠한 남자 점원이 유칼립투스 차를 우려내고 있다. 차탁에는 여러 종류의 차가 있지만, 부종에 좋다기에 덥석 또 한 봉지를 샀다. 나에게는 술이 아닌 뜨거운 차 한 잔이 언제나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억센 잎을 잘라 차로 우려낸 향이 입안에 고인다. 몇 번씩 우려내도 향이 오래 남는다는 설명이다. 온몸에 알콜 성분으로 가득 차 있는 나무, 불길 속에서도 제 목숨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어쩌면 붉은 눈물을 뚝뚝 흘렸으리라.
차 한 잔을 마시며 나는 무엇으로 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척박한 환경에 뿌리내려 숲을 이룬 유칼립투스의 일생을 더듬어 본다.
낯선 여행길에서는 내 안에 자리 잡은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평소 눈에 익었던 나무와는 몸집이며 펼쳐진 잎사귀의 크기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고사리나무다. 봄이면 작은 대바구니에 꺾어 담던 고사리가 나보다도 몇 배 덩치가 크다. 고사리나무를 바라보니 아연해진다. 고사리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어 두드리면 퉁퉁 북을 두드리듯 공명 소리가 난다. 그 나무를 베어 집을 짓는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많이 자생한다고 한다. 산불이 잦고 비가 자주 내리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수분을 채우거나 비상시 제 몸을 보존하기 위해 몸속의 관류에 물주머니를 채워 둔다. 몸에 지닌 알콜 성분은 강한 햇빛과 세차게 부는 바람의 마찰에 스스로 불이 붙는다. 숲 언저리에 새까맣게 그을려 타다 남은 나무들이 화마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서 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흔들 마치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운명의 나무이다. 3년마다 껍질을 벗는 나무, 소신공양을 하듯 스스로 제 남루한 옷을 벗는 것일까.
이역만리 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힘겨운 이민의 역사를 말해주며 뿌리내린 어느 수필가는 "오직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뜨겁게 살고 있다"며 우리 일행을 전송하였다. 눈시울을 붉히게 하던 그들의 강인한 모습이 왠지 소중한 제 목숨의 뿌리를 지켜내는 유칼립투스 나무와 닮은 듯하다.
은근하게 우려낸 차 한 잔이 마르지 않는 그리움이 되어 내 가슴을 데워 준다.
(김영미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