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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指喻指之非指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以(이) : 으로써 가지다.
指(지) : 손가락. 가르키다.
喻(유) : 설명하다. 비유하다.
不若以非指
손가락 아닌 것으로써
喻指之非指也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고
之(지) : 이. 가. 주격 어조사.
以馬
말(馬)을 가지고
喻馬之非馬
말(馬)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不若以非馬
말(馬)이 아닌 것으로써
喻馬之非馬也。
말(馬)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천지(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만물(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可乎可
자신에게
옳은 것만 옳다하고
不可乎不可。
자신에게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道行之而成
길은 걸어다녀서
그 길이 이루어지고
之(지) : 대명사. 그것. 이것.
物謂之而然。
만물(物)은 그것(物)들에
명칭을 붙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謂(위) : 이르다. 이름, 명칭.
惡乎然?
어찌하여 그러한가?
然於然。
그렇게 하는(관습) 데서
그러한 것이다.
惡乎不然?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不然於不然。
그렇지 않다고 하는(관습) 데서
그렇지 않은 것이다.
物固有所然
만물(物)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物固有所可。
모든 만물은 진실로
가(可: 옳음)한 바가 있다.
無物不然
어떤 만물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으며
無物不可。
어떤 만물이든
불가(不可)함이 없다.
不可 : 옳지 않다.
故
그 때문에
為是舉莛與楹
이를 위해서
풀줄기[弱한 것]와 큰기둥[强한 것]
莛(정) : 풀줄기. 楹(영) : 기둥.
厲與西施
문둥이[추한 것]와 서시[美]를 들어서
厲(려) : 엄하다. 문둥병..
西施(서시): 중국 4대 미녀중 하나
恢恑憰怪
온갖 이상한 것들까지
恢(회) : 넓다. 恑(궤) : 변하다. 憰(휼) : 속이다. 怪(괴) : 괴이하다.
道通為一
道는 항시
하나가 되게 통한다.
其分也 成也
그것(道)이 분열하면
상대 物에서 성립되고
其成也 毀也。
그 사물이 성립되면
다시 훼손된다.
凡物無成與毀,
무릇 모든 사물이란
성립과 훼손이 없으면
復通為一。
다시 하나가 되게 통한다.
唯達者知通為一,
오직 통달한 사람만
통하여 하나가 됨을 안다.
為是不用而寓諸庸。
이 때문에 관습을 쓰지 않고
제용(諸庸)에 머무른다.
寓(우) : 머무르다. 가탁하다,
諸庸(제용) : 보편적인 것.
범상(凡常) : 범상은 평범한 일상적인 것. (관습이나 편견) 庸(용) : 쓰다,
庸也者,用也
용(庸)이란 것은 작용(用 : 씀)이고
用也者,通也;
작용(用)이란 것은 통(通)함이며
通也者,得也。
통함(通)이란 것은 얻음(得 : 얻음)이다.
適得而幾矣。
얻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도(道)에 가깝다.
幾(기)는 幾於道의 준 말. 幾(기) : 언저리.
因是已。
시(是)에 말미암을 따름이다.
已(이) : 뿐 한정 어조사.
已而不知其然,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已而(이이)는 而已의 도치 어조사. 뿐, 따름.
謂之道。
道라고 이른다.
勞神明為一
신명(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一이 되게 하고
不知其同也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謂之朝三。
조삼(朝三)이라 이른다.
何謂朝三?
어찌 조삼이라 하는가.
曰
말하자면
狙公賦芧,曰:
저공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였다.
狙(저) : 원숭이. 芧(저) : 도토리. 상수리나무,
「朝三而莫四。」
「아침에는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 주겠다. 」
眾狙皆怒。
원숭이들이 성을 냈다.
曰:
그래서 다시 말했다
「然則朝四而莫三。」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 」
眾狙皆悅。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名實未虧,
하루에 일곱 개라는
명분(名)과 실제(實)가
변화가 없는데도
虧(휴) : 이지러지다. 줄다. 깎이다.
而喜怒為用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亦因是也。
또한 시(是)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是以
이와 같은 까닭으로
聖人和之以是非
성인은 시비(是非)를
조화롭게 영위(營爲)하여
而休乎天鈞
천균에서 쉬어야 한다.
天鈞(천균) : 하늘의 조화. 하늘. 공평.
是之謂兩行。
이것(是)을 일컬어 양행(兩行)이라 한다.
이 글은 앞서 제시된
白馬非馬 堅白同異와 함께
명가학파 논리를 반박하는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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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자처럼생과사를 하나로 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겠습니다
죽음이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 했느니
말쓴대로
두려운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죽는 순간의
고통이 괴로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장자자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이 장례를 어떻게 치렀으면 좋갰느냐 물으니
매장하면
땅강아지가 파먹고
땅우에 매장하면
새들이 파먹은데
그게
문제냐며 초연하게 축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