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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성성결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윤형원로목사
오네시모 용납을 위한 부탁
몬 1:15-25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몬 1:15-25 / 그대는 이렇게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오네시모가 도망을 쳐 그대 곁을 얼마동안 떠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대가 언제나 그를 데리고 있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16) 그는 이제 더 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훨씬 더 나아진 인간, 특히 내게 있어서 그러합니다만,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가 되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단순히 그대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와 한 형제로 맺어진 귀중한 사람입니다. 17) 만일 그대가 나를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맞듯이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맞아 주시오. 18) 만일 그가 그대에게 어떠한 손해를 끼쳤거나 물건을 훔쳐 낸 것이 있거든 나에게 보상을 청구하시오. 19) 내가 갚겠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약속합니다. 구태여 그대가 내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대가 지금만큼 된 것이나 그대의 영혼이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나의 도움이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20) 사랑하는 형제여, 내 부탁하는 이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어 나의 약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해주시오. 21) 틀림없이 그대는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해줄 것을 믿고 이 편지를 씁니다. 22) 내가 묵을 방도 하나 마련해 주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의 기도에 응답하여 머지 않아 나를 그대에게 보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23) [마지막 인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나와 함께 감옥에 갇힌 에바브라가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24) 나의 동역자인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도 문안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도망친 노예가 아니라 바울의 동역자로 받아 줄 것을 확신하며 부탁합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15-17)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그를 자신에게 하듯이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 그것의 근거로서 빌레몬과 자신의 관계를 재확인합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동역자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역자는 비즈니스 관계나 개인적인 우정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을 전제로 한 믿음의 동지입니다. 오네시모를 염려하고 사랑했던 바울은 자신과 그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하고(18-20)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하였던 바울은 더 나아가 재정관계에도 언급합니다. 즉,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끼친 손해에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네시모가 도망가면서 하지 못한 일 때문에 발생한 손해라는 것입니다. 어떤 손해이던 지간에 바울은 그 손해를 자기 앞으로 계산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감옥에 있으니 갚을 처지가 못 되지만, 빌레몬의 손해를 배려하는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21-25)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을 자신은 묻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빚은 다름 아닌 영생의 빚, 즉 구원의 빚입니다. 그 빚은 물질적인 빚에 비교할 수도 없는 빚입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공치사나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사실들을 상기시킴으로써 빌레몬도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며 주님께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도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와 자매를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이 한 사람 멘토를 만남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직장인이 한 사람 상사를 만남으로 인해 그의 사회생활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한 사람 영적 스승을 만남으로 인해 그의 성화 과정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멘토이며 멘티입니다. 출신 배경, 직업, 심지어 나이와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끌어주며 돌아갈 본향으로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좋은 멘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좋은 멘토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멘티이며, 동시에 누군가를 도와주는 멘토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내가 갚으리라
빌레몬서 1:17-21 / 이영무 목사
빌레몬서는 위대한 사랑의 편지입니다. 빌레몬서의 시작은 편지 형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바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의 동역자 된 빌레몬과 그의 자매 압비아 그리고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의 보내는 개인적인 서신 같지만 여기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편지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빌레몬서에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빌레몬서의 배경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네시모란 노예는 자기의 옛 주인인 빌레몬을 배신하고 그의 재산을 일부 탈취해서 도망간 노예입니다. 그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로마로 왔는데, 거기서 무엇인가 잘못 되서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오네시모의 만남이 바로 그 감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매우 긍정적인 만남이고 기적 같은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오네시모의 마음이 열리고 그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영혼이 변화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오네시모의 마음속에 세상을 향한 미움과 원한이 가득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는 노예로서 억울한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노예로서의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노예가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주인들은 뭐가 팔자가 좋아서 날 때부터 귀족이고 주인이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인가’ 세상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바로 이 오네시모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가로막혔던 미움의 벽이 허물어지고 증오의 장벽이 녹아내려서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변화된다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이 혹시 무엇인지 아십니까? 11절을 읽으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11절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이 어떤 뜻일까요? '유익하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당신과 내게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그가 전에는 우리에게 쓸데없는 자였지만 이제는 쓸데 있는 자가 되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유익한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오네시모는 이름값을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이름은 남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게 자기 이름값인데 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고 무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쓸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후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그런 전설적인 기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변합니다. 아무리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그는 변화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인사합시다. “사랑하면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로 남는 것이지 사랑받으면 사랑하면 우리 인생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여수 순천반란 사건 때 공산당 청년 안재선이란 청년에 의해서 살해를 당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겠습니까 이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국군에 의해 진압되어지고 안재선 청년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구명운동을 했습니다. ‘그를 살려달라고, 내 아들 둘을 죽였지만 나는 그 안재선을 내 양아들로 삼고 내 아들처럼 사랑하고 키우겠다.’ 그래서 안재선이 풀려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가 정말 맏아들처럼 아버지를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런 사랑을 받았고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3달 만에 인민군에 의해 끌려가시던 손양원목사님이 순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례를 치르는데, 이 안재선씨가 맏상주 장남으로서 그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장례 끝나고 찍은 사진의 중앙에 있는 사람이 안재선입니다. 그러니까 손양원목사님을 통해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안재선이라는 공산당청년, 그 살인자의 인생을 변화시킨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경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복음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안재선씨의 아들이 안경선목사인데 그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이 그에게 부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손목사님을 통해 그에게 부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증오와 미움을 가진 공산당 청년으로 살다가 마지막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보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보여주셨다고 우리에게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신분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네시모는 옛 주인 빌레몬에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노예이지만 그 당시에 노예는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개나 짐승처럼 여기던 시대에 그래도 빌레몬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아마 오네시모를 매우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재정적 책임도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을 배신하고 재정의 일부를 가지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 노예는 누구에게 맞아 죽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지막에 오네시모를 용서한 줄로 믿습니다. 아니 용서한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 바울의 편지처럼 그를 종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우리의 사랑받는 형제로 나와 같은 동역자로 맞이하라고 바울은 부탁했고, 빌레몬은 그대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16절, 17절 읽어 보겠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아멘.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제는 오네시모가 너에게 올 때에 그를 종으로 여기지 말고, 노예로 환영하지 말고 우리와 같은 존귀한 형제로 그를 영접해 달라고 그리고 그를 마치 사도 바울 내가 너를 방문하듯이 오네시모를 영접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과 빌레몬은 특별한 관계입니다. 골로새에 살고 있던 이 빌레몬이 에베소에 무엇인가 일이 있어 왔다가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 그리고 골로새에 있는 가정교회 설교자가 된 사람이 이 빌레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에게 정말 은혜를 부어준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한 이기 때문에 그는 사도로서 바울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참으로 동역자로서 바울을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맞이하듯이 오네시모를 맞이해달라고 바울의 부탁을 그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대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까?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받는 형제로, 죄수로서가 아니라 나의 동역자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곳마다 신분이 철폐되고 모두가 똑같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당신 혹시 차별하지 않으십니까?" 시작 “당신 혹시 차별하지 않으십니까?” 고향사람이라고 좀 더 가까이 하고 뭐, 좀 이렇게 안다고 좀 더...... 그런데 오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누구도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습니다. 종이 아니라 그를 형제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다.
여러분 우리 역사 속에도 이런 아름다운 일이 있지 않습니까? 1905년 미국의 한 선교사가 전북 김제의 조그만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조덕삼이란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주 그 마을에 최고의 부자이고 유지이고 양반중의 양반입니다. 그가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열심히 전도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있는 하인들을 다 데리고 예배드리러갑니다. 예전에는 한집 식구가 많잖아요. 더구나 하인이 한 두세 명 있으면 뭐 그 가족이 대단하지요. 그러니까 그 금산이라는 마을에 금산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교회를 세울 때도, 저기 나오는데 아주 오래된 교회죠. 역사 문화재로 지정된 교회데 저 교회를 건축할 때에도, 자기 많은 땅을 내어놓고 또 많은 헌금을 드려서 거의 교회를 다 짓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이제 교회가 부흥이 되서 이제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 조덕삼씨도 집사가 되었어요. 조덕삼 집사, 그 마을에 최고의 부자요. 유지이고 양반인 조덕삼 집사가 후보예요. 그리고 또 한사람의 후보가 있었는데 조덕삼 집사,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이자익 집사가 있어요. 이 사람은 원래 경상도 출신인데 너무 흉년이 들어가지고 먹을 게 없으니까 이리저리 흘러서 일하다가 보니까 전북 김제까지 왔어요. 그리고 어느 양반집에 하인이 되가지고 마부란 이름을 가지고 그 집을 섬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인을 따라서 교회에 나왔다가 거듭난 인생이 되었고, 그 교회 집사가 되었어요. 이거 참 재미있죠? 주인 조덕삼 집사, 그리고 그 집의 하인 이자익 집사가 두 사람이 후보에 그리고 놓고 기도하고 투표를 했어요. 누가 장로가 되었을까요? 당연히 양반 주인이 되어야지.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어요. 이자익 집사, 하인이, 그 집의 하인이 장로가 선출됐어요. 교인들은 큰일 났구나 이거, 교회가 뒤집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덕삼 집사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일어나 발언권을 얻더니 “정말 여러분은 오늘 훌륭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제가 봐도 이자익 집사님은 장로 감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정말 투표하셨고 좋은 장로를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취임한 다음에 조덕삼 집사는 그를 장로로 아주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자기 집 하인인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듣고 그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깁니다. 그리고 이자익 이 장로님이 너무 훌륭해요. 그러니까 자기 사비를 들여서 평양신학교에 보내서 목사 안수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 하인인 이자익 장로를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합니다.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아래입니다. 그리고 조덕삼 집사님도 장로가 되어서 자기 집 하인이었던 이자익 목사를 자기교회 담임목사로 섬깁니다. 그리고 그는 장로로서 충성을 다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여러분. 그래서 금산교회는 많은 목사님들이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금산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조덕삼 장로님과 이자익 목사님 같은 위대한 분들이 계셔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질 때 자기 집 하인도 장로님으로 그리고 담임목사님으로 모셔서 함께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종이었지만 빌레몬은 그를 종으로 여기지 않고 같은 동역자로 그를 받아들입니다. 조덕삼 집사님은 자기 집 하인이었던 이자익 집사를 자기 교회 장로로, 담임목사로 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안에서 신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를 들어 우리교회에서 삼십년 동안 섬기신 분이나 엊그저께 우리교회 등록한 분이나 육 개월도 안 된 분이나 우린 동일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저분은 우리 영신교회에서 이십년 되었으니 내가 좀 더 잘해주어야지 저분은 엊그제 왔는데 나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분이 그렇게 인간적인 차별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로타리클럽에서 이십년 섬긴 사람이 귀하지 까짖꺼 엊그제 온 신입회원이야 별 것도 아니지. 교회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분은 어제 오신 분이든 삼십년 전에 오신 분이든 똑 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대우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신분을 초월해서 똑같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되어 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아주 엄청난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혹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인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혹은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물질적인 손실을 끼친 빚이 있거든 내가 다 대신 갚아주겠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러분 오네시모가 무슨 구제 많이 하느라고 선교 많이 하느라고 혹시 빚을 졌으면 그 빚을 갚아줘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만약에 오네시모가 도박에 탕진해버리고 많은 돈을 낭비했다면 그 빚을 갚아준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여러분도 가정에서 혹시 동생의 빚을 갚아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부모로서 자식이 사업하다가 어려움 당하니까 그 빚을 대신 갚아준 적 있습니까?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자식이니까, 형제니까. 그러나 만약 자식이 도박하다가 도박 빚을 갚아준다면 그것은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내가 그 모든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18절, 1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아멘. 내가 갚으려니와, 내가 갚아주겠다. 더구나 바울은 친필로 서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가 직접 글을 썻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공적인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즘 은행에 가면 은행직원이 다 타자 치고 나서 “여기 서명만, 도장만 찍으세요.” 이렇게 안합니다. 꼭 보면 당신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를 직접 쓰라고 그럽니다. 그게 바로 서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쓴 것은 뒤집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친필로 내가 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끼친 모든 빚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다. 그러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빌레몬 당신이 내게 진 빚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겠다.” 물론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영적인 빚이에요. 바울을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까 영적인 은혜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 빌레몬에게 지고 있는 빚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빚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질적인 빚입니다. 그 물질적인 빚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냥 말로만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바울이 너무 심각한 것이 아닌가? 빌레몬에게 관계가 있으니까 오네시모를 받아주고 용서해달라고 말로 하면 되는 것이지 오네시모의 빚까지 갚아주겠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닌가? 조금 무모한 일이 아닌가?’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석가들도 여기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오네시모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공언하는가? 사실 바울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골로새를 방문하지 못하고 감옥에서 사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석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에 보니까 샛집에 2년 동안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연금 상태로 그가 월세 집에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월세를 낼 정도였으면 아마 바울에게 작지않은 선교기금이 있을 것이다. 그 일부를 가지고 빚을 갚아주겠다고 바울이 약속하지 않았겠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마음속에 역사하셨습니다. “바울아 네가 오네시모의 빚을 네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빌레몬에게 약속하라. 바울 네가 받지 못함은 내가 직접 갚아 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공적으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한 사랑의 대가, 사랑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 할 때 누가 생각납니까?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죄의 빚을 누가 갚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갚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빚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의 빚을 갚지 못하면 우리는 마귀의 노예가 되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셔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속죄를 치루다, 혹은 대속의 제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신 우리의 죄의 빚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갚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동반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합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불신 청년들의 결혼이 때로는 오래가지 못하고 파혼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입으로만 사랑했지, 사랑의 희생을 마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는 사랑했는데 내 배우자가 병들고 나니까 더 이상 사랑할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혼하자, 내가 왜 이런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의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세상에서 기독교가 참 훌륭한 일을 많이 하지만 때로는 왜 일부 기독교인들 때문에 세상에 비난받습니까? 손가락질 받습니까? 사랑의 행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로만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 말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랑입니다. 얄팍한 사랑이고 이중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랑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요한1서 3장 18절 말씀 자막에서 한번 읽어볼까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아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자. 더 이상....... 행함과 진실함으로, 우리 행동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마저 내 가족마저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좀 죄송한 얘기지만 어떤 분이 그런 간증을 했어요. 자긴 어릴 때 어머니 따라서 교회를 나갔대요. 어머니가 교회 권사님이예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렇게 꿀을, 벌을 쳐가지고 꿀을 생산해가지고 이제 그걸 각 교회에 파는 거예요. 그러니까 권사님이 만든다 그러니까 뭐 여기저기서 목사님들이 “아 그 꿀 믿을 만하겠다. 장로님들도 그 꿀 한 병 주시오.” 해서 그 꿀이 잘 팔렸데요. 아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가만히 보니까 방에다가 설탕포대를 갖다놓고 그걸 섞어서 휘젓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 그 꿀에다가 설탕 섞으면 안 되잖아요”그랬더니 “야 이놈아 너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라. 어떻게 꿀만 팔아가지고 어떻게 사냐? 설탕도 좀 섞어야지.” 그래서 설탕을 열심히 섞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때 자기는 교회에 안 나가기로 결심을 했대요. ‘우리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난 믿지 않겠다.’ 세상에 교회 권사님이 자기를 믿어 주어서 다 여기서 교회에서 몇 십 개씩 주문해서 장로님, 목사님들이 다 꿀을 사 갔는데 글쎄 거기다 설탕을 섞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말과 혀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행함과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 집사님이라고 누가 믿습니까? 장로님이라고 그러면 누가 믿어줍니까? 아니, 목사라고 그러면 믿어줍니까? 참 너무 부끄럽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얘기 잘 못합니다. 그냥 가만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이었기 때문에 말로만하는 입바른 사랑이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요구 됩니다.
언젠가 한번 TV에 소개된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백세가 넘은 할머니가 70세 넘은 딸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분은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그러니까 아이를 돌볼 수가 없어서 유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합니다. 그런데 유모가 아이를 들고 어떻게 좀 다른데 신경 쓰다가 애를 땅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런데 애가 뇌가 손상되고 목이 부러졌어요. 반신불구가 되버렸어요. 그 아이는 평생 동안 반신불구로 살았어요. 그걸 보다 못한 남편이 난 당신하고 못살겠다고 이혼하고 도망가버렸어요.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일생동안 그 딸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예요. 나이가 100세가 넘은 어머니가 70세 넘은 딸을 위해서 오늘도 간호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희생 아닙니까? 이것이 사랑의 대가가 아닙니까? 여러분 사랑한다는 건 말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희생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건 거짓된 사랑 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이제 세상은 거기에 속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말만 잘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마리아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철천지원수입니다. 원래는 같은 이스라엘의 민족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유대인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보다 더 멸시하고 더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강도를 만났습니까? 유대인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를 만나 쓰려져 있는 유대인에게 같은 유대인이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철천지인 원수된 사마리아인은 발을 멈춥니다. 그리고 가서 그의 상처를 싸매어주고 기름을 내서 치료해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서 주막(오늘날 병원)에 데려다 주고 약값을 지불하고 “내가 한달 후에 돌아올 텐데, 그때까지의 모든 치료비를 내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원수로 여기는 유대인까지 사랑했고 그를 위해 엄청난 물질적인 손실을 감수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 아닙니까 말로만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내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의로 사랑합니다. 내가 좀 사랑하고 봉사하면 다 소문내고 ‘내가 이렇게 내가 누구를 사랑했다. 내가 무엇을 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의 사랑, 자기 자랑의 사랑, 자기의 업적에 불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그래서 그 사랑은 인생을 변화시키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에 불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를 존중히 여기고 신분의 차별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사랑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갚을 것이다. 내가 책임질 것이다. 내가 갚으리라.”
사랑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사랑에는 희생을 동반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대가를 치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도록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리더십
몬 1:17-21 / 김남수 목사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모이고 함께 할 때에 일이 이루워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팀웍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이 한 팀이 되어서 일하고, 함께 뛰고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팀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환상적인 드림팀을 만들어서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면 팀웍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리더십의 기본 원칙을 배워서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1. 칭찬과 격려와 위로와 축복을 아끼지 말라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면 서로 힘이 나고 신이 나서 일을 더 잘하게 됩니다.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서로 손을 잡고 “으쌰” 하면 일이 되고, “영차” 하면 거대한 에너지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칭찬하며 삽시다. 축복하며 삽시다. 위로하며 삽시다. 격려하며 삽시다.
2. 칭찬과 격려를 하면서도 비전을 제시하라
사도 바울은 당시 성도들에게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이고, 갈 길이 어디인지 목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칭찬과 격려를 통해 동기를 부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비전이 없다면 교회는 ‘비료공장’입니다. 그러나 비전이 있으면 ‘비전공장’입니다. 이 땅에 내가 왜 왔으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확실하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에 힘차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겸손하라(humility)
여러 사람이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입장과 장단점이 있고, 성격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입장을 다 내려놓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속이 터지고 마음이 상할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노라” 선포합니다. 쓸개와 내장만 빼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예 몽땅 다 죽어서 장사까지 지내버렸으니까 그 다음은 섭섭한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려운 일이 많으나 나는 죽었고 오직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아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직 자신이 할 일이라고는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들 속의 장점을 보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4. 책임감을 가지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책임감이 강한 리더였습니다. 제일 먼저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동역자들에 대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선생이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네시모까지도 동역자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책임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책임감이란 서로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일을 잘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돌아보아 서로 붙잡아 주는 아름다운 팀웍을 말합니다. 우리들 각자도 전 세계의 224개의 국가 중 적어도 한 나라쯤은 책임지고 맡아서 집중적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부흥회를 잘 끝냈습니다. 며칠 동안 즐겁게 은혜 받고 마지막 날 진돗개 전도법이라고 해서 박병선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도 예수를 믿은지 5년밖에 안 되었는데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간증을 합니다. 왜 진돗개냐고 물었더니 진돗개는 한번 물면 끝까지 놓치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라는 것 역시 책임을 지고 내가 맡았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고 합니다. 금년 들어 우리는 전도의 대상을 생각만 했지 구체화 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앞으로 몇 명을 전도할지 결정을 하고 그 이름을 다 적어서 냈습니다. 앞으로 이 명단을 놓고 기도하면서 열매 맺을 때까지 끈기 있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책임지기 싫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구경만 하면 자연히 비판만 하게 되고, 나중에는 구경꾼이 말썽꾼이 됩니다. 책임 있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도 바울이 교회의 대한 책임을 주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겠다는 그 각오와 책임감 때문에 하나님은 저를 위대하게 쓰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 줄 믿습니다. 동족에 대한 책임감, 동료에 대한 책임감, 동지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대한 책임감을 확실하게 갖고 하나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레몬서에 나타난 제자의 도
이동아 목사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학년 이승영(여·당시 21세)씨는 성수대교 상판과 함께 20여m 아래로 떨어진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생 실습을 위해 강북 초등학교에 버스로 출퇴근한지 닷새만의 일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오열 속에 딸의 유품을 챙기던 어머니 김영순(56)씨는 승영씨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내가 일생동안 하고 싶은 일’이란 구절 밑에 빽빽히 적어놓은 ‘14가지 소원’. ‘장학금을 만든다,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복지마을을 만든다,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맹인(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11개월전 군인이던 남편을 과로사로 잃고 흔들리던 어머니였다. “승영아, 네 소원을 이 애미가 모두 이루어주마.”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죽으면 장기(臟器)를 남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딸 시신이 제대로 수습된 것은 장기 기증을 위한 시한(時限)인 ‘사망후 6시간’을 넘긴 뒤였습니다. 어머니는 대신 고려대 의과대학에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습니다. 딸의 소원을 절반만큼이라도 들 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손에 쥔 보상금 2억5000만원은 전액 교회(남서울교회)에 장학금으로 기부해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장학금을 만든다’는 딸의 소망을 이룬 것입니다 어머니 스스로도 전도사가 돼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봉사자)에 뛰어들었습니다. 그후 10년…그동안 형편이 어려운 신학대학원생 50여명이 승영씨의 목숨과 바꾼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고 직후인 95년 초등학교 때 딸이 쓴 시(詩)를 ‘연기는 하늘로’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 출간했습니다. ‘신앙소설을 쓴다’는 소원도 이렇게 실현됐습니다. 이 때 받은 인세(印稅) 400만원은 김장김치가 돼 장애인 재활시설 4곳에 골고루 전해졌습니다. ‘맹인(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소원 역시 장학회가 조만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보급을 시작하면 이루어집니다. ‘한 명 이상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소원은? 올해 초 결혼한 동생 상엽(29)씨가 “내가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입니다. 상엽씨는 “누나는 인생을 길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10년동안 승영씨가 남긴 14가지 소원 중 실현됐거나 곧 실현될 소원은 대략 7가지. 이를 실천한 어머니 김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딸의 소원 실현을 위해 바치고 교회 근처 연립 8평 원룸에 혼자 살고 있으면서 어머니는 찾아간 기자에게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해 줄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움 따위도 없다. 세상에 사랑이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 딸,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말만 남기고 현관을 닫았습니다. 여기 예수가 그 안에 사는 작은 예수의 본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첫째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생활(4절)
감사는 마치 백신과도 같습니다. 요즈음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어떤 나쁜 바이러스가 찾아오면 병원균에 의해 감염이 되기도 하고 심하면 죽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도 여러 가지 바이러스들이 있는데, 탐욕의 바이러스, 교만의 바이러스, 원망의 바이러스, 염려의 바이러스, 불안의 바이러스들이 있는데, 이런 모든 바이러스들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백신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으면 유행성 질환들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감사의 백신을 맞으면 죄의 독소들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존 하갈이란 분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중 1950년에 자기 아들이 뇌성마비로 쓰러졌습니다. 그는 비록 아들이 뇌성마비로 병석에 누웠으나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아들로 인하여 주께서는 저를 겸손하게 만드셨고 남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처럼 병고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오니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존 하갈 위해 강하게 역사 하시사 세계적인 부흥사로 만드셨습니다.
둘째 때를 얻던지 못얻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10절)
바울은 갇힌자 되어 감옥에서 전도합니다. 아들 오네시모를 전도합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꾼으로 만들고 맙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합니다. 전에는 무익한 자를 유익한자로 변화 받습니다. 예수의 심장으로 거듭나 심복이 되게 합니다. 디모데가 그렇고 빌레몬이 그렇고 오네시모가 그렇습니다.
셋째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울(13-14)
남의 입장을 잘 배려합니다. 감정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고 보니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도둑질하고 도망나온 범법자였습니다. 이친구가 복음으로 거듭나서 바울의 심복이 되어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간증을 듣고보니 빌레몬의 종이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빌립보 교회의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된 것입니다. 이래서 오네시모가 바울의 시중을 들고 함께 주의 일을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오해할 수도 있고 또 빌레몬의 마음을 헤아려 오네시모 편에 오네시모를 보내서 화해하도록 하고 빌레몬의 자의로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도록 자원적으로 자의로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내게 유익한 일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없는 지 살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을 할 때 다른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넷째 범사에 주권을 인정하는 삶(15절)
저가 잡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자라(몬1:16) 도둑놈이 되어 도망자가 되어 잠시 떠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영원히 함께 있게 하는 새로운 관계로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여 그리하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이 자신을 인신매대단에 팔아 넘겨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나 고백한 내용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고 하니님이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하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고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항사 기뻐하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로마 감옥의 옥살이가 없었다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세서 빌레몬서가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같은 도망자가 거듭나지 못할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빌레몬서를 읽고 노예해방을 외쳤는데 감옥이 아니면 빌레몬서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섯째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는 희생적인 삶(18-19)
빌메몬서의 절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레몬에게 이렇게 설득합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만이르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몬1:18-19)
대속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성분입니다. 약한자의 역점을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화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화를 부탁받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대왕의 이마에는 추하기 짝이 없는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대왕의 상처를 그대로 화폭에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왕의 자랑스러움에 손상을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그리지 않는다면 그 초상화는 진실한 것이 되지 못함으로 화가 자신의 신망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화가는 고민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대왕이 이마에 손을 대고 쉬고 있는 모습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보셨습니까? 그의 허물을 가려줄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형상을 봅니다.(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포도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상징 생명주는 영(고전 15:45)을 상징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상처위에 그 분의 영과 새생명을 부어 우리의 깊은 속에 잇는 상처를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오신 목적입니다.
여섯째 약속을 믿고 응답을 준비하는 믿음(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1:22)
바울은 아직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미래를 알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골로세 교회가 기도하고 바울과 디모데가 기도하여 주께서 환경을 열어 석방될 것을 감안하여 처소를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믿고 구하면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으
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6-8)
일곱째 노예제도의 무효화 -평등에 대한 바울의 본
그리스도인들 간의 교제에서 우러 나오는 사랑의 영으로 타락한 인유의 악한 사회적 질서를 저절로 무시할 만큼 즉 제도적으로 노예 해방을 할 필요가 업을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인 본입니다.
골 3:10-11 새사람인 교회안에서 자유인이나 종이나 차별이 없었습니다.
3가지 근거
1) 십자가로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서로 다른 생활방식의 모든 규례들을 폐기하십니다.(엡2:15)
2) 성도는 한세례를 받아 주의 몸으로 한 몸이 되어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었습니다.(갈3:27-28)
3) 새 사람안에는 그리스도가 머리요 만유시오 만유안에 계십니다. (골3:11)
한 죄인을 생명의 말씀으로 낳아 심복으로 간주하고 그의 인간관계를 바로 잡아 주는 뛰어난 본을 모형으로 보여줍니다, 새신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10가지
빌레몬서 1:21 / 박영규 목사
기독교인이라면 꼭 갖추고 이행해야 할 덕목 10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덕을 끼치는 사람이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원 죄 문제와 스스로 지은 자 범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죄는 철저히 회개하고 십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요1:12)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2:38)
2. 성령을 받으셨나요?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있어야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갈5:22-23)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행1:8) 성령의 감화, 감동, 역사,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은사도 받으셔서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성령 받으면 겸손하고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성령을 받지 못한 분은 성령을 체험하시기를 바라며
성령을 받으신 분은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분이 아가페 사랑을 보여주고 실천합니다.
3.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 거듭나야합니다. 거듭남은 새로 남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린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말이 과거와 다릅니다. 행동이 과거와 다릅니다.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말과 행동이 긍정적, 신앙적으로 바뀝니다. 거듭난 사람은 빛을 발하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요3:3-5)
4. 구원의 확신을 가지세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전인구원이며 구원의 완성은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8~10)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구원을 받았습니다.
5. 하나님나라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생명책이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던 [글레멘드]와 동역 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 되었다고 했습니다(빌4:3)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불 못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계20:15)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했습니다(계13:8)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생명책에 기록 된 자들만 들어가게 됩니다(계21:27) 하나님께 범죄 하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출32:33) 예수님께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0: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6.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험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라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10일 후 마가 다락방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을 확신하셔야합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7. 교회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교회건물도 소중하고 [에크레시아]인 성도의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교육과 훈련을 받고 기도드리고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서머나]교회처럼 순교자적인 교회가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게 됩니다.
8. 두 가지 십일조를 드립시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재정의 십일조를 드리는 김 장로님 내외분도 계시지만 은퇴하셔서 수입은 없지만 생활비에서 십일조를 정성껏 드리는 분들도 귀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도 드리시고 시간의 십일조도 드리시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의 십일조라 하면 하루가 24시간이니까 하루에 약 2시간 20-30분정도를 새벽기도, 가정예배, 전도, 성경읽기, 찬송가 부르기 등으로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여러분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9. 가정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드린 아브라함 링컨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고넬료]의 가정처럼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무디] 선생님 가정도 어머니께서 가정예배를 드려 무디 선생님 같이 훌륭한 부흥사를 배출하였습니다. 처음 가정예배를 시작 할 때는 가족이 함께 1-2분 정도 기도로 시작하시다가 점차로 찬송도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읽으시고 차츰 시간을 늘려 나가시면 가족이 신앙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며 가족이 인가귀도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와 축복으로 기독교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사단은 떠나가고 [고넬료]의 가정처럼 천사가 왕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단의 가정예배 서를 가지고 가정예배를 드려보세요 가족이 화목하게 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환질고도 막아주셔서 건강하고 안전하여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10. 교회의 공식 예배에 꼭 참석하세요.
성도의 의무와 기본은 예배입니다. 주일은 당연히 성수하셔야 합니다.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모두 참석하셔야합니다. 새벽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수요일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속회예배(구역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셔야합니다. 헌신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교회 각 기관 단체에 속한 분들은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셔야 각 기관과 단체가 활성화됩니다.
이상 열 가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덕목을 전해드리면서 성경으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1:21)이상 10가지 권면의 말씀대로 저와 여러분들이 실천하시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칠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절하반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