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여신도 주일로 지킵니다.
예배의 여러 순서를 여신도들이 맡아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드리든 한결같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저녁에는 서울로 올라갑니다.
일주일 간 예진이네에 머뭅니다.
일상의 흐름이 끊기지만 그곳에서도 주님의 풍성한 은혜만을 간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이 되어 말씀을 받아 먹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본문 주해)
오병이어와 비슷한,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1~4절 : 예수께로 모여든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 되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광야에서 사흘 동안 지나니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예수님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같은 이야기-이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것인가?-로 주님께 대답한다. 그때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느 새 잊어버린 것이다.
5~9a절 :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대인을 상대로 한 기적이라면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도 이방인이 섞인 지역이었다.
오병이어 때 남은 떡이 열두 광주리인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게 임하는 은혜를 보여주신다.
오늘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은 일곱 광주리로서, 일곱은 완전 수이다. 이는 이방인에게도 임할 주님의 완전한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보고 따라오는 무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둘과 일곱으로 남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원하시는 것이다.
9b~10절 : 주님은 오병이어 때처럼, 같은 반응을 보일 것 같은 무리를 흩으신다.
주님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로 주님을 왕 삼게 하기 위해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표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타락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셨다. 타락한 인간들이 죄를 회개하고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던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들을 땅,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신다. 마태는 이곳을 마가단이라고 기록한다.(마15:39)
11~13절 :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힐난하며 다른 표적을 구한다.
‘힐난하다’는 것은 비난 조의 어투로 논쟁하고 싸우고자 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싸울 기세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표적-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을 다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미 기득권에 젖어 있는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겨자씨와 같이 시작된 천국에 몹시 불편함을 느꼈다. 거기다가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뒤틀렸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라는 고상한 표현을 들먹이며 주님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단번에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셨기에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배를 타고 그들을 떠나버리신다.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는 일곱 광주리의 음식이 남았다.
‘열둘과 일곱’은 택하신 이스라엘과 택하신 이방인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자, 남은 자를 의미하는 것임을 오늘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은 이 열둘과 일곱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사실 이들에게 또 다른 놀라운 기적을 보여준다고 해도 이들은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득권 속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며 여러 가지 종교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온갖 것을 누리고 사는 자들이니 사사건건 자신들을 지적하는 예수가 눈엣가시였을 뿐이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완악한 자이며 또 이방인인 나는 예수님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잘만 사는 자였다. 그러니 내게 예수님이 뭐 필요하겠는가?
잘 살고 있는 내게 와서 자꾸만 브레이크를 거는 이분이 뭐가 좋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지신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자가 된 것이다.
십자가는 내게 완벽한 하늘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서 같이 죽자고 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표적을 이미 보았으므로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부르심을 받은 자, 일곱 광주리의 은혜 속에 들어가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알고 누리는 자가 되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마음이 어떻게 스스로 결심한다고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절망적인 십자가를 멀리 하고 싶었던 때는 있었어도, 스스로 십자가를 사랑하리라고 결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십자가를 붙드는 자 되고, 십자가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자가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일곱 광주리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참된 표적인 십자가를 붙들게 하신 주님 앞에 오늘도 두 손을 들고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
(묵상 기도)
주님,
은혜 베푸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제게
이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일곱 광주리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의 십자가를 붙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누리며 기뻐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