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투표를 마치고 날씨가 너무 화창해 집에 있기가 싫었다. 공짜로 생긴 돈은 써야지 그러지 않으면 똥이 되든지 잃어 버리게 된다는 어릴 적 옆집 형에게 속아 주운 돈을 둘이서 다 썼던 것처럼 공짜로 얻은 쉬는 날이니 집에 있으면 잠이나 자든지 아니면 몸에 쥐가 날 것이다. 아예 투표를 하러 나오면서 간단히 백팩을 메고 나왔다.
딱히 갈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무조건 집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어리둥절한 애니는 어디가는지 궁금하겠지만 예전에 늘 그랬듯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눈치이다. 근래에 그 버릇 고친듯 하더니 다시 도진듯 시골쪽으로 달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가다가 돌아오기 어려우면 하루 쉬었다가도 집은 잘 찾아왔으니까.
시골 길 곳곳에 일찍 핀 목련들은 누렇게 늙은 태를 보여서 사반처럼 보기가 싫었지만 꽃진 개나리는 벌써 푸른 새 잎들이 돋아 길가가 제법 푸릇푸릇했다. 바람에 날려 어제 만개한 듯 하던 벚꽃들은 벌써 꽃비가 되어 애니의 바람에 길을 열어준다. 눈이 피곤하지 않아서 좋다. 꽃에 한눈 팔려 어디까지 왔나 보니 벌써 한산 모시타운이다. 잠깐 쉬다가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 길을 정했다. 그쪽은 부여이고 더 가면 청양이다. 좋다. 부여다. 이제 정해졌다.
부여로 길을 잡고 쉬엄쉬엄 가다보니 예전의 어떤 여인네가 생각이 났다. 부여에서 청양가는 길목에 식당겸 작은 점방(구멍가게)을 하던 여인네였다. 내 또래쯤의 아낙이 길 가는 여행객들에게 밥과 술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하는 곳이었다. 나도 그날의 점심손님이었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하고 잊지않는 것은 그날의 반찬이었다. 구기자잎 무침과 깨죽나무잎 무침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그 나물의 맛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그맛을 잊지않고 있다. 상차림을 하면서 구기자잎 나물과 깨죽나무잎 나물을 먹을 줄 아느냐고 물어보던 아낙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나물이라고 했더니 어떻게 시내에 살면서 그맛을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구기자 나뭇잎 나물과 깨죽나뭇잎 나물은 둘다 약간 특이한 향들이 있다. 나는 그 향이 좋은데 많은 사람들은 그 향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맛은 마치 고량주의 첫 잔을 따라 마실 때의 특이한 비릿한 향같은 것이다.
할머니는 울타리 가에있는 구기자가 봄에 새잎을 내면 부드럽고 깔끔한 잎을 따서 삶아 나물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이때쯤 탱자울타리 가에 있는 깨죽나무 연한 잎을 장대로 따서 삶아 나물을 무쳐주셨다. 가죽나무라고도 하는 가죽냄새같은 향이 나는 이 나무는 나뭇결도 곱고 향이 진하다. 할머니댁 울타리에는 세그루의 깨죽나무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한 접시의 나물을 비우니 아낙은 나물들을 더 내어와서 오랜만에 그 맛에 호강했었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며 종이 컵에 타 주는 커피를 마시던 중 아낙은 내게 딸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스개로 있다고 했더니 자기 외동아들이 결혼을 못해 걱정이라며 중매를 서라신다. 참, 할머니같은 엄마시다. 나는 사실을 말하며 내 색시 중매서시면 나도 아들 중매서겠다며 웃었던 것이다. 그 식당이 궁금했다.
그 식당은 지금도 있었다. 이제 구멍 가게를 접고 기사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혹시 주인이 바뀌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점심도 먹을겸 들어섰더니 중년의 부부가 손님을 맞았다. 식사를 주문하고 남자에게 지난 얘기를 잠깐했더니 자기 어머니시란다. 그러더니 방에 계신다며 모시고 나오는데 그 아낙이 맞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 내외에게 식당으로 바꾸어 주고 자기는 일손에서 은퇴했단다. 많이 늙어 있었다. 그래도 나를 기억하며 나도 많이 늙었단다. ㅎㅎ 자기는 관절염으로 무릎 수술을 하고 며느리는 베트남댁을 맞이하여 손주가 둘이란다. 이제 소원풀이를 했고 먼저 간 서방님을 만나도 당당하게 할 말이 있어서 좋단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를 두었냐고 묻는다! ㅎㅎ 베트남 댁들도 착하다며. 그때의 나물이야기를 하였더니 자기도 기억이 난다며 지금은 무쳐놓으면 거져 버리게 되어서 만들지 않는다며.,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한테 따오라고 할테니 먹고 갈 시간이 되느냐고 묻는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청양으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이렇게 길에는 아직도 사람의 냄새가 난다. 늘 사람같지 않은 짐승의 노린내만 나는 짐승들만 우글거리는 것만은 아니다. 아침에 투표소에 갔을 때의 답답하던 가슴이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니 길가 떨어지는 꽃잎들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