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토요일입니다.
오전에는 여신도 주일 예배를 위해 찬양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대구장로회 하례회에 여신도 연합회 임원으로서 참여합니다.
많은 행사로 여러 사람 앞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것이
복생의 은혜를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주님의 보혈만을 의지하오니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본문 주해)
24~30절 : 예수께서 이방 땅 두로에 가셨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이유는 쉼이 필요했다고 본문을 드러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신들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원하는 여인은 마태복음(마15:22)에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을 보여주는 이 구절을, 아무 상관도 없는 이방여인이 사용하였다는 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실 수 있는 분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는 여인의 믿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로, 이방 여인을 ‘개’로 표현하시며 매정하게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신다. 먼저 자녀를 먹여야 하는데 그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인은 자신을 개처럼 취급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옳다고 하며 개들도 주인의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을 한다.
이 고백은 자존심을 낮추어 자기 딸을 고치려고 하는 모성애로만 볼 것이 아니다. 이 고백은 그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본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29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예수께서 이 고백을 한 여자에게 마태복음에서는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음을 말씀해 주신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의 이런 상황과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드러내시는 것이다.
31~37절 :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시니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다.(데리고 온 사람들과 제자들은 따라갔을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은 여러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때로는 말씀만 하심으로 고쳐주셨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그 딸을 보지도 않고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그런데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자는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의 양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 그리고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으신데 왜 이런 방식으로 고쳐주시는 것일까?
아담 이후의 인생들은 다 생명의 말씀에 귀가 먹었고, 생명의 말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에 새롭게 창조를 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모습은 처음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귀를 만드시고 입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경탄하여 마지않았다.”(36~37, 공동번역)
(나의 묵상)
개로 취급받음을 마땅하게 여기며 ‘주님이 옳습니다’ 고백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역시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시고자 사마리아 땅을 의도적으로 가신 것처럼, 이방 땅 두로에 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내게 보여주셔서, 주님 앞에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항상 옳으신 주님을 고백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자존심이란 아담이 선악과를 다 먹은 이후 생긴,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모든 생각들이다. 이 자존심이 죄인들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죄악 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사탄의 부추김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나도 세상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자 애를 썼다. 생명과는 거리가 먼 자로....
본문의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들을 귀도 없고, 생명의 말을 할 입도 없는 과거의 내 모습임을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의 양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또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내게 새로운 귀와 입을 만들어 주신 것과 같다.
주님께서 복음을 들려주시고, 십자가를 보게 하시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교회를 다녔어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며 살던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고, 십자가의 영광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자가 된 것이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이제 헛된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의 평안 가운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날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말씀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는 마음만 가득하니 나의 자존심을 애써 가꿀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또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 때문에 주저앉지는 않는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구한 혈루병 여인의 믿음도 주님께 주신 것이다.
이 여인들을 보여주시는 것은 그런 믿음을 내게도 주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증거가 내 귀를 새롭게 창조해 주시고, 내 입을 새롭게 창조해 주신 것이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입으로.....
(묵상 기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에바다’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복음의 귀가 열리고, 복음의 입이 열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들은 것을 전하게 하실 때
쓸데없는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행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