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자로 부활 장면 -
☆ 2016년 다해 3월21일 월요일 [(자) 성주간 월요일]
[수도회] 절대 가치를 위한 사랑의 기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2,1-7
† 복음 요한 12,1-11
◈ 오늘의 묵상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에서 그의 동생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립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이런 행동을 낭비라고 개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이십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신앙의 표현이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소홀히 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진실이 있습니다.
만누치(V. Mannucci)라는 성서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분에 대한 경배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흔히 말하듯, 위를 향한 가난이 있고, 우리의 가난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난을 알게 되면 그분께 경배라는 몸짓을 표현하게
되고, ‘무익한’ 것처럼 여겨지는 전례에 참여하게 되며, 가장 귀한 것을 자기
품에서 꺼내어 하느님께 봉헌한다.”
세상에는 낭비처럼 보이지만, 신앙인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여도 거기에 숨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수많은 남녀들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스스로를 포기하고,
기도에 온통 시간을 바칩니다. 돈주머니를 차고 있는 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보여준 모범을 따를 수 있어야
2016년 다해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7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저는 제 동창신부에게 운전을 배웠습니다. 운전을 가르쳐주면서 중요한
것은 방어운전이랍니다. 전방주시, 양보운전, 정속주행도 중요하지만 다른
차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면서 운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당시에는
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서 운전을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었지요.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더군요. 자기가
아무리 잘 운전을 해도 다른 차의 잘못으로 사고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를 15년 넘게 운전하면서 많이 겪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운전을
해서 가고 있는데 옆 차선의 차가 좌측 신호를 켜지도 않고 갑자기 끼어들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일촉즉발의 순간에 얼른 브레이크를 밟아서
사고는 없었지만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었습니다. 안전운전은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들을 바라보면서 운전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만 잘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히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나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로부터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쩌면 그 아픔과 상처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들이 행하고 있는 말과 행동의 의미 역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수건이 아닌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행동을 그대로 놔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된
사랑을 따라 당신 역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만히 나누셨던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런데 이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 평가했던 제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육체노동자의 삼백일치 품삯)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면서 받았던 것은 겨우 은전 삼십 냥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보다도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소중한 뜻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따라서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가 보여
주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하느님을 세상에 넘기는 지울 수 없는
죄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운전할 때에 다른 차에도 신경을 써야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내
이웃들에 대해서도 신경 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한다(강유의).
라자로를 살리셨던 베타니아 성당의 벽화.
많은 기름이 많은 죄를 덮다(시리아인 에프렘 ‘동정찬가’)
죄인들이 거래하는 기름, 많기도 하네.
그 거래는 죄의 용서.
기름부음받으신 분께서 [당신] 발에 기름 부은 죄인의 죄를 기름으로
용서하셨다.
마리아는 [기름]으로 자신의 죄를 자기 죄를 용서하실 주님의 머리에
쏟아부었네.
그 기름은 향내를 풍기며 식탁에 앉은 자를 화로처럼 시험하고
가난한 이들을 아끼는 척하는 자의 도둑질을 드러냈네.
그 기름부음은 마리아의 영광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며 그녀를 기억하게
하였네.
그 흘러내림 안에 기쁨이 감추어져 있으니 실로 기름은 얼굴을 웃음 짓게
하네. 그것은 모든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모든 짐을 짊어지네.
이는 기름이 기쁨을 섬기며 슬픔을 복종하게 하기 때문.
그것 때문에 삶을 즐거워하는 얼굴들은 빛나고 죽음의 어두운 얼굴은
그것과 함께 죽음을 맞고 묻힐 준비가 된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기름을 부어드리고 있을까요? 주님보다는 스스로에게
기름을 붓는데 온갖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주 멋진 카페에 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 12,1-11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2년 만에 만났지만 늘 어제 만난 것처럼
정겹고, 반갑습니다. 교복을 입고, 함께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지만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우리는 서로 많이 변했습니다. 한 친구는 30년 동안
반도체와 친구하면서 지냈습니다. 한 친구는 나무와 돌과 친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영업을 하는 친구는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온 친구들이 고마웠습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모두들 어두운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뿌리를 충실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제가 많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은 듯 2차를 가자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명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30년을 가족을 위해서
일을 했으니,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명예퇴직, 희망퇴직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칠레에서 살고 싶다는 친구는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국 여행을 하고 싶다는 친구는 중국어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합니다. 나무와 돌을 잘 만지는 친구는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친구들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남은 시간들도 기쁘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년간 함께 지냈던 학창시절은 우리들 만남의 샘물과 같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학창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곤 합니다. 그만큼 순수했고, 맑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의 샘물과 같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열이
있기에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샘물과 같은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순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자선, 단식, 기도,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연을 움직이게 하는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곧 땅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주는 줄입니다. 그 줄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향해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때, 하느님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삶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신의 욕심과 야망이 보이면 그는 지금 살아있지만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마리아는 순수해져서 자신을 돌아볼 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모든 것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다투는
제자들, 주님께 배반의 입맞춤을 한 유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 권력을 이용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헤로데와
빌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들’ 모두는 영원한 생명과
십자가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권력, 재물, 명예를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잊지 않고
초대했던 라자로처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바로 그 신앙의
줄을 마련하였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 편과 수석 사제들 편
2016년 다해 3월21일 성 주간 월요일
예수님 편과 수석 사제들 편
믿음에는 언제나 유혹과 어려움도 따르지만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안에 원래 있던 힘과 합하여 더 큰 힘을 내게 마련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신, 사람, 사건 외에도 해당되며 역시 힘을 말합니다.
믿음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항상 힘겨루기를 하는 일로 늘 이어갑니다.
예수님 편과 수석 사제들의 편싸움에서 예수님 편이 망한 듯 했지요.
주님의 부활로 싸움의 승패는 가려졌지만 아직 고집쟁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9~11)”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절대 가치를 위한 사랑의 기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절대 가치를 위한 사랑의 기름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아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음모가 드러나고 있었지만 주님의 종의 길을 의연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기 위해 만찬이 열립니다.
거기서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노동자의 일년치 보수에 해당하는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12,5)라고 하며 못마땅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그냥 두어라.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2,7)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구원과 신앙을 돈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고 상대적 가치를 좇는
유다의 시각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는지, 아니면 절대 가치인 하느님을
갈망하고 추구하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가치를 매기고 효율성을 알아보고 일을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선한 사람에게서 이 가치는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은 이
보편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이런 상대적 가치를 주인으로 섬길 때가 많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보다 예수님에게 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
마리아는 절대적 가치인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을 자신을 위해서 쓰려고 함으로써
상대적인 가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사라져버릴 현세의 것들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이요 그분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영혼구원과 용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 안에서의 친교와 같은 것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참된 가치는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살아움직이실 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려면 철저한 자기버림과
사랑의 몰두, 겸손과 인내를 지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절대 가치요 삶의 궁극적 목적인 사랑 지극한 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야겠습니다. 마리아처럼
구원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향유를 발라드려야겠지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사랑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상대적 가치를 좇는 자리에 탐욕과 불평등과 불의,
배척이 드러나기 마련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절대 가치인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행위, 고귀한 신앙의
선물을 오염시키는 속화된 세상에 사랑의 향기인 향유를 바르는 향기로운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8)
여러분의 소비패턴은 어떠한가요?
전통시장에 가서 콩나물, 두부 등 생필품을 사면서
천원 깎아달라고 하면서 몇 십만원, 몇 백만원 짜리
옷이나 명품, 해외여행 등은 겁내지 않나요?
사람마다 돈을 아끼지 않고 비이성적으로 소비하는
특별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위 매니아들이지요.
여러분은 어떤 매니아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투자하는
돈이나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예수 매니아들이 아닐까요?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당신 매니아가 되라기 하시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매니아가 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가난한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깝지 않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사비이가 아닌 정상 종교인들이 매니아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옛 모습 그대로 계실 수는 없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의 수난을 받고 죽게 되실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늘 새롭게 부활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을 눈여겨 봅시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 생각하며 바라보고 대해 봅시다.
성주간을 거룩한 주간이 되게 하는 것은
성당에서건 길거리에서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길거리에서 그분을 만나뵙기가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냔 디헤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 7)
무색무취한 우리의 신앙을 오히려 한 여인의 향유가 우리에게
향기로운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향기가 없다는 것은 마리아처럼 우리가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향유는 나누려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삶자체입니다.
마리아의 향유 이야기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삶은 있고 예수님과 함께 아파할 가슴이 없습니다.
가슴으로 사랑하고 가슴으로 나누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서로를 향기롭게 하는 지금 이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닦아드려야 할 예수님이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닦아드려야 할 성주간의 때를 이제 놓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음의 향유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합니다.
처음과 끝처럼 이 성주간이 예수님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가장 향기로운 향유는 가슴으로 나누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섬김의 지도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3월21일 성주간 월요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 12,1-11
섬김의 지도자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어찌되었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임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받게 되는 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통치가 아래에서 위로향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으로써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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