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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흑구(韓黑鷗 1909-1979)
1909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세광(世光)이고 흑구는 호이다. 1911년에 아버지가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서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1928년에 서울에 와서 보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1929)에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늘 때 배를 따라오는 갈매구를 보고 호를 흑구로 지었다고 하였다.
1933년에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에서 신문학과를 전공하면서 영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에 귀국하여 ‘백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미국 유학 시절에 홍콩에서 발간한 국내 신문 대한민보와 국내 문예지 ‘동광’에 젊은 시절‘이라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나 본격적인 수필로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었다. 1934년에 미국에서 귀국하였을 때는 평양에서 전영택가 월간지 태평양(太平洋)과 문예지 백광(白光)을 창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9년에는 흥사단 사건으로 1년 간 투옥되었다. 이후에 일제의 압박이 있었으나 친일 문학 활동은 일체 하지 않으므로 친일 문학을 하지 않는 12명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45년에 월남하여 언론사에서 잠시 일하였다. 1948년에 포항으로 내려와서 정착하였다. 포항에서도 수필을 쓰고 시, 평론도 하면서 문예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1958 -74년까지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구에도 간간이 나와서 대학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그는 시를 위시하여 소설, 평론, 수필 등 문학의 네 장르를 모두 섭렵하였다. 젊었을 적에는 시와 소설을 주로 하였다. 수필을 본격적으로 쓴 것은 노후에 접어서 들어서 이다.
해방 이후의 활동을 보면 미국의 문학을 많이 소개하였다. 한국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흑인시도 소개하였다.
1971년에는 대구-경북에서 제일 일찍 수필집 동해산문(東海散文-일직사)을 발간하였다. 1974년에는 인생산문(人生散文-일직사)를 발간하였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쓴 시 40편, 단편소설 14편, 장편소설 1편, 평론 1편을 묶어서 한흑구 문학전집(2009)을 출판하였다. 이해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흑구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의 두 권의 수필집에 실린 글을 보면 순수한 수필집으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말 그대로 산문이고, 칼럼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 많다. 그가 주장하는 수필론도 실려 있다. 아마도 본격적인 수필 글은 권마다 약 10편 쯤이다. 문학전집에 그의 수필은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흑구 문학상을 제정하면서 소개하는 글에는 그가 발표한 수필이 약 200편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비수필적인 산문 글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지만, 내가 확인하지 않아서 확실하게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수필을 단순히 문학의 한 장르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장르를 포괄한다고 하였다. 수필문학이 문학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수필을 장르로 정립시티는데 그의 역할이 크다. 그의 문학론 내지 수필론에 의하면 ‘철학적 이데가 없는 작품으 문학이 아니다.’라고 함으로 그의 수필이 어떤 경향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의 수필은 소재를 대부분 나무, 눈, 진달래 등 자연에 두고 있다. 대표 수필의 제목인 보리 이외에 하늘, 바다, 사랑,노년, 갈매기, 흙 등의 제목을 붙였다. 그는 수필을 시의 작법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시의 우의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의 주장은 초창기의 수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수핋을 너문 딱딱하고, 엄숙하게 흘러가게 한 면도 있다.
그는 원칙적으로 포항에서 할동한 문인이다. 대구의 활동 자료가 영남수필지에 남아 있다. 창간호(69년 11월 25일 발행)에 제비와 책, 두 편을 발표하였다. 이후로 그가 작고한 79년까지 (11집)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매호마다 2-3편이 발표하였으므로 작품수가 17편이나 된다. 74년 인생산문을 발간한 이후에 영남문학지를 통하여 많은 수필을 발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작품들이 어떤 성향의 작품인지는 분석해보지 않아서 말할 수 없다.
보리.
한흑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차가움이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보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고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매미들도 다 제 집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속새풀 더미가 갈대꽃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 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솔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에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공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한다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老木을 우러러보며
나는 오늘 보경사(寶鏡寺) 앞 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 노목 하나를 쳐다본다.
오백 년이나 넘어 살았다는 이 노목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모르는 듯이 상하좌우로 확 퍼져 올라섰다. 그러나, 지금 이 노목은 검푸른 그늘을 새파란 잔디 위에 드리우고 있지만, 그 다섯 세기의 길고 오랜 세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넓은 허공에 조그마한 한 점의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스럽기도 하다.
한때, 큰 번개에 맞아서 찢어졌다는 큰 가지 하나가 떨어져 나간 부분에는 크고 기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늙은 나무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아래위로 뚫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도 큰 구렁이들이 얼마든지 드나들기에 충분하다.
구렁이들이 살지 않는다면, 달밤마다 꿀밤을 주워먹는 다람쥐들이 몇 가족이라도 숨어서 살 수 있을 만하다.
달 밝은, 고요한 가을밤에 한 가락 실바람이 불어오면, 저 노목은 콧구멍도 입구멍도 아닌 저 큰 구멍으로 한 가락 신비로운 소리로 슬픈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나무는 늙어도 재목으로 쓰이지만, 사람은 늙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이러한 말을 나는 들었다.
그러나 베이컨(Bacon)은 늙은 것, 오래 된 것을 좋다고 주장하였다.
Old wood best to burn, old wine to drink, old friends to trust, and old authors to read.
(고목은 불을 때기에 좋고, 오래 묵은 술은 마시기에 좋고, 오랜 친구는 믿을 수 있고, 노련한 작가는 읽을 만하다.)
이 말의 참뜻은, 시간의 흐름에서 오래도록 늙고 낡아진 것을 뜻함이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을 시련과 곤고(困苦)에서 이겨나서 숙달되고, 노련해진 것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나는 묵묵히 앉아서 이 구멍이 뚫어지고, 가지들이 땅으로 쳐져서 한편으로 쓰러질 듯이 기우뚱한 큰 노목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본다.
구부러진 가는 가지마다가 얼마나 많은 비바람에 휘갈김을 견디어냈으며 얼마나 많은 찬 서리에 굵은 가지들이 울룩불룩한 가죽과 같은 껍데기로써 씌워졌을까.
어린 나무에게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 거칠고, 꽉꽉한 껍데기들은 이 늙은 나무의 괴로움과 슬픔의 정(情)이 솟구쳐 나와서 말라붙은 흔적이나 허물이 아닌지.
이러한 상념에 잠겨서, 나는 이 늙은 나무의 모양을 우러러보면서, 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만히 더듬어 보기도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무를 좋아했다.
오월이면 꿀 냄새가 풍기는 아카시아꽃들을 따서 먹기를 좋아했다. 유월이면 꽃이 피는 밤나무 그늘 아래서 안서(岸曙)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주요한의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몇 번이고 줄줄 외기도 했다.
버드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의 이름 석 자를 칼로 새겨놓고, 그것이 해마다 나무와 함께 커가는 것을 보면서 기특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고향에 돌아가면 그 버드나무가 살아있을까, 육십이 넘은 오늘까지도 가끔 생각해 본다.
나무는 오랫동안 산다.
우리 나라에도 천 년이 넘은 노목거수(老木巨樹)가 있지만, 미국의 서북부에는 오천년이 넘는 노목이 많다는 것이 나무의 나이테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나무는 한곳에 가만히 서서도 오랜 세월을 살지만, 사람은 이곳저곳 떠다니면서 별별것을 다 찾아먹으면서도 백 년을 살기가 힘이 든다.
사람도 육십이 넘으면, 노목의 껍데기마냥 피부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손잔등은 거칠어지고, 검은 티들이 덮이고, 얼굴엔 검은 주근깨들과 검버섯들이 돋고, 어깨와 잔등에도 많은 주근깨와 반점이 덮인다.
그뿐인가. 폐를 앓았던 나의 허파에는 구멍이 뚫어졌던 곳도 있을 것이고, 지독한 파스와 아이나의 복용으로 위장은 헐고 나른해졌을 것이다.
저 노목은 그의 구멍 속으로 다람쥐들이 드나들어도 끄떡 없고, 소슬바람에는 신비스러운 음악 소리를 내고, 해가 쪼이는 뙤약볕에서는 서늘한 그늘을 덮어줄 수도 있지만 사람은 늙어서도 왜 그러한 신비력을 가질 수 있게 태어나지 못하였을까.
이제, 나의 몸 속에서 이름도 모를, 눈에도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나의 오장육부를 쑤시어 먹는 날에는, 나는 저 노목과 같이, 푸른 잎도, 가지도, 꽃도, 열매도 맺어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저 노목을 우러러본다.
시간의 흐름을 탓하고, 운명의 슬픔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는 저 노목이 아무 말도 없이 높이 서있으면서, 다만, 그늘만을 잔디 위에 덮어주는 하나의 사명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죽고 저 노목도 언젠가는 다 죽어야 한다.
그러나 저 노목은 다 썩어서 구멍이 뚫리고, 다람쥐가 드나들어도, 그냥 속임수 하나도 없이 서늘한 그늘만 드리우는 사명 하나만을 갖고서도 저렇게 오래 살 수가 있다.
나는 일종의 외경심(畏敬心)마저 느껴본다.
첫댓글 한흑구와 안익태는 죽마고우였다. 나이는 안익태가 세 살이 더 많고, 중학교에서도 선배였으나,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 한흑구가 먼저 미국 필라델피아에 가서 백화점에서 일을 하면서 고학하고 있었는데, 4년 뒤에 안익태가 미국 오하이오로 공부하러 갔다. 그 뒤 안익태가 사정이 어려워서 한흑구를 찾아가자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한편 학교 입학에 따른 어려움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비좁은 하숙방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해결해 나갔다. 그같은 어려움을 견디며 안익태는 뉴욕의 콩클에서 첼리스트로 데뷰하였고, 두 사람의 우정은 참으로 뜨겁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