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한다.
그러나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 속에 하느님이 사라지고 자신만이 남게 되어 기고만장하게 된다.
이 때에는 교만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부르심이나
이웃의 부르짖음에 대해 문을 굳게 닫고 있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교만한 마음이다.
<가톨릭 교리서 제5장 고해성사 제4절 죄로 이끄는 것들>에 보면 ‘교만’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로 다가가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이 진로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즉 삼구(三仇, 세 원수)와 죄로 이끄는 칠죄종(七罪宗, 일곱 가지 근원이 되는 죄 )이다.
삼구(三仇)
1) 육신(肉身): 육신 그 자체는 원수가 아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욕정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다.
육신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쾌락적인 것을 원하고 편안함을 찾지만,
영혼은 영구하고 영적이며 충만한 기쁨을 추구한다. 원죄의 결과로 영혼과 육체의 싸움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로마 7, 21)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이기는 훈련, 즉 극기(克己)를 게을리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2) 세속(世俗): 세속 그 자체는 원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릇된 사상과 풍조가 사람을 죄로 이끈다.
세속주의는 종교무용론(宗敎無用論) 혹은 무신론(無神論) 등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세유일 사상은 쾌락주의, 안일주의, 기회주의 등을 낳고,
극기, 희생, 고통을 수반하는 일 앞에서는 가치의 유무를 막론하고 피해버리는 반면에,
명예, 권력, 돈 등을 얻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회[세속]가 건전하면 신자들이 살기 편하고 사회가 타락하면 신자들이 살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인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정화하여 영원한 생명이 마련되어 있음을 증거할 책임이 있다.
3) 악의 세력: 인류역사의 비극적 사실과 그로 인한 고통은 악의 세력이 실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서는 이 악의 세력을 마귀[악마]라고 한다.
“세계 인류역사는 암흑의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악전고투(惡戰苦鬪)로 엮어져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마태 24,13)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전투에 말려든 인간은 선에 충실하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비상한 노력 없이는 자신의 통일(統一)을 획득할 수 없다.”(사목 37)
그러나 역사가 단지 선하신 하느님과 악한 세력간의 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님으로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분이고, 당신의 힘을 분산시키기를 원치 않으신다.
악을 허용하시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께 저항하고 스스로 나쁜 길로 빠지며 악을 쌓는다.
이렇게 쌓인 악의 힘은 인간을 괴롭힌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악에서 더 큰 선을,
즉 쓰라린 시련 속에서 더 큰 인내와 사랑을, 곤경 속에서 빛나는 순교적 삶을 이끌어 내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의 힘에 의지하여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칠죄종(七罪宗)
다음에 열거한 것을 칠죄종이라 한다. 칠죄종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다른 죄를 유발한다.
1) 교만(驕慢 Vainglory): 교만은 자기를 과대평가하여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행위 혹은 태도로서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신다. 교만은 우리를 또 다른 죄로 기울게 한다.
자만(自慢): 자기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겠다고 잘난 체 하는 것.
야심(野心): 부당하게 지위나 명예를 탐하는 것.
교만은 자기 자랑, 과도한 치장, 이유 없는 고집, 말다툼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인색(吝嗇 Avarice): 정당한 이유나 목적 없이 세상 물질에 대한 애착이다. 많은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나쁘다는 것이다. 인색은 가난한 자에 대한 무감각, 부정축재, 사기 등으로 기울기 쉽다.
3) 음욕(淫慾 Luxury): 성적 쾌락을 무질서하게 추구하고 즐기는 것으로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더럽힌다.
호색은 영적 사랑에 불감증을 일으키고 참사랑의 능력을 잃게 하며 하느님을 멀리하게 한다.
4) 분노(憤怒 Anger): 보복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을 없애버리려는 그릇된 욕망이다.
분노는 불평불만, 모욕, 악담, 언성을 높임, 욕설, 폭행, 싸움 등을 초래 한다.
5) 탐욕(貪慾 Gluttony): 음식을 과도하게 탐하는 것으로
이성의 판단이나 윤리적 자유를 상실케 하여 인간의 품위를 하락시킨다.
탐욕은 정신력의 약화, 게으름, 건강상실을 초래한다.
6) 질투(嫉妬 Envy):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으로 마치 그로 말미암아 자기의 가치가 떨어지는 양 싫어하는 것이다. 질투는 비방, 무고, 증오 등을 초래한다.
7) 나태(懶怠 Acedia):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싫어하여 본분상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게으름으로
무기력, 시간낭비, 선행의 기피, 정신산만 등을 초래한다.
교만, 인색, 음욕, 탐욕은 자기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함으로써 생기고, 질투, 분노, 나태는 자기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서 생긴다. 이는 모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애덕(愛德)이 부족한 결과이므로 애덕과 극기의 정신을 기르도록 애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살인강도, 간음, 성추행, 배교(背敎) 등만을 끔찍하고 무서운 죄로 생각하지만, 교만의 죄가 그 모든 죄보다도 더 무섭고 지독한 죄인 줄 잘 모른다. 또 신자들이 무서워하는 죄를 범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교만한 죄는 거침없이 많이 저지르고 산다. 교만한 죄는 주님이 절대로 용서하시거나 사(赦)해주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교만한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그 교만한 죄에 대하여 무딜 대로 무디어서 진정한 뉘우침이나 후회를 하지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살인, 강도, 간음, 성추행, 배교 등의 죄를 지은 자는 비교적 쉽게 또는 신속히 그 죄를 뉘우치고 후회한다. 그래서 통회(痛悔)없는 교만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해도, 통회하는 죄는 용서를 받기에, 용서 못 받는 교만의 죄가 훨씬 무겁고 지겨운 것이다. 그래서 칠죄종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다.
교만이란 대 천사도 마귀로 둔갑시키는 무서운 위력을 갖고 있다. 우리 인류도 죄도 악도 모르고 고통도 슬픔도 병고(病苦)도 더구나 죽음이란 것도 몰랐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교만의 죄를 지은 다음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죄와 악을 짓고, 고통과 슬픔과 걱정을 하고 살다가 죽게 되었다. 잘못 죽으면 지옥까지 간다. 교만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살인 강도의 죄도, 간음하다 붙들려온 간음한 여자의 간음죄도, 한 읍내에 이름난 창녀 막달레나의 더러운 죄도, 당신을 배반한 사도 베드로의 끔찍한 배반죄도, 모든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나 교만한 바리사이인들만은 용서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회 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 독사 같은 족속들아!’하고 저주만 하셨다. 그래서 교만은 살인죄보다도 간음죄보다도 배반죄보다도 더 무서운 죄이며 주님도 용서하시지 않는 끔찍이 무서운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실토하였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 봐 하느님께서는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번번이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고린 12: 7-10)
사업을 잘 하던 한 형제님이 교만에 빠지자 하느님께서 세차게 뒤통수를 때리시는 경험을 한 바 있다고 실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느님보다 자기 아들을 자랑하다가 갑자기 선반 위에 있던 화분이 아들의 등에 떨어져 반신불수가 되었다며 절대로 자식을 자랑하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남을 위해 살면 내 공덕이 되고 나를 위하여 살면 남의 공덕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공덕을 세우되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도록 해야’ 한다.
겸손은 최대의 미덕이고 교만은 최대의 죄악이다.
(2006-01-09)
첫댓글 거사님 감사합니다. 카페가 아주 후끈 후끈 합니다요...건데, 왜 겸손은 최대 미덕이고 교만은 최대 죄악일까요 도대체 겸손과 교만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교만은 하느님도 용서못할 그런 죄악을 초래하는 걸까요 왜 교만이 최고의 죄가 될까요 이런 점에 관해 부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세입니다. 겸손이지요. 그 높은 분이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려고 납작 엎드렸죠. 이런 겸손이 없으면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화해" "육화의 개념"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겸손'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잘난 것도 없는데 자꾸 겸손을 말할까요 잘난 이들이 겸손하는 것이지, 겸손할 것도 없는 이들이 겸손을 말하면 그건 바로 교만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율법과계율을 잘지키는 율법학자나 바리세인들의 그들만의 경건한기도가 다수의죄인? 들을 경멸하는 눈초리...성경곳곳에 예수님께서 나무라시지않습니까?...그런기도가 겸손속에 녹아있다고봅니다 오늘날 열심신자들속안에...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생명을 살리면 선, 생명을 죽이면 악.....^^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탐,진,치가 죄악이 아니며 선도 악도 없음이며...있다면 한송이 큰 꽃 뿐이겠지요 ^^......._()_
그리고 거사님 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을까요 제가 몰라서 드리는 말씀인데, 예수님 또한 하느님 아닙니까 육화로 오신 하느님요 그렇다면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는 예수님과 그 기도를 받는 예수님은 같은 분입니까 다른 분입니까 같은 분이면 얼굴을 땅에 댈 이유가 어딨으며, 그리고 그 분께 기도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만약 다른 분이라면 어찌 예수님이 죽는다고 구원이 오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말씀과 리, 예수님=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 역시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도구 아닙니까 요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제가 답변할상황은 아닐줄암니다만... 예전 비슷한 질문을 영성 지극하신 신부님과 피정 독대 시간에 질의한적이....말씀인즉 인간의머리에선 전혀알수없는 성부성자성신의 신비임으로 예수님은 사람의아들이자 하느님이시에 인간으로 육화하셔서 죄많은인간의죄를 대속코쟈 스스로 짊어지고 그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나 뭐라나... 인간은 그신비를 결코 머리로서 이해할수없는 신성한 믿을교리로 받아들여야한다는.....갈등!!부처님을 따르게됬슴다....과학적,철학적인 이성종교 자비의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에대한 애정과자비는 넘~!! 부족한 승과속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는 중에 부사모를 알게됨 ....보현행원!! 여기다있는걸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자가 성부께 엎드려 절을 하신 겁니다. 아버지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人性을 타고 육화되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시면서 '아버지...' 하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구원론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사님 제가 또 한 말씀 외람되게 드려야겠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이미 하나인데, 거기에 절 받는 아버지, 잘하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아버지고 내가 아들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백보를 양보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에게 절을 해야 하는 존재일까요 아버지가 아들에 절하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하면 큰일나는,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요 왜 가톨릭에서는 이미 위일체를 주장하면서도 그렇게 성부와 성자를 가를까요 만약 그렇게 끝까지 가르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위일체가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요...
그리고 가톨릭의 구원론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르지만, 불교의 구원론은 아주 간단하답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것입지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활구[活句] ... 후고님께서 이 소식을 부디 아시길...마하반야바라밀..._()()()_
믿는데로 이루워질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