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완벽하지 않기에 실수와 실패가 존재한다.
그간의 선택과 결정이 완벽했다면 왜 그토록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겠는가.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기에 잘못된 선택도 하고, 계속 넘어지며 실패를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리,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대표적 인물이 다윗이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적혀 있다. 이 시는 사무엘상 21장 10-15절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사울을 두려워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신앙과 사명의 자리를 저버리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했다. 인생 문제의 해결책이 거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곳으로 피신하면 편안하고 안정적일 것 같았으나, 이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세상적 방법이자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존귀한 자가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시편 34편은 이 사건 후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쫓겨나와서 지은 감사의 시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 시 34:19
다윗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시 34:19)라고 고백함으로써, 내 인생의 답이며 나를 고난에서 건져주실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선포했다.
회개와 돌이킴은 소망이다.
고난과 시련, 환난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시련 중에 돌이키지 않고 회개가 없는 것이 절망이다. 다윗은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나 그와 반대로 곤고할 때 범죄하여 멸망을 자초한 사람도 있다.
역대하 28장에서 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이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셨다. 그런데도 그 후로 계속 범죄하니 하나님은 유다를 낮추어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을 받게 하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기가 몰아치자, 다급해진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도와줄 줄 알았던 앗수르 왕이 도리어 유다를 공격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 의지했듯 아하스는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 대신 앗수르를 의지했다가 믿었던 앗수르 왕에게 도리어 공격받았다.
성경은 똑같은 구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의지하고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고 발등을 찍힐 때가 많지 않은가.
고난을 만났을 때 다윗처럼 회개하고 돌이켰으면 좋았을 텐데, 아하스는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고 더 큰 죄를 지었다. 자기를 쳤던 다메섹의 신들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제사했고, 결국 아하스와 그의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환난과 시련이 찾아와서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짜 절망은 문제의 크기, 사태의 중함과 다급함이 아니라 그 고난 중에도 돌이키지 않는 것이다. 고난 중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나쁜 것은 그때도 정신 못 차리고 하나님 대신 사람을 의지하며 환경에 기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망 없는 자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페이지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 목적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는 게 아니라 언제나 회복시키는 데 있다. 이는 창조의 순간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실 하나님의 의도이며 계획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겠는가? 그 시간은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으므로 고난 중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 버티고 견디고 살아내라, 안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