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1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은 아무 말도 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하실 때에 곧 그 나무가 말랐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인데 그들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함으로 주님이 그 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임을 압니다.
나의 믿음 없음도 하감하여 주사 주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나는 마땅히 주의 공의의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는 자입니다.
더럽고 추하며 악한 정욕과 탐욕으로 가득 채워진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그 교만과 자기주장의지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 또한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자인데 이런 나를 살려주셨으니 오늘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를 먹고 사는 풀잎이게 하소서.
영롱한 새벽이슬을 머금고 있는 그 풀잎이 자기의 힘으로 살지 않고 아주 작은 이슬 한 방울로 살아가는 그 모습 앞에서 더욱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주님의 날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8:1-13
제목 :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4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 나의 묵상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자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면 돌아가다가 기진하여 죽을 자들도 있었다.
제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 광야에서 떡을 얻어다가 이들에게 줄 수 있겠느냐고 주님께 묻는다.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니 제자들이 7개 있다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떡 7개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렇게 하였다.
생선 두어 마리도 축복하시고 그렇게 하셨다.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7광주리가 남았다.
그것을 먹은 사람들은 남자가 4천 명 정도였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하였다.
이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 절대로 이 세대에게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 하시고 배를 타고 다시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오늘 본문을 일컬어 칠병이어의 기적이라고들 한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내용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깨달았어야 했다.
이미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남자만 5천 명을 먹였던 그 사건을 그들이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면, 다른 그 무엇으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었던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면서 여기 떡과 물고기가 있음을 말씀드리고 이것으로 무리를 먹여달라고 요청을 했어야 옳았다.
사흘이나 주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허기져 배고파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보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떡을 사서 먹일 생각밖에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는 제자들만큼은 염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떡과 고기를 주님께 내어드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제자라고 하면서 이들 역시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였다는 방증이다.
오늘 나는 어떤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닥친다.
내게 유리한 상황이 오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상황이 올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내게 유리한 상황은 그대로 받으면서도, 내게 불리한 상황은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꾸거나 상황을 모면하려는 자가 아니었던가?
유리한 것은 말하고 불리한 것은 입을 다물거나 거짓으로 상황을 바꿔서 말하여 모면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실존이다.
존재 되신 주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간다고 하면서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면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였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온갖 고락을 같이 하는 제자들도 그랬는데, 하물며 나 같은 자야 오죽하겠는가?
주님께서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참 뜻을 깨닫지 못하여 남의 다리만 긁는 제자들이나 끝까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이나 주님 앞에서는 진노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참 뜻, 곧 그 떡이 육신으로 먹는 떡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임을 안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육신의 떡을 구하고 유대인들처럼 모세의 만나를 구하였던 것이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기적은 결코 육신적으로 만족을 주고 신기함을 높여주는 그런 기적이 아니다.
이는 생명을 주는 기적이요, 또한 표적 중의 표적이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의 명백한 표증인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으심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그 생명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눈이 멀어 겉으로만 주님과 함께하는 것처럼 보일 뿐, 진리 안에서는 영적 소경으로, 영적 귀머거리로 사는 내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런 나는 당시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동일하게 진노의 대상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영생을 창세전에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들의 생명을 얻은 이들이 반드시 영생을 얻을 것임을 언약으로 맺으셨다(딛 1:2).
이 언약은 다름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아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그렇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이다.
나는 오늘 그 창세전 언약을 믿는다.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언약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언약인 새 언약을 성취하셨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나 비록 이 땅에서 넘어질지라도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믿는 담대함 곧 파레시아로 인함이다.
나로써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나의 능력이나 나의 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철저히 죽어야 합당한 자요 가장 비참한 자임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그 십자가를 보고 한 걸음씩 내딛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적인 기적만을 구했던 나는 바리새인과 다름 없나이다.
주님께서 그토록 기적을 행하시면서 그 속에 있는 참 뜻을 알기를 원하셨고 또한 그것을 친히 설명해 주셨건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것으로만 이해했던 우매한 제자들의 모습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우매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다 도망갔던 그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이후로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고 선포하였나이다.
그런 우매한 자였던 내가 이제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길을 붙드시되 편하고 안락한 삶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는 반드시 고난이 수반됨을 아오니 고난이 있더라고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주의 우주적인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전할 때 당하는 고난이 곧 주님의 고난임을 주께서 인정하시오니 그 고난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남은 때를 잘 계수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가운데 기다리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