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샤가 급히 모래로 만든 집 안으로 숨어들어갈 때, 황성 마르가스 안에서는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카싱가 가문의 에보라 여 가주는 현재 분노에 가득차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미쳤나?!”
옆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검은 머리의 소녀가 피식 웃었다. 에보라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보기에 굉장히 처염한 외모의 검은 머리 소녀는 재밌다는 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에보라 대마법사의 얼굴이 잔뜩 찡그러졌다. 마녀라고까지 불리며 정복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냉정한 그녀답지 않게 그녀는 매우 흥분해 있었다.
“진정해요. 에보라.”
“진정하게됐어?!”
“.....솔직히 좀 그렇죠?”
에보라는 탁자를 크게 내리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이게 정말 미쳤나!! 5년전에 발작이라도 일으켰는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나!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이번에는 뭐? 몇 년 동안 찾지 마세요?!!”
“한두번 그랬나요.”
“이봐! 이건 단위가 달라! 몇 년이라구!! 10년이 될 수도 있고 100년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인간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요.”
에보라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분노에 가득찬 얼굴을 대하고도 만연에 웃음을 띄우고 차를 마시는 소녀를 보자 울화통이 터져나왔다. 카드리유 현자의 탑 최하층 어둡고 캄캄한 지하실에서 에보라 카싱가 대 마법사의 분노에 터진 음성이 울려퍼졌다.
“달을 보아요~ 달을 보아요~ 하늘에 뜬 두둥글 쌍둥이 달~ 달을 보아요~”
“......”
“달을 보아요~ 하늘에 뜬 흰 달을 보아요! 옆의 붉은 달 곁에 푸른달이 뜨는날~”
“...........”
“하늘에 지옥의 마왕이 강림하여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쨍강.
시리도록 차갑게 생긴 여성이 손을 들었다. 한 많은 세상 죽지 못해 산 것 같지 않게 통통한 여인은 거지꼴을 한 한 어린 소년의 목덜미를 집어 들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겠지만 워낙 새까매서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노래 부르면 퍽도 손님이 오겠다!!!!”
잔인하게 외치며-사실 노래에 문제는 없었다. 그녀의 기분이 더러웠을뿐이지-그녀는 소년을 밖으로 홱 던져버렸다.
지금까지 20년 이상 동령주와 교황령 사이의 완충지대에서 숙박업에 종사했던 그녀는 그날 남편과 한판 싸운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도 어느날과 예외 없이 제일 만만한 음유시인 나부랭이 한 명을 잡아 밖으로 패대기를 쳤다.
그랬다. 패대기를 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날은 어느날과 달랐으니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예쁜 줄 아는 기고만장 대 마녀 메사비 여사께서 친히 납시셨던 날이었던 것이다. 꼬질꼬질한 소년이 자기 얼굴에 던져지고 그걸 무방비하게 맞고 멍하니 서 있던 메사비의 머리위에 실핏줄이 살짝 돋아나왔다.
“저 년이 미쳤나!!!”
“년?! 뭐, 년?!”
상업정신따윈 이미 오래전에 날라가버렸다. 어디서 굴러먹다온 용병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님이야 안 받으면 된다. 왕년의 사막의 꽃이라 불렸던 그녀답게 통통한 붉은 머리 여인은 메사비를 향해 채찍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이게 어디서!”
“얼씨구. 야. 노인네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애를 집어던져?”
“누가 들어오래? 어디서 굴러먹던 계집애야? 너, 내 실력 좀 봐야 너 자신을 알겠냐?”
두 붉은 머리 여성의 사이에서 엄청난 자기장이 구상되었다. 술집 주인인 여성과 대귀족 코틀라스 가의 공작부인 메사비. 엄청난 대비를 보이는 두 여성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겉보기엔 둘다 거렁뱅이 용병으로 보였다. 메사비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카라비넨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가 의문에 찬 눈으로 카라비넨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이래서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카라비넨은 예나를 이끌고 주점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 메사비 님은...”
“모르는 척 해. 어디서 미친년 봤구나 그러라구.”
예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친 듯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저 두 모자의 관계는 몇 번을 봐도 재밌었다. 이럴거면 차라리 공작님께 말 할 것이지 어머니의 애타는 부탁에 넘어간 것은 자신이면서.
예나가 무슨 생각을 하던 묘한 경쟁심이 붙은 두 여성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불타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채찍이 공기를 가르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었다. 메사비의 표정이 기묘하게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카라비넨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설마 설마를 외치던 그는 돌아보는 순간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
“어머~! 언니이이이이!!”
“....언..니... 까아악! 메사비! 이 기집애! 그동안 어딨었던 거야? 용병생활 떴다며?!”
그랬다. 용병출신의 그녀가 바깥을 돌아다니는 까닭은 철없어 보임에도 많은 인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비넨이 메사비와 여행하길 꺼려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가는 마을마다. 가는 곳곳마다 아는 인간이 한 명 이상씩 꼭 튀어나왔던 것이다.
‘저건 뭐야.... 여기서 일주일 이상 보내겠군....’
카라비넨이 무슨 생각을 하던 메사비는 몇 십년 전에 헤어졌던 서클의 언니를 보고 기뻐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언니! 언니꼴이 이게 뭐야?! 우리 왕언니가 이렇게 통통해지다니!! 섹시함이 사라졌어!”
움찔.
‘왕...왕언니?’
카라비넨은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그는 속으로 엄청나게 놀랐다. 설마를 외쳤으나.
“메사비! 넌 완전히 폈는걸? 피부 뽀얀 것 좀 봐! 듣기론 어떤 꼬마애가 널 찾아다녔다며? 그것도 엄청나게 잘생긴 꽃미남이!!!”
“응~! 영계건졌어. 굉장히 잘 생긴 데다가 나한테 결혼해 달라구 애걸했는걸!”
카라비넨은 다시 떨며 외쳤다. 의외로 굉장히 소심했다.
‘뭔 영계!!!’
“잘했다! 역시 내 후계자야!!”
카라비넨은 외쳤다.
‘무슨 후계자!!!!’
그리고 그는 빌었다. 제발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가길. 그러나 그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남자없이 여행을 다니지 못한다. 물론 스스로 몸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짐꾼. 이것이 그녀의 하나의 신조였다.
문득 카라비넨의 머릿속에 어렸을 적 초죽음이 되서 돌아온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물자가 아직 많이 부족했을 때였다. 그 상황에서조차 밖으로 메사비는 뛰쳐나갔었다.
온 집안에 있는 금을 떼가고 보석을 떼가고 비단 커튼과 옷들을 팔아서 그녀가 사 왔던 것은...
‘관두자. 생각하기 싫어.’
“어머. 언니. 영계 필요해?”
그리고 상상의 나래속에 빠져 있었던 카라비넨의 귀에 아주 불길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이지. 나는 팔팔한데 이 주변에는 힘깨나 쓰는 것들이 없어서. 쯧쯧.”
“어머. 안타깝다.”
“어떻게 된 것들이 생긴건 떡댄데...”
“떡댄데...?”
두 여자는 완전히 자리 잡았다. 둘이서 얼굴을 마주대고 킥킥대는 모습.
“카넨 형.”
“왜.”
“....떡대랑 크기가 뭔 상관이야? 떡이 크면 맛있어?”
그리고 카라비넨은 조용히 예나를 품에 안고 천천히 터벅터벅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예나의 귀를 막는 것을 잊지 않고. 그리고 올라가며 그는 들었다.
“크면 맛있긴 해~~!!”
“영계! 내 아들 있잖아! 오늘! 어때? 언니!”
그렇게 여행의 시작을 보냈던 것이었다. 동령주의 맨 끝자락과 교황령 사이의 완충지대에서-물론 소영주들은 존재한다-무려 2주일 되는 시간을 공으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소년다운 모험을 꿈꿨던 예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루한 날의 연속이었다. 물론 카라비넨은 정조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던한 애를 썼지만.
마을에서 머문지 첫째 날.
멍하게 마을의 제일 큰 도로를 걸으면서 예나는 난생처음 보는 희안한 건물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흙과 진흙과 지푸라기로 만든 집. 울퉁불퉁한 겉껍질과 건조한 흙먼지 사이에서 한 낡은 집이었다.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살지...?’
예나는 속으로 놀라움에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럴수도 있을까.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살 수가 있는 걸까. 문득 저 어두컴컴한 집 안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남의 집을 뭘 뚫어지게 보니!!!”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집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슬며시 안을 엿보던 예나의 어깨가 움찔 굳어졌다. 막 장난치려다 걸린 강아지 같았다. 예나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너 뭐니?! 경비대원한테 이른다!!”
“어? 어... 그러니까...”
소녀는 눈을 샐쭉이 떴다. 그리고 눈 앞의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낡은 겉 외투와 몇 일 못감은 듯 보이는-그래도 굉장히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과 상처하나 없는 갈색 뺨-원래는 하앴을 거다-.
“.....안됐네...”
그리고 소녀는 매우 어이없는 추리를 해 내고 말았다. 집이 가난하여 어린 나이에 검을 잡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가엾은 어린 소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력이 아직 되질 못해 거지 꼴인데 배가 고파 집을 털 생각을 했다.
동령주 제 2 가문 칼라인 가(家)의 후계자 예나 미어샤이머 칼라인. 난생 최초로 거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철없는 10대.
“배고프니? 자. 들어와.”
소녀는 한 손에는 자신의 동생을. 한 손에는 예나를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예나의 얼굴이 화아악-. 하니 붉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집 안은 예상했던 대로 어두웠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깔끔했고 깨끗했지만 방이 있어도 문이 없는 방이 구별되지 않은 희안한 구조였던 것이다. 집 안에는 식탁도 없었다. 소녀는 예나를 방안에 집어 넣고 떠온 물을 가져왔다. 소녀는 아무래도 물을 뜨러 갔었던 모양이다.
“....저기....”
그랬다. 예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소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거 뭐 하는 거니?”
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궁금했다. 정말정말 궁금했다. 저기 있는 동그란 구멍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주변이 약간씩 새까만 걸로 보아 그을음같았다. 근데 왜 불을 지피지?
“.....아궁이잖아!!”
“.........그게 뭔데?”
소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소녀는 그리고 또 한번 어이없는 추리를 해 내고 말았다.
‘집도 절도 없는 아이였나보군..., 이건 위험한 거 아냐? 저런 애들일 수록 더 위험한데... 에라!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아니지. 난 죽기 싫은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소녀는 예나의 말에 화들짝 깨었다. 예나는 또다른 것을 묻고 있었다.
“저건 뭐야.”
“....뭐.”
“동그란 것들.”
소녀는 이제야 정말로 예나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저 소년은 과일이란 것을 단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천애고아였던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예나가 어디 과일을 직접 손으로 잘라 먹어봤겠는가?
“.....티푸론이야.”
“티푸...아! 그건 내가 알아.”
“근데 왜 물어보니?”
“하지만 내가 먹은 건...,”
“먹은 건?”
“에.... 동그랗지 않고 네모 꼴로 돼서.....”
소녀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푸하하하하하하!!!”
소녀는 기어이 더러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는 안심했다. 이 소년은 바보다. 예나는 그렇게 평생을 마음에 둘 소녀와 최악의-10대에 이런 일은 정말 최악이다-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마을에서 머문지 두 번째 되는 날.
예나는 낑낑 거리며는 아니고... 약간 힘들어 하며 물통에 물을 가득 퍼올리고 있었다. 물 통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선 이 깊고 깊은 우물이 뭐에 쓰는 용도인지 몰랐다.
소녀가 심부름을 시킨지 2시간이 지나도록 멀뚱이 섰다가 한 아주머니가 물을 퍼올리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물을 퍼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해봤어야 알지.
물을 퍼올리는 데 무려 1 시간이 걸려 총 3시간 이상을 걸려 물을 떠온 예나는 그날 하루 이름도 모르는 소녀에게 구박을 받았다.
마을에서 머문지 세 번째 되는 날.
예나는 아침부터 고민했다. 소녀에게 놀러갈까. 말까. 어떻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갈 수 있을까. 안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부모님께 해가 될텐데-그럴 일 절대 없다-.
하지만 결국 심심함에 치를 떨던 예나는 옆방에서 카라비넨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소녀의 집으로 종종걸음으로 놀러갔다.
“젠장! 이제 그만 좀 하란 말입니다!”
귀를 종긋거리며 왜 저러나 궁금해하던 예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사건이 터진 것은 다섯 번째 되는 날.
이젠 완전히 무슨 하루일과처럼 소녀의 집에 가는 것을 당연히 하게 되어버린 예나는 여전히 종종걸음으로 건조한 바람이 부는 길거리를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그동안 예나는 많은 것을 깨우쳤다. 그는 우선, 나무로 접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나무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거지도 할 줄 알게 되었으며 과일은 깎아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엄청난 사실도 깨달았다.
이것은 훗날 예나 혼자 일행과 떨어졌을 때 크나큰 도움이 되는데... 그건 나중 일이고.
“예나! 이것도 부탁해!!”
까만 머리의 소녀는 오늘도 예나에게 물을 떠오는 심부름을 시켰다. 아침이라고 하긴 많이 지났고 점심이라 하기엔 부족한 시간. 그 시간에는 많은 여자들이 우물가에 모인다. 빨래더미를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난 여인들은 예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저애예요? 그 어리버리한 서방이?”
“예, 그것 때문에 도련님 기분이 아주 안 좋다네요.”
“쯧쯧. 또 곧 송장 치루게 생겼군.”
그랬다. 예나에게 이제 곧 꿈에도 그리던 레이디-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지만-를 구하는 기사 흉내를 낼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나 있던 악덕 영주는 여기에도 빠짐없이 있었던 것이다.
“......?”
예나는 주위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물을 재빨리 떠올렸다. 그때 예나의 신을 무엇인가가 긁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까만 고양이. 까만 새끼 고양이가 예나의 신발을 긁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나는 신기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였다. 무서운 속도로 빨래방망이가 날라오더니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에이그! 이 흉측한 것이 여기 왜 있누?!”
“그러게 말야. 저것 때문에 신경거슬려 죽겠어.”
흉악한 분위기에도 고양이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눈가에 피가 맺혔다. 용케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나는 고양이를 살며시 들었다.
그리고 물을 재빨리 뜨고 우물가에서 벗어났다. 반항이 없던 고양이는 그러나 우물가에서 벗어나자마자 몽둥이 찜질을 받은 것 같지 않게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사라진 고양이를 멀뚱히 보다가 예나는 다시 물통을 지었다. 그리고 예나의 앞에 어디에나 있는 여자 밝히는 철없는 공자가 서 있었다.
“.....?”
“훗. 이 놈이야? 빤질빤질 생겼네. 기둥서방감으로는 좋군.”
“.......”
“야. 겁먹었냐? 네가 마라케시 기둥서방이냐?”
“................”
“허. 이놈 진짜 겁먹었나 본데? 야. 우리가 좀 무섭게 생겼냐? 원래 우린 부드~러운 남자들이라구. 여자들이 눈이 삐었지. 왜 이런 놈이 좋대?”
그랬다. 그들은 몇 일 전 이 마을에 당도해 순식간에 팬클럽이 결성된 차가운 인상의 청년을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이 어린 소년에게 화풀이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마라케시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도 꽤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처녀였으니까.
처녀를 시집안간 여자로만 생각지 말아라. 그럼 다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예나는 꽤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기둥서방이...........뭐지?’
그랬다. 예나는 어딘가 좀...이 아니라 많이 어벙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기둥서방? 갑자기 그걸 왜?”
“아니. 물어봐서.”
“됐어. 몰라도 돼.”
마라케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거칠게 물을 물통에 담고 있었다. 예나는 그 일을 옆에서 도우며 마라케시에게 자꾸 묻기 시작했다.
“그게 뭐냐니까!”
“몰라도 된다니까!”
“.....뭔데. 안 좋은 뜻이야?”
“그래!!!!”
거기까지 소리를 빽 지른 마라케시는 뻣뻣하게 굳었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것. 그녀는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너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어? 오다가 누구랑 만났거든. 이야기 좀 했어.”
마라케시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뭐 찾는데?”
“시끄러..!”
그렇게 한참을 부스럭 거린 뒤 그녀가 꺼내든 것은 꽤 오래된 듯한 양초였다. 물론 양초인 것을 알아본 것은 불을 키고 난 후였다. 그녀는 양초를 손에 들고 예나의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예나의 얼굴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이래?”
“야! 너 오늘 그 놈 만났잖아! 근데 왜 이렇게 멀쩡해!”
“그거야 이야기만 했다니까. 대련만 조금 했어.”
“대련....? 대련이 뭔데?”
“음.... 그러니까.... 기사대 기사로써 결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마라케시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푸하하하하하! 결투래! 결투!!!!!”
그녀에게는 다 철없는 꼬마애들로만 보였던 것이다. 원래 여자의 정신연령이 남자보다 높다고 하지 않던가. 그때, 시원하게 웃는 마라케시의 눈쪽에 작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케시! 그건 뭐야!!”
“어...? 어?”
마라케시는 황급히 손을 들어 왼쪽 눈을 가렸다. 그리고 동생이 낮잠에서 깨 슬그머니 나올 때 예나는 마라케시의 동생 왼쪽 눈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나가 의문에 휩싸여 있을때 너무 밤이 깊어 예나는 자신의 여관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마라케시에게 쫓겨났단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