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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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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깨끗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악한 영을 쫓아내고
선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어둔 영을 쫓아내고
밝은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내모는 영을 쫓아내고
보듬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부수는 영을 쫓아내고
이루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가르는 영을 쫓아내고
모으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움켜쥐는 영을 쫓아내고
베푸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짓밟는 영을 쫓아내고
세우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할퀴는 영을 쫓아내고
어르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죽이는 영을 쫓아내고
살리는 영을 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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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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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이 첫 번째 행적으로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과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아는 정보를 드러낼 뿐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한편,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권위”(exusia)란 말의 원어의 뜻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직접 스스로 명령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이 멈추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사오니,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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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예수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하고 성장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홀히 합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과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 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하느님 말씀을 통해 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됩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더러운 영이 소리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1,24). 악령의 말은 사실이지만 일종의 아부, 타협의 제안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고수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하시며 단호히 타협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악령은 떠나갈 때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고 발악합니다. 더럽게 떠납니다. 악령이 들린 사람의 태도는 오늘도 이웃 안에서, 바로 나 자신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정체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인정하면서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며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말 따로, 행동 따로입니다. 이것이 악령의 특성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실제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미사에 꼭꼭 참여하면서 아주 경건한 듯 보이지만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잊고, 생활 안의 주님을 따르기는 거부하는 ‘따로국밥 신앙’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 각 신심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게 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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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가 나서 ‘연도’엘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71년생이니 조금 일찍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도 있지만, 고인이 생전에 많은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고인이 생전에 꾸르실료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도에 갔습니다. 연도 중에 ‘자녀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인 딸은 눈물 때문에 엄마를 위해 기도를 다하지 못했고, 대녀가 대신 ‘자녀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연도를 마친 후에 딸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엄마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 때와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리고 예쁜 딸을 낳았을 때라고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늘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였고, 엄마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그렇게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내 삶의 의미도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구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늘을 보면 구름이 된 엄마를 만날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엄마는 구름이 되어 나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엄마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계세요.”
우리가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도 중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며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청합니다. 성인 호칭기도를 바치면서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고인은 해야 할 일을 깨달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고인은 자선과 봉사로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인의 손에는 오래된 묵주가 있었습니다. 고인은 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본기도에서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요안나와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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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런 놀람의 표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권위’에 대한 말씀은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도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다른 주님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권위’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사용하고 있나요.
사실 ‘권위’라는 말은 우리 사이에서 그렇게 좋은 평을 듣지 못합니다.
권위적인 사람, 권위적인 말투, 권위적인 행동 등 우리 주변에서 사용하는 ‘권위’는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우리가 이미 접하고 있는 그런 부정적인 권위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은 주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권위는 바로 회복 그리고 치유입니다. 마귀들이 가진 속성 즉 분열과 갈라짐이 아닌 화합과 함께함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이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에 그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권위 안에서 살고, 주님의 권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늘 하나로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아픔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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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는 딱딱하고
어디는 무르고
어디는 딱딱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사실 딱딱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니라
받아들였다가 상처받아서 딱딱해졌기에
다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디는 물러 터졌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여기 끌려다니고 저기 끌려다닙니다.
사실 무른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받고픈 애절한 마음일 뿐이라 무른 겁니다.
딱딱한 곳은 ‘괜찮아’라며 어루만져 주기를
무른 곳은 내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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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연히 옛날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35년 전의 사진입니다. 우선 지금과 달리 너무 젊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멋을 내려고 했는지 머리카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말랐습니다. 하긴 당시에는 60kg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가졌었던 생각도 떠올려졌습니다. 좋은 신부가 되겠다는 다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겠다는 마음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많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학교 공부에 힘들어했고, 열심히 공부해도 향상되지 않는 제 모습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고, 그래서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신학생 때, 실패의 경험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제가 암기 중심의 철학과 신학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좌절에 저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실패의 내용이 사진 한 장에서 쫙 펼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경험했던 그 시간이 잘못된 시간일까요? 만약 그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인지를 깨닫는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했던 저도 바꿔 쓰시는 그분의 힘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보며,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포기, 좌절의 단어를 담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사랑이 합해져서 과거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그 큰 힘에 대해 오늘 복음은 증언합니다.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25)라고 꾸짖으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권능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해서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쉽게 판단하고 스스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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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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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 일간신문 1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스마트폰이 아이 뇌 잠식...‘도파민 인류’출현이란 제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알파(Alpha)세대. 인류통계학자들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인 2010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알파 세대라고 부른다. 알파세대가 잃은 것, 문해력, 사회성. 뇌발달 막는 스마트폰...집중력, 충동 조절, 언어능력 저하.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뇌가 일찌감치 유투브 등 짧은 영상 ‘쇼트폼’(Short-form)에 노출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정적인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됐다고 지적한다. ‘짧은 유투브 동영상은 서사가 없어요. 그저 게임처럼 자극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가만히 책 읽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요.’ 스마트폰에 흥미를 뺏긴 아이들은 글을 낯설어하고 있다.”(한겨레2024.1.8.)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위시의 시대, 알파시대입니다. 현대판 악마가 되고 있는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입니다. 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동영상의 유혹이나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참으로 분별력과 자제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저만해도 2000년까지는 손으로 온통 강론을 쓰다가 지금은 노트북을 사용하니 손으로 글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사실 요즘 손으로 쓴 친필 편지를 받아보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래서 얼마전 부터는 만년필을 구입해 손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보속시 말씀 처방전은 반드시 만년필로 씁니다.
보고 배웁니다. 듣고 배웁니다. 읽고 배웁니다. 가상의 세계가 아닌, 직접적인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가 사람됨에 결정적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겸손도 순종도 성실도 진실도 침묵도...보고 듣고 읽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의 기본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권위 역시 보고 배웁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하겠지만 권위는 필수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신뢰와 비전을 지닌 권위의 사람은 모두가 배움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보고 배우는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가정이 무너집니다.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에 맞는 참권위의 형성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답게’ 사는 분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로 말하면 존엄한 품위와 권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42년전, 1982년 늦깎이로 3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고 대학에 편입하여 희랍어를 배울 때 '권위'라는 단어 뜻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권위(ex-ousia)’, 즉 ‘존재로부터’ ‘안으로부터’ 나온 권위의 어원입니다. 밖에서 덧붙여진 권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로부터 자연스럽게 저절로 흘러나온 권위입니다.
옷 잘 입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재물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학식이 많다고, 예쁘다고, 권력을 많이 지녔다고 권위가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참되고 고결한,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품이, 인격이, 품격이, 저절로 권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권위는 직감적으로 감지되며 이런 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참 권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답을 줍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항구하여 날로 하느님을 닮아 겸손하고 온유한, 진실하고 성실한 참나가 되어갈 때 저절로 참 권위입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망애와 삶과 더불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 권위입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은 어른이나 부모의 이런 권위를 보고 배웁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어른에게서는 꼰대가 아닌 참 어른으로서의 신선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의 위력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권위를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 있는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움직이는 중심의 산같은 권위의 예수님입니다. 이런 참 권위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리기 마련입니다. 저절로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 질서가 이뤄집니다. 24년전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 일화를 생각하며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18년전, 그리고 14년 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4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10.12
참 권위의 큰 어른을 상징하는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흠모하며 쓴 시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위가 아닙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신망애의 관계가 참 권위의 사람, 참 권위의 어머니로 만듭니다. 1독서 사무엘기 상권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저는 어머니의 참 권위의 비결을 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세월지나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어머니입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머니의 자식일뿐 같습니다. 제1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흡사 마리아의 마니피캇 찬미가를 연상케 합니다. 한나 어머니의 하느님 찬미의 삶, 바로 참 권위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참 권위의 원천인 주님을 닮아갈 때 하사되는 참 권위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닮은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 권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소명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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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그들은 한 번 더 놀라게 되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에서
그분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권위로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기 스승의 권위를 빌려 말을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온전히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 학자들이
자신들의 스승에 대해 갖는 신뢰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해 가지셨던 신뢰가
더 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더 힘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신뢰심에서 오는 권위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물론 율법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도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스승에게서 오는 것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하느님 말씀에서
즉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직접성과 간접성의 차이입니다.
그 직접성은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은
그 직접성을 경험합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
자신에게 직접 작용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연중 시기 동안
우리는 그 활동에 대해서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2천년 전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직접 체험한 이들에게
그 체험은 해방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을 전해 듣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직접 다가오신다는 것이
기쁨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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