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대해 우리는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의 폭군으로 알고 있다. 그는 조선 왕조 14대 임금 선조의 아들이요, 16대 임금 인조의 숙부이되 '祖'나 '宗'의 묘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때 이름 광해군으로서만 영원히 기억되는 불운한 왕이다. 폭군에 패륜아라는 오명을 쓴 채 반정군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볼 때 현명한 군주였다. 조선의 두 멍청한 군주 중 하나인 선조가 왜의 침입으로 의주까지 도망쳤을 때 광해군은 세자의 신분으로 평양에 남아 왜의 공격에 맞섰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순탄치 않았다. 일단 그의 아버지 선조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오른 것에 콤플렉스를 느꼈고, 의인왕후에게서 적자를 볼 수 없자 세자 책봉을 미루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국가와 임금의 운명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자 신하들은 분조(分朝)를 원하고 있었다. 선조가 총애한 신성군(인빈김씨 소생)은 이미 죽었고, 장남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행동이 즉흥적이고 경솔하여 국왕의 자질이 없었다. 대신들은 광해군을 지목하여 세자 책봉을 결정해 달라고 하였고, 선조가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했을 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의 고명을 받아야 왕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명에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존재하는데 원칙을 무시하고 동생을 세자로 정한 조선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 명의 고명을 받지 못해 불완전한 상태의 왕세자 신분이었다. 그러다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는 위협 상태에 놓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선조가 죽고 선조의 유명과 인목대비의 언문 교서로 광해군이 조선 제15대 군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였다. 그 와중에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이 죽었으며, 인목대비 또한 유폐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성군이었다. 여러 대신들의 조언을 경청하여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고 조정의 기풍을 바로잡았으며, 왕권 강화에 나섰다.
그는 초당적인 인사관리로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불에 타버린 궁궐을 복원하여 왕실의 권위를 살렸으며, 민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는 과세 체제를 일원화시키고 백성들의 납세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함이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였다. 양전을 실시해 경작지를 확대하고, 백성들의 부담에 큰 무리 없이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국제정세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당시 북방을 살펴보면 여진의 후금이 강성해져 명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구원병을 파병한 것을 생색내며 지원병을 파병하라고 요청하였다.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강성해지는 후금을 적으로 두기에는 조선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광해군은 1만명의 군사의 파병하는 것으로 출병을 결정하였지만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즉 구원병의 총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적당히 명을 도와주면서 명이 밀리면 은밀히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광해군의 계획된 외교 전술로 명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중립 외교의 하나였다.
이 전략으로 광해군은 후금의 동태를 파악하여 그들의 조선 침략 계획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 전술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실리적인 외교는 일본과의 관계에도 효과가 있었다. 즉위한 다음 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중단된 대일 외교를 부활하여 오윤겸을 일본에 보내어 실용적인 외교를 하였다.
또한 그는 민심을 수습할 목적으로 한양을 복구하는 것보다 도성을 옮기는 것이 경비도 절감되고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도성을 파주 교하로 옮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광해군의 천도 계획은 명의 지원군 파병과 산적한 정치 현안 때문에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 같은 발상은 외국과는 실용적인 외교를 하고, 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한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평할 수 있다.
문화면에서는 손실된 서적과 자료를 간행하도록 하여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출간하였다. 국조보감을 증보 간행하여 정사 운영에 활용하도록 하였고, 실록 보관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사대주의에 철저히 찌들은 세력들이 능양군과 의기투합하여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이 군사를 동원,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붙잡아 폐위시키고, 대북파들을 대거 체포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이들이 내세운 반정명분은 명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의리를 배반하였고, 영창대군과 친형까지 죽이는 등 정치적인 폭정이 극에 달했으며,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불효까지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 주모자들의 명분에도 엄청난 착오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국력이 점점 기울고 청나라의 국력은 상승 곡선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시도한 외교 전략은 명나라와의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국교를 유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전략으로 조선의 위상을 몇 단계 높일 수 있었고,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실리적인 무역까지도 가능케 한 사실을 사대주의자들은 간과한 것이다. 결국 이들의 대명 사대주의가 광해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 되었다. 이들의 반정을 막는 것이 오히려 국가발전을 위한 길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달했다는 부분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폭정이란 독재 권력자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협박하거나 백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민생을 향한 위협이 아닌 집권세력을 대상으로 행사한 정치행위를 폭정으로 간주한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역대 왕들과 비교해 살펴보아도 그의 치세를 폭정이나 폭군으로 매도하는 역사관은 시정해야 옳다.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정적이나 자신에게 반격할 인물을 미리 가려내어 제거한 일은 이전에도 빈번했다. 이방원은 정몽주, 정도전, 왕세자를 죽이고 친형제까지 유배시켰다.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자신과 정치관이 맞지 않는다 하여 김종서 부자를 죽이고, 사육신까지 잔인하게 죽이지 않았는가? 그들 논리대로라면 이들도 폭군이 되어야 한다.
광해군은 선량한 백성을 부당하게 위협하거나 억울한 희생을 강요한 일은 없다. 경제를 부흥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고, 국토방위를 더욱 튼튼하게 했으며, 한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명, 청 두 나라와 동시에 동맹관계를 맺어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폭정을 일삼아 온 광해군이라는 표현은 너무 지나친 비판이다.
또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역사관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연산군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포기한 군왕으로 폭군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대신들의 탄핵에도 끝까지 그녀를 지켰고, 중립외교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으며, 왜구와의 관계에서도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전쟁보다는 대화 중심으로 풀어간 것을 보아도 연산군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자들이 정치 이념이 다른 정적을 제거한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므로, 왕권을 뒤엎은 역모사건, 즉 반란이라 할 수 있다.
반정 후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를 죽였으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했다는 것이고, 과도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에, 결정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폐모살제는 어쩔 수 없는 광해군의 허물이다. 당쟁의 와중에서 광해군은 자신보다 아홉살 어린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켰고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다. 또 광해군이 지시한 일은 아니지만 아홉살 난 영창대군이 펄펄 끓는 방 안에서 쪄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를 일컬어 패륜이라 할라치면 조선왕조 스물일곱 임금 가운데 온전한 자가 누구인가? 광해군 다음으로 즉위한 인조만 해도 광해군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까지 다 죽여 없앴다. 토목공사 건 역시 그렇다. 전란 통에 궁궐도 관청도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나라에서 국왕으로서 그렇게 못할 일이었을까.
사실 광해군이 쫓겨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였다. "再造之恩(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밀통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명은 내부적으로는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국세가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고, 후금은 떠오르는 강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옛 정을 운운하며 명을 돕는다는 건, 아직 전란의 여파가 남은 조선으로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광해군은 전쟁을 막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중립외교를 펼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시대를 정확히 꿰뚫어본 안목이었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귀양 갈 때, 광해군을 수행한 병졸들은 안방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광해군은 건넌방에서 재웠다. 심지어 계집종까지도 늙은 것 운운하며 욕을 보였고 아내는 목숨을 끊었고 아들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다. 며느리는 그 망을 보아 주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광해군만큼 처참한 인생이 또 있을까? 광해군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어느 교회묘지 위에 나동그라져 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의 묘도 지척에 있어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지만 광해군은 그럴 후손도 없어 수백년동안 제삿밥 얻어먹은 적조차 없다.
광해군을 단죄한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을 죽였다. 그들은 광해군의 대 후금 햇볕정책을 최전방에서 실행하던 충실한 관리들이었다. 그들이 죽었을 때 조선에 피신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쾌재를 불렀다고 하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바로 그 4년 뒤,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고(정묘호란) 또 그 9년 뒤엔 13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친정(병자호란)으로 후임자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짓찧어 이마가 피범벅이 되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반정 이후 조선 후기 내내 광해군의 이름은 폭군과 혼군과 어두운 임금의 대명사였다. 각종 기록에서 폭군이라 함은 광해군보다 열배는 더 포악했던 연산군이 아니라, 광해군을 일컬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선을 누비며 백성들을 묶어세웠던 왕세자 광해군의 활약과 완강하기 이를데 없는 벼슬아치들과 기득권 상인들의 발악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했던 광해군의 개혁 정책과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광해군의 외교적 노력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광해군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이 책임진 억조창생의 안위를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신하들과 싸웠고 명나라를 구슬렸고 후금의 철기 병을 달랬다. 그래서 적(?)과 밀통하기도 했고 그것이 “천리(天理)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 위로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였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조선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었다.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폭군으로 점철된 광해군. 그는 폭군이 아니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에 맞서 조선을 재건하고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주려 한 위대한 임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