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의 처염해 보이는 소녀가 일어섰다.
카드리유 현자의 탑 맨 아래층 지하에 위치한 고 서적들을 들쳐보며 소녀는 흐음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소녀는 책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읽어가고 있었다.
마법의 탑 답지 않게 중요 서적을 모아놓은 이 곳에는 마법의 불빛 하나 없었다.
“.....그래서 갔던 건가.”
어둠과 동화된 듯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녀는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그녀의 기억은 이미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신성한 땅 트피. 노비사드 언어로 한다면 물의 여신인 니나를 뜻하는 트피 남쪽 땅의 중심의 거대한 오아시스 누투를 중심으로 한 신성 국가 트피가 완전히 멸망해 버린 날이었다. 카타트 력 710년. 아르아크 족의 유랑이 시작되는 해였다.
트피의 최고 지도자는 물의 여신의 제 1 신녀인 네그라샤였다. 네그라샤는 대대로 물의 여신의 후계자가 그 뒤를 이었다. 즉, 그 핏줄에 물의 여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네그라샤 제 1 신녀가 트피를 배반했다.
그녀는 주변의 5대 왕국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이상할 정도로 포위만 한 채 움직이지 않는 노비사드 제국군에게 트피를 넘겨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스러져갔다.
이해할 수 없었다. 트피가 멸망하면 첫 번째로 죽어 사라지는 것은 바로 신성 인간. 하지만 그녀는 트피를 넘기고 스스로 물로 화해 죽어갔다.
그 뒤 네그리스 제 2 신녀가 반 노비사드 연합군을 만들어 대항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비사드 제국은 강했다. 반 노비사드 운동은 몇 해가 지난 후 천천히 사라져갔다. 아직까지 몇몇의 사람들은 계속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해 할 수 없어.”
검은 머리 소녀의 눈이 흐려졌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향기에 소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한 그 일.
하늘에 나타난 블랙 드래곤의 힘에 의해 트피의 일곱 개의 우물이 하나로 모여 거대한 하나의 오아시스를 만들었던 모습. 모든 도시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모래속에 스러져갔다. 그 블랙 드래곤은 굉장히 슬퍼 보였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눈에 덮여있던 산과 가장 큰 태초의 오아시스.
돌처럼 딱딱해진 빵과 신맛이 나는 가축들의 젖.
바람과 물이 조각해 놓은 여러 가지 종류의 돌과 모래언덕.
힘겹게 사막을 건너면 닿는 오아시스의 찬란한 푸른 물결과 가끔가다 만나는 사막의 유랑민족들. 캐러밴(대상)들의 길을 따라 걷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과 새벽의 서리.
아르아크 족의 유랑이 시작된 저주받을 그 해 카타르 력 710년.
가장 잔인했던 해.
그 후로 큰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어렸을 때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아르아크 족의 한 명일 것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에보라 카싱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은 황가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
책장을 넘기던 소녀의 손이 멈추었다.
‘그런데 나는 왜 황제를 죽이지 못했을까...?’
소녀는 책을 덮었다. 책 표면에는 『세계의 여러 민족과 정복 역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책이었지만 소녀는 매일같이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종족. 트피의 물의 여신 니나의 후손인 아르아크 족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끝을 맺었는지.
소녀는 눈을 꽉 감았다. 자신이 황제를 죽이려고 시도했었던 날 이후 황제가 갑자기 사라졌다.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대공에게 권력을 임의로 양도하고 그녀는 사라졌다. 샤이레슈티 여제.
‘어째서였지?’
자신이 죽이려고 했을 때 샤이레슈티는 생긋 웃었다. 마치 절대 자신이 죽이지 못할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절친한 동생이라서? 그럴 리가 없다. 5살 미만의 아이라도 반역자라면 바로 즉시 목을 베어 버리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