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 전쟁]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미라의 저주'서 살아난 까닭
중앙일보 2022. 3. 25
이집트 최고 황금유물 발굴 100주년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사진 Pxfuel 홈페이지]
굳이 고고학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은 안다. 3350년 전 18세 나이로 요절해 역사에서 사라졌던 이 이집트 왕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덕에 투탕카멘 황금마스크는 이집트를 대표하는 유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수없이 약탈당한 이집트 문화재와 달리 투탕카멘 무덤은 영국인이 발굴했지만, 그 유물은 놀랍게도 지금도 이집트에 잘 남아있다. 올해 100주년이 되는 투탕카멘의 발굴 뒤에는 문화재 전쟁의 또 다른 양상이 담겨 있다.
‘왕가의 계곡’ 도굴 피해 안 입어
영국 ‘흙수저’ 고고학자 10년 작업
9살 즉위, 18세 사망 ‘비운의 제왕’
황금관 하나 무게만 100㎏ 넘어
이집트에 남게 된 사연도 기적적
발굴 후원자 유족에 37억원 지급
제사 지내고 남은 쓰레기 구덩이
투탕카멘의 미라가 담긴 관의 모습. 바깥 관과 중간 관, 황금 속관 삼중으로 구성됐다. [사진 디커뮤니케이션]
투탕카멘 못지 않게 명성을 남긴 사람은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874~1939)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일개 연구원에 불과했지만,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발굴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수많은 도굴로 만신창이가 된 ‘왕가의 계곡’에서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은 투탕카멘 무덤의 발견에 인생을 걸고 10년 넘게 모험을 했다. 그 전에 이 지역에 다녀간 미국인 데이비드는 더 이상 남은 무덤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카터는 다른 단서를 주목했다. 투탕카멘의 제사를 지내며 먹고 남은 쓰레기를 넣은 구덩이가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됐다. 카터는 발굴비를 후원해준 카너번 경과 1907년 처음 만났고, 중간에 1차 대전에 참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22년 마지막 발굴 시즌에서 투탕카멘 무덤을 극적으로 찾아냈다.
투탕카멘이 베일에 가려진 건 무덤 입구에 다른 무덤을 짓는 사람들의 오두막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무자비한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무덤 조성 직후에 일부 도굴이 있었지만,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카터는 서두르지 않고 수년간 차근히 매달렸고, 이후 7년여에 걸쳐 발굴을 거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세상을 뒤흔들 발굴 앞에서 그는 지나칠 정도로 침착했고, 그 덕에 투탕카멘 유물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다.
실패한 개혁가 아들의 불행
투탕카멘의 왕좌. 등받이 그림 속 투탕카멘은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쉬고 있고 아내 안케세나멘이 남편의 어깨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다. [사진 디커뮤니케이션]
투탕카멘의 유물은 엄청나다. 시신을 넣은 관은 3중으로 이뤄졌고, 그중 하나는 황금 무게만 100㎏이 넘었다. 반면 투탕카멘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실패한 개혁가인 아케나텐이었다. 아케나텐은 다신교 관행 대신에 유일신 ‘아텐’을 섬기기로 결정하고 수도를 아케타텐(=아마르나)으로 옮겼다. 세력이 비대해진 관료·사제계급을 개혁하기 위한 극단적인 정책이었다.
아케나텐은 위대했다. 외모부터 달랐다. 거인 같은 키에 손가락이 지나치게 길었고 얼굴은 길쭉했다. 비대한 둔부에 유방까지 튀어나왔다. 사실 아케나텐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가진 양성인이었다. 요즘 기준에서 본다면 독특한 외모로 사회에서 소수자로 분류될 만하다. 하지만 그는 왕족이었고,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겸비한, 신의 외모를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아케나텐이 숨을 거두자 기존 관료 세력은 강하게 반발했다.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겨우 9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투탕카멘은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래 투탕카멘의 본명은 투탕카텐(아텐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즉위 직후에는 아멘신으로 개종하고 이름마저 투탕카멘(아멘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야 했다. 부인 안케세나멘(=아낙수나문) 또한 개명한 것이다.
투탕카멘은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순혈을 유지하려는 이집트 왕족의 극심한 근친혼 폐해가 그에게도 미쳤다. 부인도 이복자매였고, 두 딸도 유전적인 결함으로 태어나면서 잃어야 했다. 그의 무덤에서 지팡이 130개가 나올 정도로 어릴 때부터 발을 절었다. 결국 18세에 말라리아모기에 물려서 짧은 인생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의 정확한 사인은 현재까지도 논란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가 죽을 때까지 매우 병약했다는 점이다.
실패한 개혁가의 후예였던 투탕카멘이 숨지자 사람들은 그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빴다. 오누이이자 부인이었던 안케세나멘은 근동의 히타이트왕국에 급하게 정략결혼을 요청하며 기존 세력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안케세나멘은 새 파라오에 등극한 자신의 할아버지 아이(Ay)의 부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 별다른 치적도 없이 아버지를 부정했던 투탕카멘은 그렇게 역사에서 이내 사라졌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때문에 그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 부활할 수 있었다.
‘미라의 저주’는 정말 있었을까
투탕카멘 무덤에서 나온 전차. [중앙포토]
이집트 유물은 인기 1순위다. 이집트 문화재가 없는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만큼 서구의 전리품 경쟁이 치열했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발굴인 투탕카멘의 유물은 기적적으로 이집트에 남게 됐다. 카터를 후원한 카너번 경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른바 ‘미라의 저주’ 영향이 컸다.
실제로 카너번은 투탕카멘 무덤을 발견한 지 5개월 만에 이집트 현장에서 허무하게 죽었다. 면도하다 모기에 물린 뺨에 상처가 났고, 그게 감염이 돼서 보름 만에 사망했다. 당시 이집트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사실 ‘미라의 저주’는 없었다. 카너번 경도 젊은 시절 숱한 사고로 몸이 많이 허약한 상태였고, 항생제나 말라리아 치료제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초 이집트 정부와 하워드 카터의 발굴대는 ‘파르타지(partage)’라는 계약을 했다. 유물의 절반은 땅 주인인 이집트가, 나머지 반은 자본을 댄 카너번경이 권리를 가지는 식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얼토당토않지만 서구 열강이 약소국의 무덤을 파헤치던 시절에 흔히 있었던 계약이다.
카너번의 죽음으로 유물 소유권이 애매해질 당시 이집트의 고대유물국에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 피에르 라코(Lacau)가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래 프랑스와 영국은 이집트 유물을 두고 한창 문화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스핑크스의 코를 나폴레옹이 대포로 파괴했다는 낭설을 퍼뜨렸고, 나폴레옹 부대가 발견한 로제타 스톤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라코와 이집트 정부의 뜻대로 카너번 유족에게 발굴비 3만5000 파운드(현재 약 230만 파운드, 37억원)를 보전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파라오의 유물은 이집트에서 영원한 휴식을 누리게 됐다.
반면 영국에서 볼 때 하워드 카터는 그리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정작 영국 정부로부터 어떤 작위나 영예 칭호도 받지 못했다. 사망 당시 그를 조문한 영국 고고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흙수저의 성공을 질투하고 실제 유물은 영국으로 가져오지 못한 것을 탓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서구 열강이 이집트 문화재를 인류의 보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소유물로 앗으려 했던 시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투탕카멘의 역설이 말하는 것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하는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죽은 뒤에 머물 궁전을 건설했다. 반면 대가가 컸다. 수많은 파라오 무덤이 글자 그대로 참혹하게 털려서 싼값에 팔렸다. 그들이 쏟아부은 돈의 수백만분의 1도 안 되는 값에 말이다. 그럼에도 ‘비운의 왕’이었던 투탕카멘은 현재 이집트의 찬란함을 대표하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투탕카멘의 역설이다. 문화재는 현지에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투탕카멘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이어진다. 201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투탕카멘의 유물이 등장하면서 이집트가 돌려달라고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도 파라오와 이집트를 떠올리면 서구 박물관에 전시된 고고학자의 전리품을 떠올린다. 수많은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언제나 문화재를 두고 다투는 서양인이고, 정작 현지인은 소모품처럼 사용된다. 문화재 쟁탈전의 그늘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수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빼앗긴 우리에게 이집트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