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와 세종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신하를 불러들이다.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양녕대 군(세종의 형)의 세자 폐위에 반대하다 유배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황희 사람됨을 눈여겨 본 태종이 다시 불러 세종에게 청거했다. 그때가 세종 4년(세종 26세,황희 60세)이었다. 자신 의 즉위를 반대하던 신하를 유배지에서 불러 과전을 돌려주며 관리로 다시 등용한 것은 세종 의 대단한 인사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또한 원칙과 소신이 있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황희의 사람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며 늘 곁에 두려 했다. 세종은 분명하고 강력한 청치력이 요구되는 부분을 주로 황희에게 맡겼다. 황희로 하여금 변 방의 안정을 위해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토록 했고,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의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 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희는 24년간 내각에 있 으면서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18년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황희가 탄핵을 받을 때마다 혹은 고령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을 청할 때마다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1449년(세종 31년),무려 87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자리를 지키다가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을 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치세에도 도움 을 주었다. 황희는 사후 "익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세종에게 제향을 올릴 때 같이 제향 을 올리는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학덕이 높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공무처리의 귀제로 불린 사람이었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인정 많고 사람 좋은 선비였다. 조선시대 최 장수 재상으로 있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렴함에 대한 일화가 황희정승이라는 애칭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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