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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북한군 기습남침
1950년 6월25일 일요일 고요한 새벽 2시 심야에 38선을 돌파한 김일성 군대는 300 여대 의 쏘련제 T-35 탱크와 200 여대의 Yak 형 전투기를 동원 3 면전(육.해.공) 으로 남을 향하여 총고격을 감행 하였다, 해방후 (1945-1950) 5년간 전쟁준비에 몰두한 김일성 공산당 정권은 쏘련수상 스타린과 모택동을 등에 업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을 이르킨것이다.
북위 38도선(248Km) 서해와 동해를 있는 한반도의 허리를 갈라놓은 국경선 아닌 치욕의 38선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38선아 가거라) 우리는 즐겨 부른다. 세계 2차대전 종식을 목전에 두고 (일본국항복) 있을때 독일 베르린 남쪽 조그만 마을 보스담 회담에서(194.7.26) 미국.쏘련.수뇌부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탄생시킨 38선은 우리 역사상 치욕적인 한반도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아직까지 세계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께 되는 비운을 가져온것이다. 억울하고 슬픈일이 아닐수없다.
개성. 송악산 능선을 그은 38선 경계를 방위하고 있든 1개연대의 남한 국방군은 야심에 밀어닥친 인민군 탱크부대에 무참히 깔려 죽었다. 살아남은 국군은 포로가되어 끌려갔다 우물안에 개구리 형편이된 옹진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후퇴 해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휴전 후에도 지금까지 옹진반도는 북한 손아귀에 있다 2010.11.23.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든 옹진 반도연안은 서해 5도와 함께 6.25전 남한 땅이였다.
3년간의 6.25 전쟁을 통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14만명(남한)의 자손 형제,전우가 나라를 수호하다 용감히 싸우다 죽어 갔다는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45만명의 전쟁 부상자, 2만 5천명의 군인 실종자, 그리고 8만9천명의 남한 지식 인사를 북으로 강제로 납치해갔다 1000만명 이상의 남북 이산 가족이 발생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국토는 80%가 초토화 된것이다. 우리의 수도 서울은 인민군과 중공군 에게 2차례에걸쳐 빼았겼다. 3백70만명의 우리 민족의 인명 피해를 갖어다준 참혹한 전쟁 이였다.
김일성 북한 공산당이 저지른 천인 공로할 만행이다. 서울 노량진 언덕 국군 묘지 대전국군묘지에 가보자 수천 수만의 국군 장병이 용감히 싸우다 죽어간 전몰 장병의 무덤이 말없이 서있다. 굳건한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희생의 대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죽어간 그들의 부모와 가족은 아직도 비통에 샇여있다 외아들도 죽었다 또한 3형제가 전부 전쟁터에나가 아직도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있는 부모도 있다. 반세기가 지나고 61년을 맞는 해마다 6월달은 6.25를 기억하고 현충일(6월6일)을 맞는 달이다. 일본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직한 선열들 또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젊은이들의 그 영령을 기리는 보훈의 달 6월은 해마다 찾아온다. 6.25를 기억함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된 마음일것이다.
20.21세기 양 2백년에 걸쳐 살고있는 우리들은 수 많은 변천의 사실을 보아왔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6.25 전쟁은 세계 1차.2차.대전 다음으로 큰 전쟁이였다 는것이 역사에 기록 되어있다.특히 6.25 전쟁은 22개국이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했다, U.N.군 산하 세계 곳곳 에서 16개국의 정규군과 의료 선박을 보내고 전쟁물자를 지원한 6개국이 있다, 그리고 쏘련과, 중공군(중국공산당) 북괴군, 공산 침략자를 맞서 싸운 도합 25개국의 생지옥 전쟁이 극동의 이름도 없는 조그만 나라 코리아에서 치루어졌다.
한국전에서 미군인 전사자만 3만 7천명 부상자가 9만 3천명 포로 ,실종자를 포함한 13만7천 5백명의 인명피해를 본 미국은 절대 공치사를 아니한다. 그 대가로 우리나라에서 갖어간것은 아무것도 없다 뜻을 같이하는 동맹국으로 다짐했을 뿐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된 이후 일단 한반도에서 미군은 철수했었다 찌저지게 가난했든 우리를 도와 식료품. 의류 ,의약품 까지 질병에 시달리든 우리 백성에게 의료기까지 무상원조 로 전달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제1착으로 다시 군대를 남한에 파견하여 전화에 휩싸인 위급속에서 우리 나라를 구해준 미국은 우리의 은인 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1917년 불루조아 쏘련 볼세비키 공산당 붉은 혁명은 왕권과 귀족을 처단 몰아내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에도 가담 하였다 극도로 경제침체속에 빠진 러시아 국민은 배고파 빵을 달라 우유를 달라 노동자.농민들은 백 러시아 완권과 귀족을 몰아내는 노농혁명이 한참 이였다. 백군(귀족)과 적군(노농군)이싸워 성공한 레닌이 단명으로 죽자 스탈린이 등장 공산 화를 발전시켜 주주들의 농토와 땅을 착취 골고루 무상분배하고 집단 농장 체제로 34년간의 공산독재를 유지하다 625 젼쟁이 끝나기 직전 53년 3월 5일 급사하고 말았다.34년간의 공산 독재자는 독일의 나치보다 더한 학살, 처형, 숙청등으로 집단 농장 체제를 반대하는 러시아백성을 3차에걸쳐 군을 동원 북쪽 동토에 몰아 처형 숙청 감행 1000만명 이상의 자국 인민을 학살했다 서방 세계에서 모르는 그들의 역사는 남아있다. 한국전의 원흉 스탈린의 죽엄은 다행한 일이다. 독제자 스탈린은 자기를 태양같이 보기를 백성에게 종려했고 넓은 련땅 가는곳마다 동상,영상, 화상을 걸게하였다 지금 북한의 김일성 3부손이 그것을 배워 똑같은 행도으로서 반세기 이상의 북한 정권이 존속되고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남한 인구의 반도 못미치는 북한 독족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가 를 알수있다.그들을 찬양하는 남쪽 친북 세력들 정신좀 차려야한다 아니면 북에가서 살던지?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한다.
스탈린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든 맥아더장군은 극동에서 3차 전은 없다고 판단 했다.
한반도 통일과 한국전 종식을 목전에두고 중공군 후방로 차단정책 으로 만주폭격을 단행하기
직전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것이다. 겁먹고 바보같은 투루만 대통령(맥장군의말)은 U.N.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을 해임 조치 함으로서 한국의 민주통일은 물거너간것이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 한국은 아직도 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기를 태양과 같이 우러러 보고 숭배하게하고 넓은 쏘련땅 가는곳 마다 스탈린의 동상,초상,화상을 만들게하였다. 김일성이 배운 쇠뇌 교육은 스탈린의 행각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레닌 공산주의 사상이 타당하다면 지구촌 35억 인구와 국가가 공산주의를 추종할것이다, 쏘련 공산당 혁명 체제가 백년도 못가고 1991년 73년만에 종지부를 찍고 지구상에 공산주의 사라지고 말았다. 붉은 바탕에 칼과 망치의 쏘령 국기는 자취를 감추고 왕정 제국이갖었던 백색,하늘색, 연홍색 주름선 국기로 되찾아온것이다.빨간바탕색의 공산당 구기는 사라졌으니 공산당을 추종하든 빨갱이는 더이상 없다는것이다.
61년전 19세청년시(고3)6.25 전쟁의 학도병으로 지원 참전하여 지금 내나이 80이되었다
인민군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도 살아난 나는 행운이다 그때죽어간 전우는 더용감히 싸우고 죽어갔을것이다. 심장 부분이나 머리에 총탄이 박혔다면 10중 8.9 나도 이세상에 없을것이다 육군에서 1년반 공군에서 14년반 도합 16년간의 군생할을 마치고 1966년 9월 공군 영관급 장교로 명예롭게 예편하였다 작전을 공군제 10전투 비행단 [강능비행장k-18]공군최전방기지에서 [1953.7.27]휴전을 맞이 하였다 휴전후에 나는 진해 공군사관학교 를 졸업공군소위로 임관햇다 휴전후 수원비행장으로 이동후 주한미공군고문단 [6146]부대에서 발탁미국유학길에 올랐다 [1956년]항공기 항법 전자학 기술교육을 받고 또 미공군대학 자매학교인 Ohaio주립대학원에서 18개월간 군사학을 연구 했다 한국전 경험이 있던 나는 U.N군이 한국전에서 후퇴 작전을 일삼았던 미지상군의 작전을 실란하게 비판하는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때 부족한 나의 영어 실력으로 고심끝에 논문을 썼다 내가 귀국한 2년후에 우리 공군본부에 Ohaio주립대학에서 주는 석사 [Master of arts]증서를 받은바 있다 공군에서 나는 영관급 장교로 명예롭게 예편하엿고 [1966.8월]그후 미국 continenta AirLine[La]민간항공회사 에입사 근무를 함으로서 나의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71년]공기좋고 물맑은 이곳canada Montreal에 이주하였다 이곳에 오자마자 즉시 Air-Canada에 근무한 나는 만65세 까지 일하고 은퇴함으로서 만45년간의 긴 세월을 [AvionicEnginer]로 항공기 분야에서 일했다
예편 하였다.현재 나라에서 칭호한 참전국가 유공자로 대우 받고 죽는날 까지 자부심 속에
통일의 그날만을 기다리고산다.
[제2편] 북한 공군기 서울 공습(중앙청. 경무대)
종로 네거리 보신각앞을 건너 화신쪽으로 열심히 뛰고 있는 두 군인을 보았다 손에는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군복은 땀에 저져 있었다 휴가 외출 전장병 지금 즉마45년간의 시 귀대 복귀 하라 일요일 아침 서울 거리는 한가했지만 그군인들은 밀집 지역 을 찾아 네거리와 명동 충무로 를 달리면서 정신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광경을본 나는즉시 집에(청진동) 돌아와 레듸오스윗치를 틀었다, H.L.K.A. 서울 중앙 방송국 긴급 뉴스 가 연다라 들려온다 신석모 국방부장관의 육성 방송은 떨리는 음성이다 오늘 새벽 북한 괴뢰군이 38선을 돌파 불법 남침을 감행하고 있지만 용감한 우리국방군이 그들을 무찔러 후퇴 시킬것이니 국민과,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 하라는 것이다,방송을 듣고 있던 나는 순간 폭음소리에 놀래 책상 밑으로 기어들었다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보다 더큰 이전에 들어보지못한 괴음이다 중앙청과 청와대를 향하여 북한 공군기들의 기총소사 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 바로 나의 머리위에서 저공으로 날아 공격 하는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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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아있는 글 우리의 체험으로 엮어진 전쟁의 참혹함을 엮은 계속편을 기대합니다. 오랫만입니다 전 선생님 건강하시죠?
6.25의 생생한 체험담을 읽으며 그 날을 다시 새겨 봅니다.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이 어려웠던 시절은 모르고 걸핏하면 미군 철수를
외치는 좌경화 세력들이 많으니 정말 걱정입니다. 감사합니다.
625때 서울에서 3개월을 북한 치하에서 지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전관병님과 같은 분들이 계서 적하 통일을 막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써 주신 글로 생생한 현장을 직접 보는 듯 합니다.
전병관 이아니고 전관병 입니다
중요한 함자에 잘못 표기를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잘못된 곳을 바로 잡아 수정해 드렸습니다.
예전에는 달력에 빨강날이었는데 요즈음은 ~~~.....
해마다 찾아오는 6.25 사변의 날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어도 그 참상은 잘 알고 있지만 직접 겪으신 생생한 전쟁의 기록을 보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전관병님의 참전기를 읽으며 6.25당시의 상황들을 유추 해 봅니다.
외국에서 6.25의 체험담을 이렇게 실감나게 기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선생님은 애국자이십니다.
군자님, 전선생님 건강하시지요?
참전 수기를 한번은 쓰겠다고 마음먹고 잊혀져 가는 6.25의 참상을 후배들에게 늘 전하고 싶어 했는데 ....
작년에 6.25 참전 전우회에서 수기 모집을 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그때쓴글을 다시 보충에서 이렇게 쓰고 있단다
우리 나이[ 내년이면 만80세] 에는 꽤 어려운 일이지만 신나서 쓰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감동하고 조금은 존경스럽다
존경하는 전선생님과 함께하는 군자씨 너무 행복 하겠습니다.
늦복이 터졌나 보다.
서울고등 3학년 때 6.25를 맞아 대구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하신 후, 오로지
철저한 군인정신으로 사셨고, 제대후, 비행기의 불랙박스를 담당하는 정비사로 근무하시면서도
내쳐 군인정신을 잊지 않으셨던 전선생님의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들었든지.방위병이야기는
꼭 더 듣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부패했던 자유당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쳐 날뛰던 격노한
내 피의 소리를 들으며 기회가 닿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들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글은 너무 간략하게 쓰신것 같네요.너무 간략하게 쓰시는 것 아닙니까.
한편의 수기이군요. 되돌아보시면 감회 또한 대단하겟습니다. 잘읽었습니다
한국전에 참가하신 실전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기쁩니다.
그 시절의 생생한 목소리로 후배들에게 들려 주시려는 애국심에 감동하면서 감사하면서
이 글을 올려준 군자님 수고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늦게 인사합니다.^^;;
이렇게 생생한 6.25의 수기를 읽게되어 영광입니다.
하군자 선배님, 연재되는 글 열심히 읽겠습니다.
계향님도 6.25를 기억하나요 그때 우리가 4.5학년이였으니 아마 2.3.학년 정도 였네요
남편글아라도 관심가지고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